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른 와, 국 다 식겠다.. "
주방에서 앞치마를 두른 정희가 식탁에 앉으라며 재촉을 한다. 근 한달여만에 만난 그녀와, 다락방에서 밤이 새도록 뜬
눈으로 새웠다.
그녀가 앞으로 어찌 살아가려는지 알고 싶었다. 너무 궁금한 탓에 그녀의 의중을 듣고 싶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그녀의 몸에 길 들여져 있는 내 분신이 부풀어 올랐다. 나로서는 어찌할수 없는 본능이었다.
이미 그녀에게 익숙해 있던 내 몸은 내 의지와는 별개였다. 그녀의 목소리만 들어도 반응을 했었고, 그녀의 살 냄새만
맡아도 멋대로 아랫도리가 용트림을 해 댔다. 나의 몸은 내것이 아니었고, 그녀의 소속이 된지 오래였다.
몇번씩이나 거친 몸싸움을 했는지, 새벽이 가까울 무렵 나도 모르게 곯아 떨어진 모양이다.
선 잠이 깨어 일어나 보니, 옆에 있어야 할 그녀가 보이질 않아 주방으로 내려온 것이다.
" 일찍 일어났네요.. "
" 선우 유치원 보내느라고, 얼른 앉아.. "
어제밤 마신 술로 속이 쓰렸는지, 따스한 김이 피어나는 북어국 그릇에서 고소한 냄새가 난다.
" 시원하네요.. 정희씨가 끓여 준 꽃게탕도 맛있었는데.. "
" 그랬구나.. 얘기만 해, 언제든지 만들어 줄께.. "
" 내 갈길을 가라면서요.. 그러면서, 무슨.. "
남편이랑 이혼을 한다면서도, 나를 멀리하려는 그녀에게 서운함이 밀려들었다.
" 빨리 여친이나 만들어.. 그 여자가 맛있는거 실컷 만들어 줄텐데.. "
" 있어요, 여자 친구.. "
같이 있고자 하는 내 바램을 모른척하는 정희에게 불뚝심이 생긴 탓이기도 했다. 여자 친구를 운운하는 정희의 말에
갑자기 선희의 얼굴이 떠 오른 것이다.
" 어머, 정말? "
" 언제까지 혼자일순 없잖아요.. "
한번 삐뚤어진 심사가 계속 꼬이고 있다. 나와 거리를 두려는 그녀에게 투정을 부렸다.
" 나이도 어리고 이쁘겠지.. 잘했어, 준호가 보고싶어도 참을께.. "
" ...................... "
그녀의 목소리가 공허하게 들렸다. 웬지 모를 쓸쓸함이 배어 나오는듯 했다.
" 뭐하는 아가씨야? 궁금하다.. "
" 어쩔거예요, 애기.. "
써빙일을 끝내고 퇴근한 선희와 데이트 중이다.
저녁에 핸폰을 해서는, 내일이 쉬는 날이라며 꽃등심이 먹고 싶다던 선희였다.
맛있게 고기를 입에 넣고있는 선희를 보면서 마음이 편칠 못했다. 오늘 오후까지도 정희의 집에 머물렀던 준호였다.
" 글쎄.. 왜, 걱정 돼? "
늦은 나이에 임신이 됐다며 선희가 신기해 했고, 며칠동안 생각을 하겠노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길때만 해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정희와 선희 사이에 끼어 있음을 깨닫게 되고는, 애기의 향방이 자꾸 궁금해 지는 요즘이다.
" 당연하죠.. "
" 걱정하지 마, 준호한테 키워 달라고 하지 않을테니까.. "
" 그래서가 아니고.. "
" 술이나 한잔 따라 봐.. 이 나이에 준호와 어찌 하겠다는 생각은 없어.. "
선희에게 속내를 내 비친것만 같아 미안해 진다. 그녀의 잔에 술을 따랐다.
" 나도 한잔줘요, 치사하게 자기만 마시냐.. "
" 에고, 웬일이래.. 이러다 준호도 술꾼 되겠다.호호.. "
임신한 애를 낳는다고 해서 선희와 어떤 언약까지 하지야 않았지만, 지금도 완전히 헤어졌다는 확신이 없는 정희에게
내 애를 가진 여자가 있다고 얘기할수도 없음이다.
" 한잔 더 줘요.. "
한잔 술에 속이 싸하니 불이 났지만 답답한 심사는 풀리지를 않는다.
" 준호는 이해 못하겠지만, 소중한 생각이 들어서 그래.. 이 나이에 내 뱃 속으로 찾아온 생명인데, 내 손으로 무정하게
싹뚝 짤라 버린다는게 미안하기도 하구.. 지워야 하겠지만, 조금이나마 더 뱃속에 담아두고 싶어.. "
못 마시는 술을 연달아 털어넣자, 애 낳을까 봐 조바심을 낸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기야 자신의 몸속에 새로운
생명이 자라고 있으니, 그 아이를 낳을수는 없는 입장이겠지만 소중하게 여기는 것도 이해는 간다.
" 미안해요.. 애를 낳는다고 걱정이 되는건 아니고, 정희씨 일이 힘드니까.. "
" 고마워, 걱정해 줘서.. 얘긴 그만하고 고기나 먹자, 엄청 먹고 싶었는데.. "
맘에도 없는 거짓말을 천연덕스럽게 한 준호다. 아무것도 모르는 선희에게 큰 죄를 지은 기분이다.
~ 바뻐? ~~
정희를 만난지 한달쯤 지난 시점이다. 나와의 거리를 두려는 정희에게 먼저 연락을 취할수도 없었기에, 그저 안타까운
시간만 흘렀다.
~ 아뇨, 그냥 작업중.. ~~
~ 나, 이사했어.. 준호랑 집들이 하고 싶은데.. ~~
수많은 생각이 꼬리를 문다. 멀리 하려는 그녀의 의도가 맘에 들진 않았지만 마지 못해 따를수 밖에 없었다.
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있던 참이었지만, 다시금 메시지를 보내온 속내가 궁금해 진다.
~ 어딘데요? ~~
선희와 같이 지내면서도 그녀를 그리워 했었기에, 그녀가 부르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야만 했다.
" 좋네요, 아담하고.. "
" 그렇지? 나도 첫눈에 끌리더라니까.. "
" 선우가 다니기가 불편하지 싶은데.. "
흑석동에 있는 중앙대학교 맞은편 골목으로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했다.
오래된 주택들이 골목을 사이에 두고 얕으막한 언덕 끝까지 늘어서 있다.
산비탈 비슷해서 걷기는 힘들지만, 예전에 살던 집처럼 공기는 맑지 싶다.
" 하기 나름이야.. 내가 어릴땐 더 꼭대기에서 다녔어.. "
아직 집안 정리를 제대로 끝내지 못한듯, 작은 마당 드문드문 화분들이 놓여 있다.
자그마한 단층 슬레트 지붕이고, 벽은 벽돌을 쌓아 시멘트를 바른듯 했다.
들어오는 대문만이 철제문이고, 현관문이나 창문들은 목재를 이용한 유리가 끼워져 있었다.
" 뭐, 도와드려요? "
" 아냐, 천천히 해도 돼.. 아직 밥 안 먹었지? "
" 네.. 근데, 선우는? "
" 응, 금방 올거야.. 유치원 차가 저 밑 골목까지 데려다 주거든.. "
그 전보다는 마음의 짐을 벗어 놓은듯, 얼굴이 밝아진 듯 해서 보기에 좋다.
어린 시절 몰래 훔쳐보고는, 가슴 설레기도 했던 정희의 얼굴이야말로 저렇듯 싱싱한 모습이었다.
" 아직 배는 안 고파요.. "
" 그래, 조금만 기다려.. 선우 오면 같이 먹자구.. 아침에 유치원 가면서 아저씨가 온다고 좋아했거든.. "
" 네, 천천히 해요.. "
마당에 놓여진 평상 위에, 부엌에서 가져온 커피 두잔을 내려 놓는다.
" 아가씨도 잘 있지? "
" 아가씨 아닌데.. 정희씨보다 나이 많아요.. "
" ....................... "
나와 거리를 두려던 정희였다. 그런 그녀에게 서운한 맘이 들어, 해서는 안 될 말을 내 뱉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