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입던 그대로인 하늘색 츄리닝 차림으로 호프집 문을 들어서는 성희다.
요즘 들어 젊은 여자들이 많이 입고 다니는 차림이긴 하지만 철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엉덩이의 윤곽이 벗은거나 진배없이 꽉 끼어서는, 팬티의 선까지 뚜렷이 보이는건 물론 사타구니의 접혀진 부분까지
적나라하게 표시가 나서 오히려 보는 사람이 민망할 지경이다.
" 또 무슨 일이야.. "
상의의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채로, 앞 좌석에 앉는 성희가 퉁명스럽게 입을 연다.
" 앞으로 볼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너무 그러지 말지.. "
성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퇴근하자 마자 달려온 철수다. 아무리 좋아하는 여자지만, 그녀의 냉랭한 얼굴까지
대한다는건 고역이다.
" 그건 또 무슨 소리야.. "
" 허가껀 땜에 날 만났다며.. 난 이미 싸인을 했고, 최종적으로 국장이 결재만 하면 보기 싫은 나를 안 봐도 될게고.. "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에게 빠져들긴 했지만, 나를 탐탁치 않게 여기는 그녀를 놔 줘야겠다고 결심한 철수다.
나를 못 마땅해 하는 그녀에게 서운하기는 해도, 그녀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면서까지 매달리긴 싫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녀에 대한 마음을 접는게 맞지 싶었다. 나에게 주어진 운명이 여기까지라면 순리를 따르는게 옳치 싶은것이다.
" .................... "
" 성희하고 그릇이 다르다는건 나도 알아.. 그러니까 일이 끝날때까진 너무 미워하지 마.. "
" 그렇게 보였다면 미안해, 핑계 같지만 내가 요즘 기분이 별로야.. "
" 오늘 보자고 한건 최대표를 한번 만나고 싶어서야.. "
" 그건 왜.. "
" 개인적으론 그 사람을 보기 싫지만, 당신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어서 그래.. "
허가를 반대하는 박과장의 맘을 돌리려면 최대표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성희도 애초 계획대로 사례금을 받을것이다.
" 꼭 만나야 해? "
" 그래야 일이 성사되지 싶어.. "
" 알았어.. 내일쯤 만나.. "
" 그리고 성희한테 선물하고 싶은게 있어.. 마지막으로 그것만 받아 줘.. "
" .................... "
" 늦으셨네.. "
" 미안해요, 성희씨와 얘기가 길어져서.. "
" 괜찮아요, 어차피 시간이 남아도는 백조걸랑여.호호.. "
할 얘기가 있다며 만나자는 여진이의 핸폰을 받았었다. 별로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너무나 간곡하게 조르는
여진이를 뿌리칠 이유도 없다.
" 그래, 할 얘기가.. "
" 급하긴.. 우선 술이나 한잔해요.. "
은근히 눈을 흘기는 그녀가 술잔에 술을 따른다. 그리고 보니 오늘 여진이의 옷차림이 평소와 달라 보인다.
망사를 두세겹 겹친것처럼 가느다란 천이 나풀거리는 치마가 세련돼 보인다. 까만점이 알알히 박힌 치마에 맞춘듯,
가슴이 깊게 파인 티 위에 구멍이 숭숭 뚫린 연두색 쉐타를 걸쳤다. 소주병을 받아 그녀 잔에도 술을 따랐다.
" 옷이 참 이쁘네요.. "
" 어머~ 진짜? 호호.. 성공했네, 잘 보이고 싶었는데.. "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데, 입술에 바른 립스틱이 유난히 짙어 보인다.
" 나한테 잘 보여서 뭐하게요, 신랑한테 잘 보여야지.후후.. "
" 에이.. 그 인간 말도 꺼내지 마요, 기분 잡치니까.. "
" ....................... "
" 오래 됐어요, 애 아빠랑 별거한지.. "
" 아, 네.. "
" 술이나 마셔요.. "
연신 술잔을 건네는 여진이의 권주에 조금씩 얼큰해 진다. 성희와 만나지 못할거란 생각에 자꾸만 술잔이 비워 진다.
" 역시 안주는 회가 최고야, 그쵸 ~ .. "
술기운이 오른 여진이의 코막힌 소리가 귀엽다.
" 여진씨는 애교가 많네, 남자들이 좋아하겠어.. "
" 피~ 철수씨는 성희만 이뻐하면서.. "
" 그거야 여진씨가 성희씨 친구니까 그렇지, 여진씨도 이쁘다니까.후후.. "
" 거짓부렁쟁이.. 미워.. "
하얗게 눈을 흘기며 입술자락을 내미는 여진이도 이미 취기가 적당히 오른듯 하지만, 나 역시 빈 속에 술을 마셨음인지
얼큰하게 오른 술기운이 온 몸으로 퍼져 나른해 진다.
" 근데, 할 얘기란게.. "
더 이상 술이 취하기 전에, 나를 만나려 한 여진이의 용건을 듣고 싶다.
" 아이~ 술 맛 안나게.. 천천히 얘기하자니까.. "
" 술이 취할것 같아서 그래요, 벌써 4 병이나 비웠는데.. "
" 옴마나 ~ 무슨 남자가 벌써 취하면 안되지, 나도 아직 말짱하구만.호호.. "
" 여진씨도 적당히 취했어요, 혀도 꼬부라지면서.. "
" 어.. 이상하다, 난 말짱한데.딸 ~꾹.. 옴마나~ 진짜 취했나 보다, 딸꾹질이 다 나오네.. 그럼, 우리 술도 깰 겸
노래방이나 갈까? "
일단 노래방까지는 철수를 데려왔다. 그를 유혹하기 위해 먹은 술이 도가 지나쳐 진짜로 취기가 오르는 여진이다.
" 자 ~ 건배.. "
노래방에서 시킨 맥주잔을 들어 철수의 잔과 부딛쳤다. 큰 맘 먹고 그를 유혹하려던 처음의 의도가 잘못되어, 나중에
계면쩍은 상황이라도 벌어진다면, 술에 취했노라고 핑계라도 대야 했다.
" 나 노래 잘한다~ 그건 몰랐지? "
노래방 기기의 번호를 누르고 마이크를 들었다. '애인 있어요'의 반주가 흘러 나온다.
" 어머 ~ 무슨 남자가 매너도 없다니, 여자가 노래를 하는데 앉아서.. "
쇼파에 앉아있는 철수의 팔을 끌어 한쪽 벽에 설치된 화면을 바라보고 섰다.
" 알겠죠 ~ 나 혼자가 아닌걸요 ~~ .. "
노래를 부르면서 자연스럽게 팔을 끼고는, 의도적으로 젖가슴을 그의 팔에 밀착시켰다. 처음엔 힘을 주며 멈칫하던
철수가 머리까지 어깨에 기대자 차츰 어색함이 풀어진다.
할수없이 노래방까지 따라오긴 했지만, 성희의 친구인 여진이가 부담스러운 철수다.
술이 취했는지 자신의 젖가슴이 눌린지도 모르고 노래에 빠져있다. 떼어 낼까도 했지만, 그녀가 어색해 질까 봐 팔의
힘을 거두었다.
그녀의 머리에서 옅은 향수가 풍겨온다. 좀 전에 마신 술로 인해 자꾸만 몸이 쳐 진다.
평생을 같이 하고팠던 성희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그녀의 친구인 여진이와 헛된 시간을 보내는 자신이 한없이 처량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