" 김서방 왔네.. 빨리 들어와.. "
현관으로 들어서자 엄마가 우혁이를 받아 들며 반긴다.
" 치영이는.. "
" 제 방에 있어, 금방 나올거야.. "
군에서 제대한 동생 치영이를 축하해 주기 위해 남편과 함께 친정으로 왔다.
" 누나 왔어? "
" 처남 수고했어.. 건강해 보이네.. "
" 수고했다, 치영아.. "
" 자, 이리들 와라.. "
치영이가 제 방에서 나오고 나서야, 거실에 차려놓은 음식상 앞으로 식구들이 모여 앉았다.
" 뭘 이렇게 많이 차리셨어요, 오늘은 처남 덕에 배 터지게 먹게 생겼네.후후.. "
" 어머나.. 우리 사위가 이렇게 공 없는 소리를 한다니.. 김서방이 올때마다 맛있는거만 해다 바쳤구만.. "
" 그건 당신말이 맞어.. 아무리 사위 사랑이 장모라지만, 자네만 오면 나는 찬밥이야.후후.. "
" 어, 그게 그렇게 되나요.. 죄송합니다, 아버님.. "
" 당연히 죄송해야지, 아무리 우리 사위가 이뻐도 이번엔 자네가 실수한거야.호호.. "
곰살맞게 구는 남편을, 엄마나 아빠 역시 끔찍하게 싸고 돈다. 물론 부모님 입장에서야 하자가 있는 딸을 거둬 줬으니
당연히 사위가 믿음직 하겠지만, 너무 남편의 기분만을 살피는 부모님을 대하면 웬지 모르게 개운치가 못하다.
" 처남도 한잔하라구, 술도 잘 마시면서 아직도 군기가 안 빠졌나? "
" 그래, 오늘같은 날은 한잔해라.. 애비 어려워하지 말고, 매형이랑 같이 마셔.. "
" 네, 아버지.. "
동생의 제대를 축하한다고 모인 자리지만, 정작 주인공인 치영이가 가라앉은 분위기다.
눈치없는 엄마는 사위만 보이는지 그와 함께 주거니,받거니 술잔을 기울인다.
" 누나, 잠깐 나 좀 봐.. "
식구들의 눈치를 살피며 치영이가 일어서서 제 방으로 들어간다.
" 왜, 무슨일인데.. "
" 매형이 살아있대.. "
" ........................ "
" 누나도 알지? 왜, 정윤철이라고 매형이랑 친한 친구였던.. 그 선배가 그러더라구, 매형이 살아서 돌아왔다고.. "
전 남편인 진호나 민수, 치영이까지 같은 학교 선후배간이니 그럴만도 했다. 치영이가 진호가 살아온 소식을 들었으니
민수도 조만간 알게 될 일이라고 보여진다.
" 당분간 모른척 해.. "
" ....누나도 알고 있었어? "
" 만났어, 며칠전에.. "
" 그랬구나.. 어때, 아픈덴 없어 보였어? "
" 다리를 다쳐서 왔더라.. 수경이랑 둘이 살어.. "
" 그때 엄마가 누나를 끌고 오지만 않았어도.. "
유난히 진호를 따랐던 치영이다. 고등학교 시절, 진호와 동거를 하던 좁은 집에 찾아와 과외를 받기도 했다.
그런 치영이를 진호도 많이 챙겨 줬다. 아마 치영이한테 술 마시는 법을 가르쳐 준 것도 진호였지 싶다.
" 다 지난 일이야, 이제 와서 따지면 뭐하니.. "
" 진호형이 많이 힘들겠다.. 누나도 딴 사람한테 시집을 갔으니.. "
" ......................... "
" 에이, 참.. 엄마는 쓸데없이.. "
" 너, 그 사람 보고싶니? "
" 보고는 싶은데, 미안하잖어.. 누나가 딴 남자의 여자가 됐는데.. "
" 속상하겠지만 원망은 않더라.. 오히려 나한테 행복하게 살라면서.. "
" 글쎄, 그 형은 사람만 좋다니까.. "
" 그러게 조금만 마시라니까.. "
" 장모님이 자꾸 따라 주시는데 어떡해.. 버릇없는 사위가 될지도 모르는데.. "
아빠와 엄마가 따라주는 술을 마신 남편이 잔뜩 술이 취하는 바람에, 우혁이를 들쳐 업고도 그까지 부축해서는 간신히
집으로 돌아올수 있었다.
" 얼른 씻어.. "
" 우리 얘기 좀 하자.. "
" 무슨 얘기.. "
" 다 알고있어, 진호 만난거.. "
" .......................... "
일순 흠칫했지만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치영이가 진호가 돌아 왔다는 소식을 접할 정도면, 워낙 발이 넓은 남편도
그 얘기를 들었을 법 하다.
그렇지만 진호와 내가 만났음을 확신하는 그의 얘기는 가슴이 철렁할만큼 놀랠수 밖에 없는 일이다.
" 어때.. 잘 지내? "
" 얘기하려고 했어, 나도 만난지 며칠 안돼.. "
" 만나야겠지, 애도 있으니까.. "
" 그래서 만났어.. 젖먹이를 떼어 놨으니까.. "
" 원망 많이 하지? "
" 아냐, 그 말은 틀려.. 당신하고 행복하게 살라더라.. 얘는 자기 혼자 키우겠다면서.. "
" 앞으로 어떡할래.. 니 마음이 제일 중요한건데.. "
" 솔직이 잘 모르겠어.. 몇년만에 애를 만나 보니까 내가 못할짓을 했구나라는 생각밖에.. "
" 그래, 그랬겠지.. 나 씻을께.. "
술이 취해 몸을 가누기도 어려워 보이던 그가 말짱한 걸음걸이로 욕실로 들어간다.
내가 진호를 만난걸 미리 알고 있었으면서 모른척 했을 그의 속내가 궁금해 진다. 더불어 친정에서 마신 술로 취하지
않았음도 알게 됐다. 이제 앞으로 어찌 처신을 해야 하는지도 고민스럽다.
우혁이를 갈무리 해 애기 침대에 뉘이고, 주방에서 내일 아침거리를 준비하는데 욕실에 들어갔던 남편이 나왔다.
" 나, 피곤해서 그러는데 먼저 잘께.. "
주방 언저리에서 그 말만을 남기고 안방으로 들어가는 남편이다.
그가 평소와 다른 행동을 보임에 또 다시 고민을 해야 했다. 보통때의 남편이라면 뒤에 와서 껴안고 귀찮게 하거나,
술 냄새를 풍기며 엉덩이라도 더듬었을 것이다. 날 가까이 하기엔, 뭔가 석연치 않은 감정이 생긴듯 했다.
진호를 만났다는게 그의 마음을 상하게 했을지도 모른다는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아무리 마음이 넓다 한들, 예전 둘 사이에 애까지 있는 진호를 만나고 왔다는게 분명 편치만은 못하지 싶다.
남편의 변한 행동이 나에게까지 전염되어 불편하다. 그렇다고 이해까지 바라는건 아니지만 어찌 처신을 하라는건지
답답한 심경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