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호프집으로 들어 선 철수에게 술잔을 내 밀었다.
" 뭣땜에 사표까지 내.. "
" 더 이상 다니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
느닷없이 사표를 내겠다는 철수의 마음을 돌리고 싶은 윤식이다.
잘못된 허가를 내 주고, 한달여를 술독에만 빠져있던 철수였기에 그가 사표를 낸 이유는 충분히 짐작이 간다.
윤식이 역시, 야합에 동조를 한 처지인지라 어떤 면으로 보면 철수의 결단이 부럽기는 하다.
하지만 늦은 나이에, 가슴 설레는 청춘을 되 찾아 준 정미가 있다. 그녀에게 새로운 거처라도 마련케 해 줘야 했기에,
울며 겨자먹기로 최대표의 유혹에 넘어가기로 한 것이다.
윤식이 역시, 공무원의 신분으로 해서는 안 될 허가까지 내 주고 마음이 편할리는 없다.
부정을 저지른 찜찜한 마음이 되어 시청에 출근을 하고 있다.
정미가 이혼을 하고 새로운 곳에 적응을 하면서, 하루종일 밝게 웃는 모습을 보는게 그나마 위안이다.
" 이 사람아.. 나이도 젊은데.. "
같이 오랫동안 철수와 근무를 하며 적지않은 정이 쌓였다. 서로간의 표정만 봐도 그 사람의 기분을 짐작할수 있을
정도였다.
어찌보면 아끼는 후배를 잘못된 길로 이끌었다는 죄책감까지 드는 마당이다.
" 그냥 술이나 한잔 하시죠.. "
막무가내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철수를 달래기 위해 시흥 사거리에 있는 술집으로 불러냈다.
정미가 남편과 이혼에 합의하고, 새로이 이사한 보금자리가 바로 이 곳이기 때문이다.
" 앞으로 뭘 해서 먹고 살려고? "
" 뭘 한들, 입에 풀칠은 하겠죠.. "
심드렁해 하는 철수를 바라보며 씁쓸한 마음을 지울수가 없다.
정미와 함께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욕심은, 철수처럼 결단을 내릴 용기마저 휴지 조각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정미와 그녀의 딸까지 책임지고 싶은 마음이기에 한푼이나마 더 벌어야 한다.
" 참, 별나네.. "
한달여를 고민끝에 사표를 내기로 결심을 한 철수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공무원 생활이지만 더 이상 미련을 두기가 싫다. 정년까지는 무려 20 여년이나 남았지만, 이런
마음가짐으로는 견뎌낼 자신도 없다.
너무나 좋아하는 여자의 부탁으로 몹쓸 청탁을 물리치지 못했고, 그토록 갈망했던 여자에게 멸시까지 당하는 공무원이라는
직업에 대해 긍지마저 잃은 까닭이다.
10 여년을 한 직장에서 같이 근무하면서, 여러가지 애환을 겪었던 선배의 술자리를 떨치기는 어려웠다.
약속장소인 시흥사거리를 와 보니 그녀가 살고있는 아파트가 저 멀리 보인다. 다시금 그녀의 얼굴이 떠올라 가슴 한켠이
아리다.
잊고자 노력은 했지만, 결코 쉽게 치유될수 없는 휴유증이 아직도 겹겹이 쌓여있는 중이다.
그 전에도 한번 온 적이 있는 호프집이다. 선배인 박과장의 얘기도 귓전으로 흘러간다.
" 참, 별나네.. "
" 결심을 하고 나니까 후련해요, 가끔씩 술 마시고 싶으면 과장님한테 전화드릴께요.. 아니, 참.. 이제는 형님이라고
부르는게 맞겠네.후후.. "
" 자네만 보면 죄를 진 것 같아서, 마음이 안좋아.. "
" 그게 어디 형님 잘못인가? 신경쓰지 말아요.. "
" 그래.. 우리 오늘 술이나 왕창 마시고, 한번 망가져 보자.. "
" 에이~ 천천히 마셔요, 이쁜 형수도 있다면서.. "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려고 하는 박과장이 내심 부러운 철수다. 20 여년동안 평탄한 결혼생활을 유지해 왔던 그가,
새로운 여자가 생겼노라고 했다.
" 그렇지, 참.. 깜빡 잊었네, 자네를 데리고 집으로 오라고 했는데.. "
" 에구~ 됐네요.. 깨가 쏟아지는 집에 가서 눈총받기 싫으니까.. "
" 편한 사람이야.. 그래서 내가 무리를 했는지 모르지만, 나같이 형편없는 놈을 무슨 신주단지 모시듯 하거든.후후.. "
" 어머 ~ 이게 누구야 ? "
누군가 다가오며 아는척을 하는데, 여자 목소리가 귀에 익는다.
바로 그녀들이다. 꿈에서조차 몽매 그리던 성희와 말을 건넨 그녀의 친구 여진이..
놀랜 나와 마찬가지로 어쩔줄 모르는 그녀가 여진이 뒤에서 나를 건네다 본다.
" 어~ 이게 누구신가? "
" 안녕하세요, 과장님.. 오랜만에 뵙네요.호호.. "
" 그러게.. 오늘 내가 운이 좋네, 이런 미인들을 다시 만나고.후후.. 술 드시러 오셨나 봐.. "
" 네, 친구랑 같이.. "
" 일행이 없으면 같이 합석을 하시던지.. "
" 그래도 될까요? "
박과장이 내 옆으로 자리를 옮기고, 그 자리에 여진이가 대신 했다. 머뭇거리며 할수없이 여진이 옆에 엉덩이를 붙이는
그녀를 보고는 다시금 가슴이 방망이질을 한다.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한 놈이다.
여전히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눈이 부신 그녀다. 다만,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자신감은 사라졌지 싶다.
" 너무하더라, 철수씨는.. 어쩜, 무심하게 연락도 한번 없고.. "
" 그동안 우리 김계장하고는 서로 만난적이 있었나 보구만.. 섭섭하네, 나만 빼 놓고.. "
" 그런건 아니고.. 그냥 우연히 술 한잔 했어요.. "
변명같은 거짓말을 늘어놓는 성희의 말에 섭섭함이 인다. 아무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만났다지만, 나에게는 견디기
어려울만치 가슴앓이를 해야 했던 그 간의 만남이, 그녀에게는 별게 아니라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 맞아요, 우연히 만나서 술 한잔 했어요.. "
그녀를 떠나 보내고도 아직도 그녀를 위해 동조를 해야 하는 내 자신이 싫다.
" 흠, 그랬구나.. 사실 우리 김계장이 사표를 낸다고 해서 이별주를 마시는 중인데.. "
" 어머.. 왜요? 그 좋은 직장을 왜 나오실까.. "
" 그게 다 우리 김계장이 워낙에 양심적인 사람이라.. 그 왜, 사촌오빠한테 허가를 내주고는 맘이 편치 않았나 봐요.. "
" 그럼, 그 일 때문에 자진해서 사표를 썼단 말이네요? "
주로 여진이와 박과장이 대화를 했고, 성희는 모른척 듣고만 있을 뿐이다.
" 그런 셈이지, 뭐.. 내가 말려보기도 했지만, 워낙 이 친구 고집이.. "
" 그만해요, 뭐 좋은 일이라고.. "
이미 지나간 일이다. 내 스스로 결정한 일을 두고서, 다시 거론 된다는게 맘이 편치가 않다.
" 꼭 사표를 냈어야 했나요? "
여진이가 내 눈을 마주보며 따지듯이 묻는다.
" 그냥 술이나 한잔 해요.. "
버릇처럼 술잔을 쥐게 된다. 내 처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관심을 보이는 박과장에 이어 여진이에게까지, 똑같은 말로
대답을 해야 하는것도 지겹다.
" 어쩜, 그렇게 쉽게 사표를.. "
" 그래.. 그냥 술이나 마셔.. "
그래도 물러서지 않으려는 여진이의 보챔에, 성희가 대신 소주잔을 들어 단숨에 털어 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