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큰일이네, 뭐라고 변명을 하나.. "
" 변명이 통하겠어요? 다 알고 있는 눈치던데.. "
감사실에서 내사를 한다는 소문을 들은 윤식이다. 국장에게 보고를 했지만 그 역시 뾰족한 대응책은 없는듯 싶다.
허가를 내 준지 두어달이 넘은 시점이다. 그나마 잘못 되리란걸 어느 정도는 각오를 했기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다만 문책이 결정되면, 그 결과에 따라 어떤 징계가 가해 질지 궁금할 뿐이다.모르긴 해도 국장은 책임자로서 가장 큰 징계가 내려질 것이고, 뒤따라 자신 역시 그에 버금가는 문책이 이어질 것이다.
미리 사표를 내고 옷을 벗은 철수 역시 경미한 징계는 피할수 없을것이다.
국장과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대책이 있을수도 없기에, 일찍 퇴근을 한 윤식이는 철수를 만나기로 했다.
" 일찍 오셨네요.. "
" 그래.. 나도 곧 그만둬야 할것 같애.. "
그 동안 철수는 이곳 시흥사거리 대명시장에 작은 가게를 오픈했다.
유기농을 취급하는 가게를 차려놓고, 한창 동분서주하는 모습이 부럽기도 하다.
" 그 껀 때문이죠? "
" 맞아.. 감사실에서 내사가 들어갔어.. "
" 안 그러면 이상하죠.. 어마어마한 흑막이 숨어 있을텐데.. "
" 나도 예상은 했었어.. 각오는 했지만, 당장에 그만두면 뭘 해먹고 살아야 될지 막막하니까 그렇지.. "
혹시나 싶어 어느 정도 대비를 했던 윤식이다. 애들 엄마에게 간략적인 설명을 해주고, 이혼을 하는 조건으로 집의
명의를 돌려 줬다.
주식이나 모아놓은 돈의 일부는, 정희 이름으로 통장을 만들어 관리를 하고 있다.
" 국장도 몸이 달았겠네.. "
" 그 사람도 각오는 하고 있더라구.. "
" 이 년이 팔자가 늘어졌어, 아주.. "
" 우리집이 방아간이냐.. 툭하면 찾아오고 지랄이네, 지지배가.. "
집에 누워 빈둥거리는데 여진이가 찾아왔다. 심심하면 찾아와서 밥을 축내고 간다. 아니, 밥 뿐이 아니라 냉장고에
넣어 둔 술까지 거덜을 낸다.
" 친구 좋다는게 뭐니, 이럴때 얻어 먹어야지.호호.. 근데, 성희야.. 요즘 대구가 제 철이라더라.. "
" 아주 대 놓고 주문질이네, 여기가 식당이야? "
" 너무 그러지 마라, 가뜩이나 혼자 사는 년 서러운데.. 철수씨가 만든 음식이 맛있는걸 어쩌냐.. "
" 하여간에 얼굴도 두껍다니까.. 기다려 봐.. "
철수에게 핸폰을 했다. 다시 만난 이후로 이사를 하는것도 도와주고, 여러가지 신경도 써 준 그가 고마웠다.
자꾸 눈 앞에서 마주치다 보니 조금씩 정이 들기 시작했다. 거기에 떡하니 아파트 근처에 가게까지 차렸으니, 자연히
집에서 자는 날이 많아졌고, 지금은 거의 같이 지내는 중이다.
" 바뻐? "
~ 아니, 한가한데.. 왜? ~~
" 갑자기 대구가 먹고 싶네.. "
~ 참, 내.. 임신한 여자처럼 맨날 먹고 싶은게 그렇게 많나 몰라.. ~~
" 그래서.. 싫다는거야, 지금? "
~ 누가 싫대? 집에 갈때 물 좋은 놈으로 골라 갈께.. ~~
" 요즘 많이 컸네.. 꼬박꼬박 딴지까지 걸고.. "
~ 하여간에 사람이.. 맨날 해다 바치는구만, 툴툴거리긴.. ~~
" 여진이도 집에 와 있어, 빨리 들어와.. "
이상하게도 철수에게는 함부로 하게 된다. 물론 그가 그런 투정을 다 받아주기도 하지만, 의식적으로 곰살맞게 구는게
몸에 익지 않은 내 성격 탓인지도 모르겠다.
" 에궁~ 지지배.. 남자복은 타고 났다니까.. "
" 시끄러, 이 년아.. 또 괜히 철수씨한테 바람넣기만 해.. 가뜩이나 요즘 슬슬 기어 오르려고 하는데.. "
" 에 ~휴.. 철수씨도 눈이 삐었지, 저런 년이 뭐가 이쁘다고.. "
" 완전히 가정부로 취직을 하지 그래요? "
성희와 나는 거실 쇼파에 몸을 기대고 TV를 보는 중인데, 철수는 주방에서 매운탕을 끓이느라 바쁘다.
여자가 둘씩이나 있건만, 앞치마까지 두르고 주방에 있는 철수의 꼬락서니는 가히 봐 줄만 하다.
" 그럼, 어쩌라구.. 성희는 내가 만들어 준게 맛있다는데.. "
냉장고에 있는 물병을 꺼내 마시면서 슬며시 건드려 봤더니, 노여움 따위는 없는 사람처럼 빙그레 웃기까지 한다.
" 성희가 먹고 싶기는.. 내가 먹자고 했구만.. "
" 그랬어? 여진씨라도 대신 맛있게 먹으면 되지,뭐.후후.. "
" 에휴 ~ 복창 터져.. 도대체가 속이 있는 사람이야? "
" 근데, 이 지지배가 또 철수씨한테 바람을 집어 넣네.. 저리로 가서 TV나 봐, 이 년아.. "
철수 혼자서 저녁을 차리게 하는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말 동무라도 해 주려고 식탁에 앉았더니, 어느 틈엔가
다가 온 성희가 끼여 든다.
그 일이 있고부터는 셋이 모일때마다 촉각을 곤두세우는 성희다.
" 그래, 여진씨.. 저녁 다 되면 부를께, 가서 쉬고 있어.. "
" 빨리 해, 배고파.. "
" 거의 다 됐어, 조금만 더 기다려.. "
" 느려 터지기는.. 그만큼 부엌일을 했으면 좀 늘어야지,에이.. "
저렇듯 여자를 애지중지하는 남자를 본 적이 없다. 그런 그를 마치 하인처럼 부리면서도 떳떳한 성희다.
도대체가 이해가 안 되는 한쌍이다. 아무리 여자가 이쁘다손 쳐도, 저렇듯 맹목적일수 있다는게 신기하다.
" 에구 ~ 철수씨, 정신차려.. 저런 년이 뭐가 이쁘다고 푹 빠져설랑.. "
" 근데, 이 년이 또.. 제대로 사람이 돼 가고 있구만, 초를 치고 지랄이네.. "
" 어째, 친구들이 만나기만 하면 싸우지 못해 안달이냐.. 빨리들 와, 저녁이나 먹게.. "
냉장고에서 밑 반찬까지 꺼내고 대구탕을 식탁 위에 올리는 철수다. 밥통에서 밥까지 퍼서 나르는데, 성희는 거들
기미조차 없이 당연한 듯 식탁에 앉아 구경만 한다.
" 저 년이 자꾸 시비를 걸잖어.. "
" 복에 겨워 지랄을 해요, 먹고 나서 설거지는 하니? "
" 주부 습진 생긴다고 철수씨가 하지 말래.. "
" 에휴 ~ 내가 말을 말아야지.. 철수씨, 병원에 가서 뇌파 검사라도 받아 봐.. 남자가 어찌 이러고 산다니.. "
" 저렇게 사는게 정상이야, 이 년아.. 이쁜 여자한테 그 정도는 하고 살아야지.. "
" 어이구 ~ 혈압 올라.. 술이나 따라라.. "
하루이틀 본건 아니지만, 보면 볼수록 약이 오르는 여진이다. 복에 겨워 고마운지도 모르는 성희가 부러워 미칠 지경이다.
특히나 요즘엔 일부러 보란 듯이, 의식적으로 철수를 부려 먹는걸 자랑하는 느낌마저 받는다.
" 그러길래, 누가 반긴다고 뻔질나게 오냐구.. 쳐 먹을거 다 쳐 먹으면서, 대추놔라 밤놔라 참견이나 하구.. "
" 이제 그만들 하고 술이나 마셔, 그러다 진짜로 싸울라.. "
" 그래, 그만하자.. 또 홧병 도지겠다.. "
" 그렇게 부러우면 자기가 이쁘게 태어나든가.. "
" 너, 진짜.. 철수씨, 뭐 해요? 여기 술잔 비었잖어.. "
" 근데, 이년이 누구한테 술을 따르래.. 철수씨가 니 꺼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