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게 장난이 아냐

사는게 장난이 아냐 13

바라쿠다 2012. 10. 23. 12:04

" 오랜만이다.. "

" 네, 형님..  잘 지내시죠? "

" 그냥 그래, 별 재미도 없고.. "

마침 대학 병원에서 소아과 과장을 맡고있는 사람이다.     전공과는 다소 틀리겠지만 그의 조언을 듣고싶어 온 것이다.

" 의학박사가 무슨 재미를 찾으신대, 환자들을 어루만져야지..   혹시 돌팔이 아뉴? "

" 야, 임마..  인간은 다 똑같은거야, 의사라고 맨날 소독약 냄새만 맡아야 하냐? "

어릴적 부모들의 왕래가 잦았을 때는, 1년에 서너번쯤 집안 행사로 만나면서 친형처럼 내 앞길을 걱정해 주던 사람이다.

지금이야 돌아가신 집안 어른들도 많아 자주 만나지야 못하지만, 그의 살가운 마음씀은 항시 가슴속에 담아두고 있었다.

" 형님 말도 틀린 말은 아니네, 매일 소주만 마시다가도 어떨땐 막걸리가 땡기기도 하니까.후후.. "

" 그게 인생이야..   남들 눈에 흉 잡히지 않으려고, 무게만 잡고 있는것도 고역이거든.. "

" 우리 형님한테 재밌는 일이라도 만들어 드려야겠네.후후.. "

사실 그의 서운함이 이해는 된다.     형님 된 입장에서 가끔 연락을 줬지만, 당시에는 뚜렸한 직장도 없는 몸인지라 그의

호의를 여러번 거절했었기 때문이다.

" 바람잡지 말고 용건이나 꺼내 봐.. "

" 사실은 도와줘야 될 친구가 있어서..  애기가 두살인데 발달 장애라네요..  병원비가 한달에 오백씩이나 들어간대요.. "

" 넌, 그게 나빠..   무슨 부탁 할때나 찾아오고, 삼겹살이라도 구워놓고 부르는 적은 한번도 없지.. "

" 미안해요, 형님..   나중에 진짜로 모실테니까 사정 좀 봐 주슈.. "

" 한번 데려와 봐..  일단 보기라도 해야지..   발달 장애라면 고치긴 힘들어.. "

" 고맙수.. "

한층 가벼운 마음으로 병원을 나설수 있었다.     우리네처럼 큰 병원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이야, 그 쪽에서 시키는대로

따를수 밖에 없는 입장이다.     병원을 어찌 이용해야 하는지도 답답할 때가 많은 것이다.

 

" 처음 뵙겠습니다.. "

" 그래요, 반가워요.. "

" 에이~ 실장님 말 놓으세요, 이제 26인데.. "

미스최의 동생이 면접을 보러 왔다.      제 누나의 눈매를 닮아 큰 눈이 시원해 보이고 키도 컸다.

" 그래, 경력은.. "

" 운전은 잘 한대요, 군대에서도 차를 몰았다니까.. "

동생 대신 나서는 미스최다.     어제와는 달리 퍼머머리를 풀고 생머리를 뒤로 묶었다. 

" 사고가 안 나는게 제일 중요하니까 서둘지 말고.. "

" 네, 알겠습니다.. "

" 내일부터 출근하도록 해..  배기태한테 연락을 넣을테니까, 일단 내일은 낮 12시까지 오라구.. "

" 네.. "

" 그럼 먼저 들어가고, 미스최는 내일 스케줄이 어떤지 배기태한테 전화 좀 넣어 봐.. "

" 네, 실장님.. "

이제야 조금씩이나마 사무실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     할일도 없이 빈둥거리는게 싫은 까닭이다.

몇년이나 허송 세월을 보냈음이다.     무슨 일이던지 해 낼 자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맡겨진 일이 없었다.

다시 예전의 그 시절로 되돌아 가기 싫었다.     프라임을 활기차게 만들어야 하는 이유다.

" 가져 온다던 차는 왜 여지껏 소식이 없어? "

" 명예 이전까지 끝내고 온대요..  조금 있으면 오겠죠.. "

" 시장가서 돼지 머리나 하나 사오지.. "

" 어머, 고사 지내게요? "

" 그래야지..  사고라도 나면 안되잖어.. "

작으나마 정성을 다 하고 싶었다.      바늘만한 틈도 허용치 않고 일에 매진하고 싶은 때문이다.

" 호호..  재밌겠다, 막걸리도 사 올께요.. "

" 내 말이 맞지?     어제보다 훨씬 이쁘잖어.. "

술 핑계를 대고자 하는 미스최의 변신을 칭찬해 줘야 했다.     호감을 가진 남자의 말을 따라준 여심을 모른척 한다는건

내 일을 도와주고자 하는 우군을 잃을수도 있음이다.

 

" 고사를 지내는 분은 처음 봐요.호호.. "

사무실을 비워놓고 사 가지고 온 돼지 머리를 싸 들고는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 여자가 봉고차를 운전하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지.. "

미스최의 친구라는 아가씨가 직접 봉고를 끌고 온 것이다.    친구라서 그런지 늘씬한 키도 비슷했고 활달해 보인다.

" 안 타본 차는 거의 없어요..  5톤짜리 트럭도 몰아 봤는데요,뭐.. "

" 용감한 아가씨네, 조금만 기다려요..   얼른 고사 지내고 계산해 줄테니까.. "

" 천천히 하셔도 돼요, 아예 퇴근 했걸랑요.. "

어느새 오후 4시가 넘은 시간이다.      넓은 한지를 차 앞에 깔고 돼지머리와 마른 북어를 올렸다.

큰 절을 올리고 미스최한테도 따라 하라고 일렀다.     머뭇거리던 미스최가 다소곳이 절을 한다.

막걸리 병을 따서는 바퀴마다 돌아가며 술을 따랐다.     진심으로 무사고를 기원했다.

" 그럼 같은 동네네.. "

" 네, 연희랑 초등학교 동창이걸랑요.. "

간단하게나마 사무실 소속이 된 봉고차의 고사를 지내고 사무실로 올라왔다.

서류를 건네 받고 중고차 값을 치뤘다.     미스최랑 같이 퇴근하려는 친구를 돌려 보내기는 곤란하지 싶다.

" 미스최~ 돼지고기를 댄서들 숙소에 전해 주고 이만 퇴근하자구..   친구도 왔으니까 내가 저녁 사 줄께.. "

" 어머..  실장님이 사 주시게요? "

내 눈치를 살피며 그러기를 바랬으면서도 내숭을 떤다.     연희의 속 보이는 심리에 속으로 쓴 웃음을 져야 했다.

 

사무실에서 영등포 시장 골목으로 걷다 보면 오래된 참치집이 있다.

" 참치 싫어하는거 아니지? "

" 전 완전 좋아해요, 연희는 몰라도.호호.. "

" 나도 좋아해, 니가 몰라서 그렇지.. "

여 종업원이 안내를 해 준 골방에 앉았다.     참치도 좋아한다는 연희의 반응이 재밌다.

묻지도 않고 이 곳으로 들어오자, 약간은 시큰둥한 표정이었으나 내 식성에 맞추겠다는 의사 표시를 한 것이다.

" 미스박도 주량이 세겠네, 우리 연희 친구면.. "

" 실장님, 또 놀리려고 그러죠..   나 놀리는게 그렇게 재밌어요? "

며칠전에 술을 좋아하는 연희에게 농을 걸었더니, 자신을 술꾼 취급한다며 삐졌던 기억이 난다.

" 아냐, 놀리는거..  난, 술 잘 마시는 여자가 좋아, 맹숭맹숭한 여자하고 무슨 재미로 얘기를 하겠어.. "

" 어머, 진짜요?    호호..  오늘은 코가 삐둘어지게 마셔 봐야지.. "

미스박의 반응 역시 재밌다.     아예 눈치 볼 이유가 없다는 듯, 대놓고 기분을 내겠다는 표현이다.

" 이 년이..  우리 실장님이 무슨 봉이니? "

" 지지배..  실장님이 술 잘 마시는 여자가 이쁘대잖어.. "

" 그러니까, 그게 너하고 무슨 상관이냐구~ "

" 자, 자..   이제 그만하고 술이나 마시자구.. "

둘의 감정 변화를 읽는것이 재미가 있다.       젊은 아가씨들 틈에서 그들의 탐색전을 지켜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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