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치 좋은 한계령 꼭대기 휴게소에서 핸폰으로 사진을 찍어가며 시간을 보냈다.
손아귀에 넣기 힘들게 생각했던, 미영이의 사진을 담는것 만으로 세상을 얻은 기분이다.
그만큼 눈에 띄는 미모였다. 친구 따라 강남을 간다고 친한 친구인 호식이가 안내를 해 준 방배동의 제임스 딘을
찾았을때, 마치 별천지에라도 온 것 마냥 그곳의 분위기에 휩쓸리게 됐다.
여느 또래의 녀석들과 다름없이 괜찮은 사냥감을 물색하던 중, 작은 무대위에서 땀까지 흘리며 춤에 몰두한 미영이가
눈에 들어왔다.
고교시절 동창생인 여자 애들 사이에서도 나름 잘 나가는 킹카로 인정을 받기는 했지만, 노는 물이 틀려서인지
첫인상부터 남달리 세련돼 보이는 미영이의 춤사위에 넋을 잃고 말았다.
어찌어찌 어렵사리 그녀에게 말을 붙일수 있었고, 말도 안되는 허풍까지 떨어대며 그녀에게 작업을 걸었다.
" 나, 바다가 보고싶어.. "
첫 대면부터 승용차를 가지고 있는지 떠 보는 의도였겠지만, 그녀의 소원을 무시할순 없었다.
" 며칠내로 가자, 단풍이 죽인대.. "
아빠한테 차를 사 달라고 졸랐지만 씨도 먹히지 않았다. 미영이에게 큰소리를 친 것이 부도가 나게 생겼다.
안방에 있는 금고를 열고는, 패물과 금붙이를 몽땅 털어 그날로 중고차를 사 버렸다.
그만큼 미영이를 놓치기 싫었기 때문이다. 한계령 주위로 울긋불긋 물든 단풍에 빠져 함박 웃음을 짓는 미영이를 보며
저절로 흡족해 지는 정호다.
" 이만 가자, 한 시간도 더 가야 돼.. "
" 응.. "
통통 튀듯 내 팔에 매달리는 미영이다. 긴 생머리가 바람에 흩 날리고 향긋한 내음이 코로 스민다.
" 이거 받아야지.. "
집 앞에까지 승용차로 바래다 준 윤수가 돈 봉투를 내민다.
" ....고마워.. "
윤수의 애인 대행을 해주는 대신, 돈을 받기로 하고 시작한 만남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편치가 못한 수진이다.
차라리 모르는 남자에게 몸뚱아리를 팔고 쌩 깔수만 있다면 이런 기분까지는 아니지 싶다.
처음에는 당연히 그러하리라 작정한 만남이었다. 하지만 여지껏 받아보지 못한 윤수의 친절에 요즘에 와서는 계속
이런식으로 만나야 하는지 갈피를 잡기가 어렵다.
따스한 마음까지 담아 챙겨주는 윤수의 정성이 고맙긴 하지만, 그에 따라 내 자신이 마냥 초라해지는 느낌이 들어
복잡한 심경이다.
" 이따 알바 끝나고 만날래? "
" 또? "
" 왜, 싫어? "
" 여지껏 꼬박 있었는데 또 만나자고? "
" 응.. 보고 싶을것 같애.. "
" 에구, 참.. 나도 내 시간 좀 갖자, 애처럼 조르기는.. "
" 내가 생각해도 병이야.후후.. "
엊저녁부터 지금까지 만 하루를 같이 지냈는데, 애들처럼 보채는게 어이 없기도 하지만 일견 귀여운 투정으로 보여진다.
한달 내내 편의점에서 알바를 해 봐야 100만원이 겨우 넘는 액수다. 윤수를 만난지 일주일만에 120만원이나 건네
받았다.
" 이따 봐서.. "
" 그래, 얼른 들어가.. "
골목 입구에서 차를 돌려 멀어져 가는 윤수를 보며 여러가지 잡념이 떠 오르는 탓에 개운치가 못하다.
" 할머니.. "
한쪽이 내려 앉아 삐걱이는 샷시문을 열었건만 할머니 방에서는 기척이 없다. 방문 앞에 할머니의 신발이 놓여져 있다.
" 자는거야? "
무심코 방문을 열고 들여다 보니 할머니가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다.
" 수진이 왔구나.. 에고고~ "
고개를 돌리는 것 마저 힘들어하는 할머니의 입에서 고통스런 신음이 흘러 나온다.
" 왜 그래, 할머니.. 어디 아퍼? "
신발을 어떻게 벗었는지도 모를만큼 방으로 뛰어 들어가 할머니의 이마부터 짚었다. 엄마가 집을 나간 뒤 할머니만을
의지하며 살아 온 지난날이다.
그런 할머니가 잘못되리라는 생각은 해 보지 못한 터이다.
" 아냐, 에고~ 그냥 허리가 조금.. "
" 어디 봐.. 여기야? "
" 아야야.. 에구~ "
" 갑자기 허리가 왜 아퍼? 많이 아퍼? "
" 넘어져서.. 삐긋했나 봐, 에구구~ "
숨 쉬기도 거북할 만큼 고통을 호소하는 할머니를 어찌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 혹시.. 또 파지 날랐어? "
" ....에구구~ "
작년에도 손녀 딸이 벌어다 주는 돈은 축내기 싫다며, 종이 박스며 빈병들을 주우러 다니곤 했다. 이미 70이 훌쩍 넘어
부엌일조차 힘들어 하는 나이인지라, 다시는 그런일을 하지 말라며 할머니에게 화까지 낸 적이 있다.
" 내가 미쳐.. 하지 말라고 했잖어.. "
" 에구구~ "
허리를 만지지도 못하게 할 정도인걸 보면 심각하지 싶다. 불현듯 방금 헤어진 윤수가 떠 오른다.
할머니를 방 안에 있게 둔 채, 집 앞 골목으로 나와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왜? 오늘 시간 돼? ~~
" ...그게 아니라.. 할머니가 많이 아퍼.. "
핸폰을 통해 들리는 윤수의 목소리는 마냥 반가워 하는 기색이다.
할머니의 일까지 얘기를 해야 하는건지 판단이 서진 않지만 달리 어찌해 볼 방도가 없음이다.
~ 어디를.. 얼마나? ~~
" 허리를 다쳤는데.. 꼼짝을 못해.. "
~ ....일단 119를 불러, 보라매 병원으로 모시고 가.. 금방 뒤따라 갈께.. ~~
" 응.. 알았어.. "
세상 천지에 누구 하나 도움을 줄 사람이 없음이다. 각박한 세상에 할머니와 단 둘이 남겨 져, 힘겹게 서로를 의지하고
살아왔음에 이런 돌발 상황이 두렵기만 한 수진이다.
" 응급실에 계셔? "
" 응.. 어쩜 좋아.. "
119에 실려 병원 응급실로 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윤수가 도착했다.
" 접수는 했어? "
" 아니, 아직.. "
" 일단 접수부터 하자.. "
큰 병원이라곤 와 본 경험이 없기에, 묵묵히 윤수의 하는 양을 지켜보기만 했다. 접수 창구에서 입원 수속까지 마치고는
건물 밖에 있는 화단 앞에 나란히 앉았다.
" 너무 걱정하지마.. 아는 의사한테 얘기 해 놨어.. "
" ...고마워.. "
" 고맙긴, 바보같이.. "
눈물이 그렁대 앞이 보이질 않는다. 어깨를 안아 준 윤수의 품에 머리를 묻고 속 시원히 울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