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 엄마를 보기 위해 농장을 찾았다.
" 매번 미안해서 어쩌누.. "
엄마와 같이 지내는 작업 반장 아주머니다.
농장에서 일하시는 아주머니들에게 저녁 대접을 한다며, 철수가 비싼 한우를 10근이나 사 왔다.
매번 가게문을 닫는 일요일마다 농장으로 오곤 했다. 철수의 직장 상사였던 박과장이 며칠째 일을 배우겠노라고
가게로 출근을 했기에, 이번 주는 토요일에 맞춰 온 것이다.
" 그러게요, 새로오신 아줌마 덕에 우리까지 호강을 하네요.호호.. "
농장 주인의 집 앞 정원에 차려진 간이 식탁에 둘러 앉았다. 일손을 도와주러 온 동네 아주머니들까지 합친 인원이
11명이다.
그네들이 연신 엄마에게 고마움을 표시하자, 새삼 철수의 마음씀이 고마운 성희다.
무슨 파티라도 하는 양 분위기가 마냥 즐거운 농장 식구들이다. 입가에 미소까지 번지는 엄마를 보자니 흐뭇하다.
" 저희 장모님 좀 잘 돌봐 주세요.. "
철수가 반장 아주머니에게 술을 건네고는, 옆에 앉은 엄마의 밥 그릇에 잘 익은 고기까지 한점 올려 놓는다.
장모라고 부르는 호칭이 낯설지 않다는 듯, 그 고기를 입으로 가져 간 엄마가 따스한 눈길로 철수를 쳐다본다.
"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얼마나 건강하신데.. 요즘에는 짧지만 말씀도 하신다니까.. "
" 그래요? 무슨 말씀을 하셨는데요? "
" 아직 긴 얘기는 못하시고.. 이거, 줘.. 저거 줘.. 그런 간단한 말씀은 하시지.. "
" 그것만 해도 어딘데요, 병원에 계실때는 한마디도 없었는데.. "
" 그것 보라구.. 그저 사람은 움직여야 해, 열심히 땀 흘리고 하루 세끼를 맛나게 드시니까 몸도, 정신도 좋아질 밖에.. "
" 그런가 봐요, 선배.. 앞으로도 잘 좀 지켜봐 주세요.. "
선배인 농장주인 부부도 흐뭇하게 엄마를 지켜보는 중이다.
" 염려 말라니까.. 누구 장모님인데 소홀히 하겠어.. "
남편감을 잘못 골라 엄마한테까지 많은 빚을 떠 넘긴 탓에, 그 쇼크로 뇌출혈까지 일으켰다. 그 후, 무려 2 년여를 병실과
요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말짱했던 엄마에게 큰 죄를 짓고 마음을 졸이며 살아온 지난날이다.
그런 힘든 시점에서 철수를 만나 그를 이용할 계획까지 세우고는, 생 떼를 쓰듯 목적을 이루기는 했지만 그로 인해 철수는
공무원 옷을 벗어야 했고, 그와의 짧은 인연도 끝난줄 알았다.
하지만 못된 짓을 한, 나를 향한 철수의 진심을 알수 있었고, 어찌하다 보니 그와의 인연이 이어지게 됐다.
자식도 감당하지 못하는 엄마의 병세까지 걱정하며, 최선을 다 해 엄마를 호전시키고자 하는 철수를 보면서 찐한 감동이
이는 중이다.
" 자기야.. 노을이 참 이쁘다.. "
자유로를 따라 오다가 멀리 성산대교가 보이는데, 그 다리 난간에 빨갛게 노을이 물들어 간다.
" 응.. 진짜로 이쁘네, 우리 성희처럼.후후.. "
" 바보.. 그걸 눈이라고.. "
저렇듯 한결같이 자신을 이뻐해 주는 철수를 무시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넘치는 애정을 쏟아 주던 그였다.
무한적인 그의 애정을 무시했던 지난 날이 후회가 된다. 그저 반반한 몸뚱아리 하나로, 그의 귀중한 마음을 헐값으로
치부하고자 했던 그때가 부끄럽다.
" 어 ~ 내 시력이 얼마나 좋은데, 양쪽 다 1.5야.. "
" 그래 잘났어, 정말.. "
" 왜 그래.. 여지껏 성희만큼 이쁜 여자는 본 적이 없어.. "
그의 따뜻한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을 후벼 판다. 그의 절대적인 사랑에 목이 메인다.
" 자기야.. "
" 또, 왜? 운전하는 사람을 자꾸 부르냐.. "
" 고마워, 정말.. "
더 이상 말을 이을수가 없다. 까닭 모를 설움이 목까지 차고 올라, 입을 열수가 없음이다.
성산대교를 건너 간선도로로 들어서는데 핸폰이 울린다. 하나뿐인 친구 여진이다.
" 왜, 전화질이야? "
~ 어디냐.. 나, 술 고픈데.히히.. ~~
" 이 년이 아주 만만한 싹을 봤어.. 오늘은 안 돼.. "
이유없이 여진이에게 함부로 하게 된다. 철수한테 숨기고 있던 미안함을, 여진이를 상대로 얼버무리고 싶은것이다.
~ 너, 친구 괄시하다 벌 받는다.. 내가 먹어야 얼마나 먹는다구.. ~~
" 글쎄, 오늘은 안돼.. 오늘 철수씨한테 상 줘야 돼.. "
~ 지랄.. 상은 무슨, 그 착한 철수씨한테 못되게 굴지 않으면 다행이지.. ~~
" 누구야, 여진씨야? 그냥 오라고 그래, 친구잖어.. "
" 철수씨가 오래, 이 년아.. 눈치껏 적당히 마셔.. "
" 그래서 엄마가 입을 여셨다구 ? "
" 그래.. 많이 좋아지셨어.. "
집에 들어와 냉장고에 술이 없음을 본 철수가 마트로 술을 사러갔다.
" 그것 봐, 이 년아.. 내가 괜찮은 남자라고 했잖어.. "
" 새삼 고맙더라.. 이런 남자가 있을까 싶고.. "
" 그걸 이제 아니? 내가 그렇게 얘길 했구만.. "
" 오늘은 일찍 가라.. 둘이 오붓하게 무드 좀 잡게.. "
" 내가 미쳤니? 니네들이 깨가 쏟아지는 꼴을 어떻게 보냐, 아주 여기서 자고 가야지.호호.. "
" 무슨 얘기가 그렇게 재밌어? "
양 손에 술 봉지를 들고 철수가 현관으로 들어서고, 철수를 본 여진이의 입가에 장난스런 미소가 번진다
" 철수씨 흉 좀 봤어요.. 무슨 남자가 아무리 성희가 이뻐도 그렇지, 무조건 여자가 시키는대로 하는지 몰라.. 하인도
아니고.. "
" 여진씨 아직 모르는구나.. 나, 하인 맞어.후후.. "
식탁에 술과 안주를 내려놓는 철수를 충동질 하고자 했지만, 당연한 듯 대꾸를 하자 여진이는 어이가 없는 모양이다.
" 에이, 재미없어.. "
" 여진씨도 참.. 그런 얘기 해봐야 통하지 않을줄 뻔히 알면서, 술이나 한잔 해.. "
내 잔과 여진이 잔에 술을 따르고는 끓여 놨던 냄비 뚜껑을 연다. 대수롭지 않은 그의 일련의 동작까지 믿음직스럽다.
농장에서 철수를 쳐다보던 엄마의 눈길도 그토록 아늑할수가 없었다. 서로간에 말은 없었지만, 당신이 하고 싶었던
농사일을 하게 해 준 철수와 마음이 통했다고 보여진다.
나를 좋아한다는 그 이유만으로, 여자가 해야 할 집안일까지 묵묵히 대신하는 그의 배려가 고마운 지금이다.
더불어 그런 그에게 과분한 대접을 받고 있음도 깨닫게 됐고, 그가 날 좋아했던 무게가 어느 정도의 크기인지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 아주 웃기는 년이라니까.. "
" 냅둬.. 갈데가 여기밖에 없는 모양이지.. "
대 놓고 집에 가라고 눈치를 줬는데도 꿈쩍도 않던 여진이가 화장실에 갔다.
" 자기랑 분위기 잡을려고 그랬는데.. "
" 조금 있으면 가겠지, 뭐.. "
" 나, 하고 싶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