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쩐 일이세요.. 이런 시간에.. "
성희와 매출장부를 들여다 보며 계산을 맞춰보고 있는 중에 박과장이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이제 막 점심시간이 지났을
뿐이다.
" 안녕하세요, 제수씨.. "
" 어서 오세요.. 이리 앉으세요, 커피 드릴께.. "
얼마전에는 박과장의 식구들과 저녁을 먹기도 했다. 그 날 처음으로 박과장의 새로운 부인과, 성희간에 안면을 텄다.
" 무슨일이 난거죠? "
" 응.. 오늘부터 대기 발령이야.. "
예감이 맞아 떨어졌다. 건축허가를 내 준게 빌미가 되어, 감사실에서 조치가 내려진 것으로 보인다.
" 앞으로 어쩔 생각이에요? "
" 모르겠다, 뭘 해서 먹고 살아야 할지.. 자네는 좀 어때? "
커피를 한모금 맛 본 박과장의 얼굴에 근심이 어려 보인다.
" 그냥저냥 밑지지는 않아요.. 거래처가 많아지면 더 낫겠지만.. "
유기농이란 인식이 많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일반 과일이나 채소보다는 비싼 편이다. 아무래도 부유한 집들이 몰려있는
강남쪽이 더 인식도 좋고 매출도 나은 편이다.
성희의 아파트가 근처인지라 이곳에 개업을 한 폭이지만, 경험을 쌓고 나서는 가게를 옮길 생각도 했다.
" 나도 할수 있을까? "
" 어렵진 않죠, 배달하는게 좀 고되기는 해도.. "
" 할일도 없는데 며칠 여기나 나와야겠다.. "
" 편한대로 하세요.. 형님 적성에 맞는지도 볼 겸.. "
같이 근무하면서 10 여년이나 곰살맞게 챙겨주던 직장 상사다. 그의 퇴직이 남의 일처럼 무덤덤할수 없는 까닭이다.
시장 입구에 있는 돼지 갈비집에서 넷이 뭉쳤다.
" 그랬구나.. 그렇다고 이렇게 어깨까지 쳐지면 어떡하냐, 남자가.. "
철수가 유기농 장사를 배워 보라며 힘을 실어 줬다. 기분도 그럴텐데 한잔 사겠다며, 정미까지 불러내라고 한 것이다.
" 내가 그랬나.후후.. "
" 그랬잖어, 며칠동안 한숨만 푹푹 쉬고.. 걱정하지 마, 오빠.. 이제부터는 내가 먹여 살릴께.. "
" 에고 ~ 그래, 눈물나게 고맙다.. "
퇴직을 하게 됐다는 말을 듣고서도, 오히려 나를 위로하려는 정미다.
" 형수님이 씩씩해서 보기 좋아요.. "
" 씩씩한건 나도 마찬가지지.. 어디서 언니한테만 칭찬질이야..
성희가 눈을 새초롬히 뜨고는 철수를 구박하고 있다. 이쁘게 생긴 성희한테 매달리는 철수를 보고 걱정을 했더랬다.
잠시 겪은바로는, 겁없이 돈을 써 댄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한 평생 같이 살아갈 여자라면, 남자의 소득 수준에 맞게끔
지출을 해야 한다는게 윤식이의 평소 지론이다.
그런 면에서 볼때, 알뜰하게 살림을 챙기고 마트에서 힘든 알바까지 해 가며 열심히 살려는 정미가 이쁘지 않을수가 없다.
" 우리 정미가 용감하긴 하지.. 그래, 뭘 해서 먹여 살릴거냐? 그 잘난 마트 일당 가지고는, 우리 세식구 입에 풀칠
하기도 힘들어, 이 여자야.. "
" 어 ~ 이 오빠가 완전 날 무시하네.. 그런 걱정하지 말고 어깨나 펴고 다녀, 가뜩이나 새 아빠 나이가 많아 보인다고
지혜년이 놀려 대잖어.. "
" 그래, 알았다.. 앞으로는 씩씩하게 보일께.후후.. "
" 오빠가 힘이 없으면 나까지 전염된단 말이야, 씨 ~ "
나이 많은 날 믿고 의지하고자 하는 정미를 보노라면 걱정이 안 될수는 없다. 더군다나 이제 초등학교 2 학년인 지혜를
번듯하게 뒷바라지까지 하려면 조바심이 생길수 밖에 없음이다.
" 자, 이제 그만하고 술이나 한잔해요.. "
마주 앉은 철수가 술잔을 내민다. 내 기분을 풀어 주겠노라고 모인 자리가 어색하기만 하다.
" 그러자.. 참, 지혜 학원에서 왔겠다.. 이리 오라고 해, 저녁 먹여야지.. "
" 응, 오빠.. "
" 걱정이다, 뭘 해야 할지.. "
" 오빠는 또 그러네, 너무 걱정이 많어.. 굶어죽진 않는다니까.. "
철수랑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돼지갈비를 배불리 먹은 지혜는 씻지도 않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 미리 준비를 해야지, 내 나이도 있는데.. 마냥 좋은 시절만 있는것도 아니고.. "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만 같아 자꾸 초조해 진다.
" 내가 번다니까.. "
" 난, 너 고생하는거 싫어.. "
" 괜찮다니까, 오빠는 중심만 잡어.. "
정미의 마음씀이 고맙긴 하지만, 현실의 벽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음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 그리 만만한게 아냐.. 너도 너지만, 우리 지혜도 어디가서 기가 죽으면 안되잖어.. "
" 진짜 답답하다, 오빠.. 오빠야 말로 온실속의 화초같애.. "
" 그건 또 무슨 소리래? "
" 내가 여지껏 어떻게 살아왔을것 같애? 애 아빠가 주는 돈으로, 편하게 놀고 먹은게 아닌건 오빠도 알잖어.. 철수씨
옆에 있는 성희랑은 틀리다구.. "
" ........................ "
" 그리고, 오빠는 돈을 너무 함부로 쓰더라.. 좀 전에도 철수씨가 계산하겠다는데 굳이 오빠가 냈잖어.. "
" 그거야.. 우리는 세식구나 같이 먹었으니까 그랬지.. "
" 그 돈을 냈다고 바가지를 긁는건 아냐, 예를 들자면 그렇다는거지.. 알게 모르게 새는 돈이 많어, 오빠는.. 그 전에도
돈이 없을때는, 시장에서 배추 시레기를 줏어다 국을 끓여 먹고 살았어.. 꼭 그런식으로 궁상맞게 살자는건 아니지만
열심히 절약하면서 살면 한달 생활비도 30 만원 정도면 충분해..
기나 긴 열변을 듣고 난 뒤에 새삼 정미에 대해 모르는 점이 많았음을 깨닫게 됐다. 돈이 없으면 멸시를 받는 현실에서
저토록 당당할수 있는 자신감을 보이는 정미가 새로와 보인다.
" 그래.. 내가 좀 심했나 보다, 우리 정미도 이렇게 씩씩한데.후후.. "
" 내가 그랬잖어, 나만 믿으라구.호호.. 차라리 조그만 식당을 하나 차리면 어떨까? 내가 음식 솜씨가 좋은건 오빠도
알잖어.. "
" 나는 배달하고? "
" 나 혼자해도 돼, 오빠한테 궂은일 시키기 싫어.. "
전처와 이혼을 결심하게 된건, 순전히 정미의 통통 뛰는 젊음 때문이었다. 같이 있으면 나까지 젊어지는것 같아, 새로운
인생을 사는것처럼 마냥 즐겁기만 했다.
애교 많고 여리게만 생각했던 정미가 오히려 나를 짊어지고자 한다.
" 그럼, 나는.. 놀고 먹으라구? "
" 바보.. 안아 줘, 어제도 그냥 잤잖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