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제 나갔어? 깜짝 놀랬잖어.. "
" 너 깰까 봐 그냥 나왔어.. "
옆에서 자고 있어야 할 성희가 보이지 않아 깜짝 놀란 여진이다. 어제 점심부터 굶다시피 한 성희가 염려스러워
씻는둥 마는둥 병원으로 달려 왔더니, 문도 열리지 않는 응급실 창문에 기대어 하염없이 철수쪽만 지켜보고 있다.
" 어때? 아직도 움직임이 없는가 보다.. "
" 응.. 철수씨가 찾지 싶어서 왔는데.. "
" 일단 미음이래도 먹자.. "
" 싫어, 너나 먹어.. "
" 따라와, 어차피 면회시간이 되려면 더 있어야 돼.. "
손목을 잡고서는 반 강제로 병원 구내식당으로 끌고 내려왔다. 미음이라도 먹여 속을 보호해 주고자 했다.
아픈 철수를 걱정하는거야 이해가 되지만, 자기 자신이 건강해야 병간호라도 할수 있지 싶었다.
" 니 몸부터 챙겨 이 년아.. 위험한 고비는 넘겼다니까 뒷 수발을 들려면 니가 건강해야 돼.. "
" 나도 알지.. 알면서도 밥이 안 넘어가.. "
" 에그, 열부났네.. 진작에 좀 잘하지 그랬어.. "
" 진짜야.. 배도 안 고프고, 자꾸 더부룩 하기만 해.. "
" 더부룩? 너, 혹시.. "
" ...................... "
" 이 년이, 이렇게 무디다니까.. 가자, 산부인과에 접수하러.. "
시켜 놓은 미음에는 손도 대지 못한채 성희의 손목을 잡아 일으켰다.
" 축하합니다.. 8주째 접어 들었네요.. "
" 그것 봐, 이년아.. 무디기는.. "
" ....................... "
그네들의 얘기가 허공에서 맴돈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임신 소식을 전하는 의사의 얼굴조차 낯설다.
" 임신 초기니까 완전히 자리 잡을때까지 주의하시고, 일주일 후에 한번 더 들리세요.. "
" 네, 감사합니다.. 가자.. "
여진이의 손에 이끌려 진료실을 나온 성희는 만감이 교차할수 밖에 없다.
굳이 임신을 피한건 아니지만, 철수가 사고를 당해 혼수상태인 지금 어찌 처신을 해야 하는지 판단조차 어렵다.
" 어쩌니, 여진아.. "
" 일단 응급실로 가보자.. "
산부인과에서 진료를 받는 사이, 이미 응급실은 면회를 할수있는 시간이 됐다. 우리보다 윤식씨가 먼저 와 있었다.
" 일찍 오셨네.. "
" 아, 네.. 늦었네요.. "
" 어디 좀 들렸다 오느라고.. "
" 아까 회진 온 의사가 곧 깨어날거라고 했는데, 아직 이러고 있네.. "
윤식씨와 얘기하는 중에 침대 옆으로 다가간 성희가 철수의 뺨을 쓰다듬고 있다.
두 눈 가득 애절한 슬픔을 담고는, 하염없이 철수의 아픔에 끌려 들어가듯 그렇게 망부석이 돼 버렸다.
너무나도 절절한 성희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기만 해야 했다. 윤식씨 역시 그런 성희를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 그저
바라다 볼 뿐이다.
" 철수씨.. 빨리 일어나.. "
기어코 굵은 눈물을 흘리며 철수의 손을 부여잡은 채, 성희가 조르고 있다.
" 나, 어떡해.. 철수씨.. "
보기가 애처러운지 윤식씨마저 고개를 돌린다. 대답없는 철수의 옆에 선 성희의 어깨가 심하게 떨리는 중이다.
" 아직도 안 깨어난거야? "
" 응.. 의사가 조금만 더 기다려 보라네.. "
오후까지 응급실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온 윤식이다. 철수 옆에 있으면서 지켜주고 싶었지만, 성희를 지켜 본다는게 더
큰 고역이었다.
" 성희씨가 힘들겠네.. "
" 글쎄 말이야, 애처로워서 못 보겠더라구.. "
" 그렇겠지,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어.. "
정미가 직접 보기라고 한 듯 애처러워 하는 중이다. 두 여자가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건만, 언니,동생하면서 금새
친해 졌다.
" 다시 봤어, 그 정도까지는 아닌줄 알았는데.. "
철수 옆을 지키면서 애닮아 하는 성희의 모습은 차마 지켜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마치 세상에 종말이라도 온 것처럼,
일말의 움직임이나 표정의 변화조차 없이 철수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는 그 마음이 들여다 보였다.
" 누구, 성희씨? "
" 응.. 그냥 철 없는 아가씬 줄 알았는데, 상심이 큰가 봐.. "
" 오빠가 잘못 본거지.. 난, 처음부터 괜찮은 여잔지 알았는데.. "
" 그랬어? 난, 걱정이 많았어.. 철수가 여자를 잘못 고른것 같아서 내내 불안했거든.. 뭣 하나 제대로 하는게 없었잖어..
철수가 어찌 되던간에 돈이나 펑펑 써 대질 않나.. 집안 살림도 몽땅 철수가 도맡아서 했고.. "
따지고 보면 성희한테 빠져 직장에 사표까지 낸 철수였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는 성희를 유심히 지켜보기도 했다.
철수가 자신의 행로를 바꾸면서까지 고른 성희가,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여자인지 잣대를 들이댔던 것이다.
" 그러니까 오빠는 여자를 볼줄 모르는거야.. 오빠 눈에는 성희가 제 멋대로 사는 철부지처럼 보였겠지만, 철수씨를
바라보는 눈을 보니까 척 알겠더라.. "
" 그런게 보였다구? 나는 왜 못 봤을까.. "
" 바보같은 오빠 눈에 그게 보이겠어? 내가 무식해도 사람 볼줄은 아네요.. "
정미 말마따나 집안 형편땜에 학교 공부를 못해 그렇지,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른편이다. 내 표정만 보고도 무슨
고민인지 꿰뚫어 보고는 그 해결책까지 제시하곤 한다.
" 그건 또 뭔 소리래.. "
"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그랬어.. 철수씨를 처음 봤을때 고집이 있어 보이더라.. "
" 고집이야 있는 편이지만, 그 고집하고 성희하고 무슨 상관인데? "
" 나쁘게 얘기하니까 고집이지, 고집이 있으면 소신도 있다는 뜻이야.. 그런 철수씨가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한테 얼마나
잘했겠어.. 성희도 그런 정성에 감복했을테고, 여자는 일편단심 자기를 좋아해 주는 남자한테는 못 이기는 법이야.. "
" 그랬나? "
" 그러니까 오빠도 나한테 잘 해.. 괜히 우거지 상이나 짓지 말고.. "
" 내가 뭘 어쨌다고 나한테 화살이 돌아오냐? "
" 남자가 오죽이나 쫀쫀하면 입에 풀칠도 못할까 봐 겁부터 먹냐.. 어깨 펴고 다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