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빨리 일어나.. "
아직도 잠들어 있는 준호의 젖꼭지를 꼬집었다. 아무것도 모른채, 쿨쿨 잠에 빠져있는 준호가 얄미웠다.
" 아저씨도 여기서 잤어? "
잠결에 선우의 목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난 정희다. 안방문을 열고 들어온 선우가 침대곁에까지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 선우 벌써 일어났구나.. 얼른 가서 씻어, 엄마가 밥 차려줄께.. "
" 응, 엄마.. "
밤새 준호를 껴안고는, 오랜만에 과분한 욕심을 부렸더랬다. 몇번인지 모르지만, 아늑한 그의 품에 안겨서 찐한 욕정을
불사르다 보니 세상 모르고 곯아 떨어졌던 것이다.
어린 자식에게 못 볼 꼴을 보인것만 같아 몸둘 바를 모를 지경이다.
" 왜요? "
" 난, 몰라.. 선우가 다 봤단 말이야.. "
" 들어 올때까지 몰랐단 말이에요? "
" 그러길래 그만 자자고 했잖어.. 어쩜 좋아, 다 벗고 있었는데.. "
" 그게 내 잘못인가? 정희씨가 덤벼 들고선.. "
그의 말마따나 자꾸 욕심이 났더랬다. 말도 안되는 여자와 사귄다는 얘기를 들었을때부터 질투가 났던것 같다.
질벽 안을 가득 채우고는, 힘찬 몸짓으로 짓쳐 와 내 모든것이 부서지는 중에도, 그런 그가 내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뿌듯한 쾌감 뒤에 땀에 젖은 그의 얼굴을 바라다 보면서, 이유 모를 허전함에 그를 놔 줄수가 없었다.
" 얼른 씻어, 선우가 흉 볼거야.. "
부랴부랴 옷을 걸치고 주방으로 나서야 했다.
" 아저씬 잠꾸러기야.. "
" 맞어, 잠꾸러기.. 선우가 제일 부지런하네.후후.. "
어제밤에 먹던 꽃게탕이지만, 몇가지 밑반찬 만으로 훌륭한 아침상이다.
" 유치원 갔다와서 아저씨랑 햄버거 먹으러 가야지.. "
" 또 조른다, 버릇없이.. "
" 아저씨도 햄버거 좋아한단 말이야, 씨 ~ "
" 유치원 갔다 와, 선우야.. 아저씨도 햄버거 먹고 싶어.. "
처음 대공원에 데리고 갔을때부터 살갑게 구는 선우가 귀여웠다. 정희의 아들이라서 그런지 유달리 정이 갔다.
전 남편이 선우를 달갑지 않게 여기는걸 직접 지켜봤던 터라, 어린 것이 기가 죽어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측은해 보였다.
다행히 이 곳으로 이사를 하고는 표정이 밝아 보여서 저으기 안심이 된다.
" 그것 봐, 엄마는 알지도 못하고.. "
" 애 버릇 나빠지게 왜 그래.. 자꾸 조르면 어쩌려구.. "
" 왜 그래요.. 오랜만에 선우한테 점수 좀 따려고 하는구만.. "
" 하여간에 쓸데없는 짓에만 머리를 쓴다니까..
" 그건 또 무슨 소리래요? "
" 있어,그런게.. 식사나 해.. "
선우가 유치원에 가자 대충 식탁을 치운 정희가 내린 커피를 가져왔다.
" 나하고 얘기 좀 해.. "
" 무슨 얘긴데요? "
선희의 존재를 알고있는 그녀에게 약점을 잡힌 터라 괜시리 주눅이 든다.
" 우리집에서 같이 지내자.. "
" ...................... "
" 같이 살자는건 아냐, 그 할머니를 떼어낼때 까지만.. "
" 지금은 안돼요.. "
나도 모르게 거절을 하게 됐다. 처음으로 그녀의 말을 거스른 것이다.
" 왜? 그 할머니하고 헤어지기 싫어서? "
" 회사일이 바빠요.. "
거짓말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이렇듯 떳떳하게 속인적이 없었던 내가 신기할 뿐이다.
" 그 바쁜일이 언제 끝나는데? "
" ....한 열흘정도.. "
" 그 일 끝내고 들어와.. 명심해, 열흘이야.. "
" ....................... "
" 준호한테 어울리는 여자가 생길때까지야.. 결혼할 상대가 생기면 나한테 데려와.. 내가 먼저 선을 볼테니까.. "
" ....................... "
" 오늘 바쁘지 않으면 이사짐 정리하는 거나 도와줘.. "
" 그 화분은 저 쪽 장독대 밑에 두는게 낫겠지? "
" 그러죠, 뭐.. "
힘들어서 미뤘던 일들을 준호가 대신하고 있다. 선우까지 딸린 몸으로 앞날이 창창한 준호를 욕심낼순 없었다.
마음은 아프지만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힘들게 마음을 접고자 했는데, 나보다 나이가 많은 여자를 사귄다는 말에
배신감을 떨쳐 낼수가 없었다.
그런 그를 다시 불러 들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최소한 나보다 못한 여자에게 준호를 내 줄수는 없는 노릇이다.
" 그릇 정리도 해야 하는데.. "
" 어딨어요? "
무거운 그릇 박스를 주방 바닥에 옮기고, 그릇들을 꺼내 씽크대에서 씻기까지 한다.
" 커피 마시고 천천히 해.. "
" 하나만 물어 볼께요.. "
주방 식탁에서 커피잔을 만지작 거리던 준호가 내 눈을 들여다 본다. 쳐다보는 눈길에 듬뿍 정이 담겨 있는듯 싶다.
준호와 함께 있으면 항시 그런 느낌을 받곤 했다. 힘들고 지쳐있던 그 때, 우연찮게 준호를 만났고 그에게서 따스한
위로를 받을수 있었다.
" 뭐야, 궁금한게.. "
" 선우 혼자서 외롭겠단 생각 해 본적 있어요? "
" 뚱딴지 같긴.. 느닷없이 선우 얘기가 왜 나와? "
" 외로워 보여서 그래요.. 나중에 크면 더 그럴텐데.. "
" 그렇게 타고 난걸 어쩌겠어.. "
가끔씩이지만 그런 생각을 하기는 했었다. 어린 자식을 내 팽개치듯, 일본으로 도망 간 아빠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선우를 볼때마다 가여운 심정을 떨칠수가 없었다.
그래서 선우를 더 끔찍하게 여기며 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선우가 가여워, 품안에 품듯이 그렇게 키우고자 했다.
새 아빠라는 사람이 어린 선우의 가슴에 못을 박는 짓을 할때마다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른다.
" 안됐잖아요, 어린게.. "
" 햄버거 사 준다며? 대신 준호라도 잘 해주면 되지.. "
가뜩이나 숫기가 없는 선우가, 그나마 준호를 잘 따르는것 같아 고마워 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