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금만 더 기다려.. 아직 잠들지 않았을거야.. "
" 문 잠갔어요.. "
" 그래도.. 소리가 들릴거야.. "
저녁을 먹고 나서도 한참을 노닥거리다 안방으로 들어왔다.
" 에이, 지금 하고 싶은데.. 아까 선우 얘기 들었죠? "
" 무슨 얘기? "
" 동생이 갖고 싶다잖어요.. "
" 자기 미쳤구나, 이 나이에 애를 낳으라고? "
" 나이는 무슨.. 선희씨도 임신했었는데.. "
" 뭐야? 지금 뭐라고 그랬어, 임신? 그 할머니가.. "
" ....................... "
말 실수를 깨닫긴 했지만, 이미 엎질러 진 물이었다. 도대체가 개념이 없는 내 자신이 한심하다.
" 말이 나온 김에 자세히 얘기 좀 해 봐.. 도대체 그 여자는 어떻게 만난거야? "
" ....................... "
" 말 안할거야? 날, 속일 생각일랑 말고 털어 놔.. "
" 그게, 그러니까.. "
모든걸 털어놓기로 했다. 전 남편에게 갖은 수모를 당하는 그녀를 지켜본다는게 너무 힘들었다는 얘기부터, 그런 그녀를
떠나고자 했던 이유까지 자세하게 설명을 해야 했다.
남편의 뒤를 쫒다 선희를 만났고 그녀의 도움으로 미스홍이란 존재도 알게 됐으며, 어쩌다 보니 그녀에게서 좋은 감정을
느끼게 된 과정을 하나도 숨김없이 털어 놨다.
" 그래서, 애기는 지웠어? "
" 그런다고 했어요.. 아들이 17살이라고 또 애기를 낳을수는 없다면서.. "
" 그만 자자.. 앞으로 내 몸에 손대지 마.."
싸늘하게 표정이 굳어진 그녀가 등을 돌리고 눕는다. 그녀에게 한기가 느껴질만큼 방안 공기마저 냉랭하다.
" 다녀 올께요.. "
잔뜩 풀이 죽은채 출근을 하는 준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정희다. 그저 막연히 준호와 같이 지내는 시간이 행복했던
지난 한달간이었다.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으면서도 이루어질수 없는 인연이라 여기고 그를 떠나 보냈다.
그를 보내놓고는 너무나도 힘이 들었다. 못 이기는 척, 두 눈 질끈 감고 그의 바램을 들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양심이 허락치 않았다. 앞길이 창창한 그를 욕심 낸다는건, 죄악이나 다를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던 차에 선희라는 여자의 존재를 알고는 기겁을 해야 했다. 준호의 미래를 위해 힘겹게 그를 떠나 보낸 폭이건만,
나보다 나이많은 여자와 사귄다는 말을 듣고는 형용할수 없는 질투심에 몸을 떨어야 했다.
그런 여자에게 준호를 내 줄수는 없어 그를 불러들여 당분간 같이 있고자 했다.
엊저녁 준호의 입을 통해, 그녀가 임신까지 했다는 사실은 충격 그 자체였다. 꿈에서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와 합치게 된다면, 총각인 그의 핏줄을 낳아 주는게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리 쉽게 결정을 할수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를 붙잡야지 할지, 어찌해야 할지조차 고민스럽다.
" 아저씨 갔어? "
" 응.. 출근했지.. "
상념을 깨우는 선우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두 눈을 비비며 제 방에서 나오더니 준호부터 찾는다.
" 씨~ 내 얼굴도 안 보고.. "
" 저녁에 볼텐데, 뭐.. "
" 그래도.. 남자끼린데.. "
정 붙일곳 없던 선우가 준호와 같이 지내면서 유독 마음을 열고 있다.
" 아저씨가 아빠면 좋겠어? "
" 철수가 놀린단 말이야.. 아빠도 없고, 동생도 없다구.. "
" 선우는 동생이 부러워? "
" 그럼, 당근이지.. "
온전치 못한 가정에서 커야 하는 선우만 보면 안쓰러운 정희다. 하나밖에 없는 핏줄이, 엄마의 잘못으로 인해 편부모
밑에서 컸다는 소리를 들을것 같아 마음이 쓰이는 것이다.
" 빨리 밥 먹어, 유치원 가야지.. "
" 응.. "
" 어서 와요, 핸썸하게 생기셨네.. "
" 잘 부탁드립니다.. "
가게 오픈이 내일로 다가왔다. 오픈 준비에 바쁠것 같아 선우를 데리고 가게를 찾았다.
음식점을 해 본 경험이 있다는 선배 언니란 여자가 먼저 인사말을 건넨다.
" 뭐를.. 잘 부탁한다는게 무슨 뜻일까.. 선우 엄마 잘 도와주라고? 호호.. "
" 언니도, 참.. 뭐하러 왔어? 그냥 집에 있으라니까.. "
" 그래도.. 바쁠것 같아서.. "
" 이 메뉴판도 직접 만들었다면서요? 재주가 많으시네.. "
" 우리 아저씬 뭐든지 잘 해.. 로보트 조립도 짱이다.. "
" 응, 그렇구나.. 근데, 아저씨라고 부르는거야? 이왕이면 아빠라고 부르지.호호.. "
거침없는 그녀의 말투에 모두가 당황스러워야 했다. 정희가 나에 대해 어찌 소개를 했는지 궁금해 진다.
" 이리와, 후라이드 맛 좀 보자.. "
튀김 기계에서 통닭을 튀기고서야 대충 준비를 끝낸듯 싶었다. 선우와 나를 안쪽 테이블로 불러 들인다.
방금 튀긴 통탉과 콜라, 생맥주까지 연습삼아 뽑아 왔다. 새로 튀겨서 그런지 고소한 맛이 제법이다.
" 어때? "
" 맛있어, 엄마.. "
" 진짜 맛있어요.. 손님들이 좋아하겠네.. "
" 다행이야.. 그나저나 손님이 많아야 할텐데.. "
" 걱정마, 많을테니까.. 아마 6시부터 9시까지는 정신도 없을걸? "
경험이 많다고 하더니 자신감까지 내 비친다. 가게 평수가 조금 좁은듯 하지만, 학교 정문에서 가까운지라 제법 장사가
될것도 같다.
" 그럴까? "
" 그럼, 그 시간에 알바라도 있어야 할텐데.. "
" 제가 도우면 안될까요? "
호프집이라 써빙 정도는 할수 있을것이다. 혼자서 이리뛰고 저리 뛸 정희가 염려가 된다.
" 됐어, 나오지 마.. 그냥 선우랑 집에 있어.. "
" 어머, 얘는.. 왜 그런다니, 한 사람이 아쉬운 판에.. 나와서 도와줘요, 인건비만 절약해도 그게 어딘데.. "
" 준호씨까지 일 시키기 싫어.. 이런 일 할 사람도 아니구.. "
" 이런 일 하는 사람은 타고 났다디? 누구나 닥치면 다 해야 하는거야, 너야말로 이런일엔 어울리지도 않아, 얘.. "
" 그래요.. 바쁜 시간만 도울께요.. 며칠 돌아가는걸 보고 알바를 뽑든지 하죠,뭐.. "
" 근데, 학생때부터 좋아했다면서요? "
" 어머, 언니~ "
정희가 안색이 하얗게 변해서 언니를 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