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무게

삶의 무게 1

바라쿠다 2012. 10. 28. 13:32

" 힘들지? "

" 괜찮은데요.. "

"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사는걸 보면 참 기특해.. "

" 만원 받았습니다, 여기 7,000원 받으시구요.. "

" 그냥 놔 둬..  그걸로 김밥이나 사 먹어.. "

매일 저녁 10시가 넘은 시간에 와서, 담배를 사고는 거스름 돈을 받지 않는 박사장이다.

시간에 쫒겨 집에서 밥을 먹지 못한 날, 편의점에서 파는 삼각 김밥을 급히 씹고 있는 모습을 우연히 본 그 후 부터였다.

웃기지도 않는다.    비록 시간당 오천원짜리 알바를 하고 있지만, 그의 음흉한 눈길을 대할때면 소름이 돋는다.

" 자꾸 이러시면 안 되는데.. "

" 괜찮어, 내 딸 같아서 그래..  그리고 뭐 먹고 싶은게 있으면 얘기해, 내 핸폰 번호 알지? "

" 안녕히 가세요.. "

서둘러 그의 말을 짤라야 했다.     판매대 앞에서 담배를 사면서 모르는 척, 몸 곳곳 훓고있는 그의 눈빛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여고를 졸업하고 직장을 찾기는 했지만, 짧은 학력인 나를 받아 주는곳은 없었다.

어려운 집안 형편에, 할머니와 단 둘이 살면서 마냥 쌀 값을 축 낼수도 없는 처지라 주유소에서 알바를 시작했다.

하루 6시간씩 알바를 하면서, 나름대로 번듯한 직장을 꿈 꾸며 여러군데 이력서를 내 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나와는 사뭇 다른 세상인듯 손에 잡히질 않았다.     여고를 졸업한지 2년여가 지났지만, 무능한 내 자신만

탓하게 될 뿐이었다.

옷에 배는 휘발유 냄새가 싫어, 그나마 편해 보이는 편의점으로 출근한지가 벌써 3개월이 다 되어간다.

나름 편의점에 익숙해 지면서, 그나마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여유를 부릴만큼 일이 손에 익을 때다.

자주 오는 단골이나, 밤 늦은 시간 술에 취한 손님들까지 요령있게 상대하는 노하우도 생겼다.

" 어서 오세요.. "

" 담배 하나 주세요.. "

확실치는 않지만 근처 고시룸에서 숙식하는 젊은 남자다.     무슨 직업을 가졌는지는 모르지만, 저녁 8시 정도가 되어

그 고시룸으로 들어가는걸 언뜻 본 적이 있다.

" 5,000원 받았습니다, 거스름 돈 2,500원이요.. "

" 수고하세요.. "

오늘도 무뚝뚝하게 돌아선다.    키가 훤칠하고 생김새도 멀쩡하기에 눈여겨 보던 남자다.

여고시절, 2년여를 사귀던 남친과 비슷하게 생겨 호감이 간다.     도통 눈치가 없는 편인지, 관심을 보이는 내 마음을

몰라주는 탓에 애가 타는 요즘이다.

 

" 정신차려, 임마..   돈 500만원이 무슨 강아지 이름이야? "

" 너무해요, 아빠..   그 정도는 줘야죠.. "

한달 전부터 조르는 중인데 도무지 씨가 먹히지 않는다.     그 많은 재산을 죽을때 가져 가려는지, 움켜 쥐고는 내 놓을

생각이 없는 꼰대다.     

엊그제 방배동 클럽에서 처음 만난 미영이를 꼬시기 위해 자가용이 있노라고 허풍을 쳤다.

애간장을 녹이는 눈 웃음과 매끄러운 입술이 어울리는 미영이와, 동해 바닷가로 놀러 가기로 약속까지 한 마당이다.

" 니가 벌어서 사든지 말든지 해,임마..  어이구~ 저 웬수.. "

" 빨리 결혼하라면서..   요즘 여자 애들은 자가용 없는 남자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단 말예요.. "

" 그런 속빈 여자가 와 봐야 집안만 거덜나..   제대로 된 여자를 골라.. "

" 그런 여자가 어딨어요?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

아무리 시대에 뒤 떨어진 노인네라지만, 자식의 맘을 몰라주는 것에 보통 섭섭한게 아니다.

" 어쨌든 니 놈이 흥청망청 즐길 돈은 못 주니까 일찌감치 속 차려.. "

" 아빠~ 치사하게 이러실래요?     두고 봐요, 나중에 국물도 없을테니까.. "

도저히 돌파구가 보이질 않는다.     전생에는 웬수지간이었는데, 불행히도 부모와 자식간으로 만난듯 싶다.

" 이 자식이 이제는 애비 겁까지 주네..   니 맘대로 해, 이 불효막심한 놈아.. "

" 에이~ 되는일이 하나도 없네.. "

가게 문을 박차고 나왔다.     아빠가 저 정도로 버틴다면 차 값을 뜯어내기는 만만치 않아 보인다.

안방 금고에 있는 금붙이를 몰래 훔쳐내다 팔면, 얼마나 받을수 있을지 금은방에 가져가 볼 생각까지 드는 정호다.

갑자기 갈증이 느껴지는 참에, 싸가지 없는 알바가 지키고 있는 편의점이 눈에 띈다.

 

" 어서오세요.. "

" 어디서 오긴 집에서 온다, 왜.. "

편의점에 오는 손님중에, 진상짓만 일삼는 인간이 들어선다.     응큼스런 부동산 박사장의 아들이라고 했다.

" 커피하나 주지.. "

" 손님이 직접 꺼내 오셔야 되는데요.. "

" 어허~ 이 아가씨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네..   손님이 찾으면 가져다 줘야지, 써비스가 엉망이구만.. "

며칠전에도 시비를 거는 바람에 점장한테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손님한테 잘못이 있더라도 참을줄 알아야 한다며, 되레

나에게 화살이 돌아왔던 것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더니, 느물거리는 제 애비인 부동산 박사장과 거의 막상막하다.

알바를 끝낼 시간이 가까워 오기에, 이를 악물고 참기로 했다.     저런 인간 땜에 내 기분까지 망친다는건, 자존심이 허락치

않는다.

" 여기 있습니다, 천원입니다.. "

" 진작 그럴것이지.흐흐..   윤수진씨, 올해 몇살이야? "

가슴에 붙어있는 이름표를 보고는 대 놓고 이죽거린다.     한바탕 쏘아 붙이고 싶었지만, 한번만 더 참아 보기로 했다.

" 손님..  제가 바쁘거든요, 얼른 계산이나 하시죠.. "

" 호오~ 제법인데..   오늘은 엄청 얌전하네.흐흐..   싸우자고 대들어야 재미가 있는건데.. "

" 손님하고 같이 놀아줄 시간은 없거든요..   안녕히 가세요.. "

" 혹시 말이야..   수진씨랑 데이트 하려면 얼마나 줘야 할까?     얼굴은 대충 봐 줄만한데, 성격은 지랄이니까 천원이면

되려나? "

" 야~ 이 자식아, 똑바로 살어..   보자보자 하니까..   넌 매너도 없니? "

더 이상 참고자 하는 인내심이 바닥이 나 버렸다.     편의점에 있다고 저런 인간까지 무시를 하는것만 같아 분통이 터진다.

" 햐~ 고 년 암팡지네..    이제서야 본색을 드러내는구만.흐흐..   매력있어.. "

머리 끝까지 약을 올리던 진상이,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듯 만면에 득의의 웃음까지 머금고는 출입문을 나선다.

진상이 편의점을 나간지 한참 지났건만, 분이 삭혀지지 않는다.     

교대 시간이 되어 점장에게 판매 대금과 매출 장부를 넘겨주고는 옷을 갈아 입었다.     

퇴근하기 전에 화장실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여 물었다.      희뿌연 담배 연기가 타일벽을 타고 피어 오른다.

망나니 같은 자식에게, 희롱을 당하고도 참아야만 하는 내 신세가 한심해서 미칠 지경이다.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내며 화를 삭이는 중에, 기발한 생각이 떠 올라 핸폰을 꺼내 들었다.

~ 네, 여보세요.. ~~ "

" 저기..  여기 편의점 수진인데요.. "

~ ....아..  수진이.. ~~

" 먹고 싶은게 있으면 핸폰하라고 해서.. "

~ 맞아, 그랬지..  먹고 싶은게 뭔데? ~~

 

" 저런, 그랬구나..   속이 많이 상했겠다.. "

" 오늘 술빨 받네.. "

어떤 또라이 때문에 기분을 잡쳤노라며 술이 마시고 싶다 하자, 박사장은 자신의 아들인지도 모른채 내 기분을

풀어주고자 애를 쓰고 있다.   

아까 진상에게 받았던 수모를, 어떻게든 그 애비인 박사장에게 대신 속 시원히 갚아주고 싶어 술집에 같이 앉았지만 

좋은 방법이 떠 오르지는 않는다.

" 술 마시고 싶으면 언제든지 얘기해..   내가 친구 해 줄께.. "

" 피이~ 나이차가 많은데 무슨 친구를 해요? "

" 허~ 섭섭한 소리..   내가 나이만 많았지, 정신 연령은 수진이랑 똑같애.. "

평소에도 응큼스런 눈길을 보내던 박사장이다.      어떻게든 나를 꼬셔 보려고 수작을 걸고 있다.

아빠 또래의 연배나 된 사람이, 자기 분수도 모른채 대쉬를 하는걸 보자니 가소로운 생각마저 든다.

" 진짜로 친구할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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