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4년이란 세월이 지났건만 그 곳은 예전 그대로다.
대학 주변의 커피숍이나 호프집, 당구장도 그 전의 그 모습 그대로 학생들의 발걸음을 맞이하고 있다.
학교 정문을 지나 양쪽으로 늘어선 화단 중간중간 수목들도 제 자리에 뿌리 박은 그대로였다.
변한게 있다면 인문관 뒤에서 기다리고 있을 진호와 자신의 젊은시간이 흘러 갔음이고, 서로가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 다녔던 그 당시만이 추억이란 이름으로 탈바꿈 된 것이리라.
느닷없는 진호의 핸폰을 받고 어찌해야 할지를 고심해야 했다. 돌이킬수 없이 뒤집어 진 인연의 끈은 이미 놓은지
오래인 마당에, 그를 다시 본다는게 잘하는 짓인지 판단조차 어렵다.
지금의 남편인 민수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할지조차 결론을 내지 못한채, 약속 장소인 이 곳으로 와야 했다.
무려 4년간을 끔찍하게 사랑했던 사람이다. 이제는 애절한 슬픔만이 남아 눈물마저 말라버린 과거가 되었지만,
그를 만나지 않고는 엉켜버린 이 현실이 바로 잡히지 않을것 같은 두려움이 더 컸는지도 모른다.
" 엄마, 우혁이 좀 봐 줘요.. "
" 어디 가니? "
" 친구들하고 약속이 있어.. "
" 애 엄마가 친구는, 무슨.. 김서방이 알면 어쩌려구.. "
엄마의 마지막 말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지만, 개념치 않고 친정집 대문을 나서고야 말았다.
점심시간이 되어 본관 건물에서 내려오는 학생들 사이를 거슬러 인문관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곧 그의 얼굴을 볼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예전의 버릇처럼 나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진다.
인문관 우측을 끼고 돌아, 수목이 우거진 언덕 밑 벤치에 그림인 양 그의 형상이 보인다.
조금은 거리가 있어 얼굴 윤곽이야 뚜렷치 않지만 그가 틀림없다. 그를 확인하고는 나도 모르게 발이 얼어 붙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움직일수가 없다. 고개를 떨구고 땅바닥에 시선을 줬던 그의 허리가 곧추 세워졌다.
그의 머리가 이쪽을 향해 돌려진다. 순간적으로 그 역시 경직되는가 싶더니, 이윽고 몸을 일으켜 내쪽으로 다가온다.
한 손에 지팡이가 들려있고, 그 지팡이로 바닥에 의지하는 만큼 다리를 절고 있다.
" 오랜만이다.. "
" ...................... "
눈 앞에까지 그가 다가 왔는데도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가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쥔다.
" 하나도 안 변했어, 여전히 이뻐.. "
그의 손을 통해 체온이 전해진다. 언제나 따스하던 그의 손이 틀림없다.
" ...................... "
" 어디라도 들어가자.. "
내 손을 놓은 그가 내 옆을 지나쳐 휘적휘적 걷기 시작한다. 그 전처럼 그의 옆에 나란히 걸어야 할지, 뒤를 따라가야
하는건지 갈피를 잡을수 없다.
예전에 같이 자주 갔던 막걸리 집으로 진호가 앞서 들어간다.
" 잘 있다는 소식은 들었어.. 좋아 보인다.. "
막걸리 주전자를 들어 두 잔에 술을 따르고는 한모금 들이킨 그가 나를 건네다 본다.
" 어떻게 된거야? 거기서 건물이 무너져 사망했다고 했는데.. "
" 얘기하자면 길어.. 이렇게 살아 왔잖어.. "
" 난, 이미.. "
" 알아, 새로 결혼했다는거.. 누구랑 살고 있는지도.. "
내 말을 가로막은 그의 목소리가 더 빨랐다. 모든걸 알고 있으니 불필요한 말은 듣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들린다.
" 널 원망하려고 만나자고 한건 아냐, 그냥 보고 싶었어.. "
" 지금도 믿기지가 않아.. 어찌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
" 그냥 이대로 가야겠지, 되돌리기엔 너무 멀리 왔어.. "
모든걸 체념한 듯한 그의 말이 공허하게 들린다. 한때는 행복하게 살자며 굳게 언약했던 사람이다.
" 모르겠어, 난.. 왜 이렇게 됐는지.. "
" 수경이가 많이 컸어, 널 많이 닮았더라.. "
" ...미안해, 그 어린걸 떼어놔서.. 나도 힘들었어.. "
아직도 꿈 속에 수경이가 나타나는 바람에 가위에 눌릴때가 많다. 말귀도 알아듣지 못하는, 어린걸 버린 죄를 받는다
싶기도 했다.
" 엄마가 그러더라, 널 원망하지 말라고.. 니가 최선을 다 했다면서.. "
진호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며칠 밤낮을 곡기를 끊고 울기만 했다. 어린 딸에게 젖을 물릴 기운조차 없었다.
같이 살던 시어머니가, 울음이 터져 엎어져 있는 내 등을 말없이 쓸어주곤 했다.
몇차례인가 친정 엄마로 인해, 강제로 그 집을 끌려 나올때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눈물을 훔치곤 하셨다.
생떼같은 외아들이 머나먼 타국에서 죽고, 그 시체마저 찾지 못한 아픔이 컸으련만 내 앞에서는 내색도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젊은 나이에 생과부가 된 당신의 며느리를 위해, 정작 본인은 슬픔을 삼키고 계셨을 것이다.
" 어머니는.. "
" 혼자 사셔.. 무의탁 노인을 위한 보호시설이 있더라.. "
" 그럼, 수경이는? "
딸 아이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진다. 젖먹이를 떼어 놓고는 단 하루도 편안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
" 작은 이모집에 맡겨 놨더라, 며칠전에 데려왔어.. 재롱이 보통이 아냐, 꼭 너를 보는것 같애.. "
" ....정말 미안해.. "
" 니 잘못은 아니잖어.. "
" 다리는 어떻게 된거야? "
수경이 소식을 듣고자 하는 용기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서둘러 그의 말을 막은 이유다.
" 그 당시 많이들 죽었지.. 이틀이나 지나 건물 잔해속에 있는 나를 발견했다고 하더라.. 그때도 한창 내전이 계속되던
때라, 외국사람인 내가 효용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야.. 반군들 손에 넘겨지고, 그들이 이동하면서 또 다른 조직에
넘겨지고.. 나중에는 모든게 포기가 되더라.. "
그때 일이 상기가 되는지 막걸리를 벌컥벌컥 들이키는 진호다. 머나먼 타향에서 겪었을 그의 외로움이 전해진다.
" 몇년인가를 그렇게 떠 돌았지.. 물도 없는 사막에서 근근히 버티면서도 나를 붙잡아 준게 있었어.. "
속으로 울고 있는지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막걸리 잔을 쥐고는 북받치는 감정을 삭히려 한다.
" 사막의 밤하늘도 서울과 똑같더라.. 우리 별 기억나? "
" 전갈자리.. 꼬리별.. "
" 그래.. 그 별을 보며 니 생각을 했어, 언젠간 너한테 돌아 갈거라고.. "
" ......................... "
제대로 얻어 먹지도 못했을 그가 사막의 밤하늘을 올려다 보는 모습이 그려진다. 청평으로 첫 MT를 갔을때 그가
내 옆에 있었다.
청평의 밤하늘을 올려다 보며 그 꼬리별이 내 별이라고 가르쳐 준 그였다.
그날 그에게 처녀를 주었었다. 잔디에 누워 그를 받아 들이면서, 온통 별들이 머리위로 쏟아지는 환상도 봤다.
" 이젠 다 물거품이 됐지만.. 민수 선배가 잘 해주지? "
" .....응.. "
" 그럴거야.. 그 전부터 너한테 호감을 보였으니까.. "
" 그랬어? 난, 몰랐는데.. "
" 이제와서 그게 무에 중요하겠어, 너만 행복하면 되지.. "
갈 시간이 되었다며 지팡이를 짚고 일어서는 그가 힘겨워 보인다. 그의 한쪽 팔을 잡고는 의자를 밀쳐 주었다.
" 선영아.. "
" 응? "
" 한번만 안아보자.. "
무심코 그의 눈을 들여다 봤다. 그 눈빛을 대하고는 거부할수가 없었다.
그에게로 다가가 그의 품에 안겼다. 한참을 그렇게 망부석이 되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