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후 땡중이 찾아왔다.
" 좀 어때.. 듣기보다 견딜만 한 모양이네, 걸어 다니는걸 보니.. "
병실로 들어온 땡중이 미진이에게 눈 인사를 건네자, 미진이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피어난다.
" 그래, 아주 살맛이 난다.. 이 고약한 땡중아.. "
괜스레 병문안을 와 준 스님에게 울화가 치민다. 미진이의 일을 예감했던 신통력이 생각나서인지도 모르겠다.
" 쯔쯔 ~ 어디서 뺨 맞고 누구한테 화풀이야.. 그러길래 진작 액땜을 하랬더니.. "
" 이왕에 이리 될줄 알았으면 확실하게 막아 주던지.. "
" 어허 ~ 그건 내 소관이 아니라고 했거늘.. 다 자네 복이야.. "
" 스님이라는 물건이 말하는 상통머리 좀 보게, 얻어 맞은게 복이라니.. 왜, 그놈들에게 고맙다고 절이라도 하라고 하지.. "
미진이의 관심을 끌기 위해 땡중에게 심술을 부려 본다. 혹여 말문이라도 터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 행여 보복일랑 하지 말게.. 왜, 원수를 사랑하란 말씀도 있잖은가.. "
" 저,저.. 미진아, 저 물건 땡중이 틀림없다니까.. 내가 무식하다고 성경책에 있는 말을 훔쳐서 쓰는것 좀 봐라.. "
미진이의 입가에 다시금 미소가 피어난다. 모든걸 포기하고 누워 있기만 하던 미진이가, 미소를 보여 주는것만도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다.
몸조리 하라며 합장을 하고, 잠시 머리를 숙였던 땡중이 돌아갔다.
" 너도 봤지, 병문안을 오면서 아무것도 안 사들고 그냥 오는 인간이 어딨냐.. 틀림없는 땡중이야.. "
눈치를 살피며 말을 붙여 봤지만 묵묵부답이다. 기약없는 벙어리 행세가 언제나 끝이 날런지 답답스런 마음이다.
" 안되겠다, 잠깐 일어나 봐.. "
누워있는 미진이의 몸을 부축여 일으켜 앉혔다. 화장실에 갈때만 스스로 일어섰던 미진이다.
" 너, 나한테 발 씻어 달라고 했지.. 오늘부터는 내가 니 발을 씻겨 주마.. "
문득 자신의 발을 씻어 달라던 얘기가 생각이 났다.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미진이 침대 위에 놓았다.
미진이가 정상으로 돌아 오기만 한다면 무슨 일이던지 창피할게 없을것 같았다.
환자복 바지의 단을 접어 미진이의 발 한쪽을 세숫대야에 담고 물을 끼얹었다.
꼼꼼하게 미진이의 발을 씻겨 나갔다. 아니, 씻긴다기 보다는 미진이의 체온을 느끼고 싶은 심정으로 천천히 주물렀다.
복숭아 뼈 밑에 작은 점이 있는것도 찾아냈고, 새끼 발가락에 굳은 살이 박힌것도 오늘 처음 알았다.
" 어서들 와.. "
영희와 '모래시계' 박연숙이 미희를 앞세우고 들어온다.
그 날도 미진이의 발을 씻겨주고 있었다. 발을 씻어 줄때면, 유독 미진이의 표정이 편안해 보였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던 미진이의 발 뒤꿈치가 사랑스러워 진 것도 이 즈음이다.
" 어머 ~ 미진이는 좋겠다. 호호.. 천하의 영훈이 오빠가 이런 모습도 있네.. "
" 그러게, 사진이라도 찍어놔야 하는거 아니니. 호호.. "
앞서거니 뒷서거니 연숙이와 영희가 놀려댔지만 부끄럽지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 난 매일 보는데, 뭐.. 미진이 언니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말도 못해요. 호호.. "
포장마차를 접으라고 미희에게 이르고는, 대신 매일 병실로 출근하라고 했다. 혜영이와 아가씨들도 거의 날마다 병실을
찾았고, 영식이도 자주 들려 송경장과의 통화내용을 알려주곤 했다.
외로움을 겪고 살던 미진이에게, 눈에 익은 사람들을 자주 접하는게 좋은 영향으로 반응하길 바랬다.
" 참, 오빠가 나하고 동갑이라고 했지? "
" 네, 왜요.. "
문득 연숙이 오빠가 흑석동에 살고 있다는 얘기가 기억이 났다.
" 사람을 하나 찾고 싶은데, 박광호라고.. "
경찰이 잠복 근무를 한다지만, 사건이 난지 벌써 보름이 지났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던 차다.
" 박광호.. 우리 막내놈 친구 아닌가 모르겠네.. 그 놈, 못된 놈이라고 하던데.. "
" 자세히 좀 얘기해 봐.. "
" 내가 알기론 약한 사람들 사기나 치고 다녀서 막내한테 얻어 맞기도 하고 그랬다지, 아마.. 근데, 오빠가 그런 인간을 왜
찾아요? "
" 니 동생 좀 만나야겠다, 언제쯤 데려올수 있겠냐? "
겉으로 보기에는 여자지만, 웬만한 남자들보다 배포가 큰 연숙이다. 그런 연숙이의 동생이라면 믿어도 되지 싶다.
미진이를 저 지경으로 만든 놈들이 버젓이 거리를 활보하게 놔 둘수는 없는 일이다. 경찰에서 잡아 들일때까지 기다릴
인내심도 바닥이 나는 중이다.
" 그거야 어렵지 않지, 내 동생이야 내 말이라면 껌뻑 죽으니까.. "
" 잠깐 나 좀 보자.. "
미진이가 듣게 되면 쇼크를 일으킬수도 있기에, 병실 바깥으로 연숙이를 데리고 나왔다.
연숙이 동생 춘식이가 나서고부터 내 몸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가 병원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영식이를 불렀다. 얼추 몸이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까지 나 혼자 나서기엔 무리가
있지 싶었다. 아직도 어깨며 갈비뼈가 부러진 곳이 욱신거렸기 때문이다.
연숙이가 동생과 같이 병실로 들어 서길래, 영식이와 함께 병원 앞에 있는 공원으로 나왔다.
" 그 놈이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하는데.. "
연숙이를 사이에 두고 영식이와 춘식이가 수인사를 했다. 건달들끼리라 서로의 눈빛만 봐도 얼추 맘을 맞출것이다.
" 누님한테 들었습니다, 형님이야 어릴때부터 들어서 알고 있고요.. 그 놈하고 친한 놈들부터 은밀하게 수배하겠습니다.. "
다부지게 생긴 모습처럼, 말귀 역시 빨리 알아듣고 쉽게 이해를 한다. 내 편에 서서 속 시원히 도와주겠다는 뜻이다.
" 그래, 부탁함세.. 혹시라도 자네가 불편하다면 다른 사람이 가르쳐 준걸로 할테니까.. "
" 별 말씀을 다 하시네요, 저도 건달입니다.. 해야 할일과, 해서는 안 될 일쯤은 구분하고 삽니다.. "
" 고마우이, 나중에 술이라도 한잔 하세나.. "
" 그러시죠, 저도 언젠간 한번 뵙고 싶었으니까요.. "
다행스럽게도 말이 통해, 든든한 조력자를 얻은듯 싶다. 어떤 놈이 미진이에게 해꼬지 했는지는 몰라도, 열화와도 같은
투지가 샘 솟는다.
" 영식아, 나하고 현장 좀 다녀오자.. "
연숙이와 춘식이를 보내고 영식이의 차로 일산으로 향했다. 미진이가 발견된 창고의 네비를 찍었다.
자유로에서 일산으로 들어가는 진입로를 따라 가다보니, 네비가 좁은 소로길을 가르킨다. 그 길을 따라 1키로를
들어 갔더니, 몇채의 창고 건물이 보인다. 한적한 곳이고, 창고들의 대부분이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듯 을씨년스럽다.
그 중 경찰이 사건현장의 보호를 위해, 띠를 쳐 놓은 곳의 창고를 찾아 안으로 들어갔다. 유리창마다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다.
천정을 지탱하고 있는 H -빔의 기둥에 밧줄이 묶여져 있고, 그 앞에 말라붙은 핏자국이 먼지와 함께 뒤엉켜 있다.
이곳에서 미진이가 놈들에게 린치를 당했다는 생각을 하니까, 온 몸의 피가 꺼꾸로 솟구치는 기분이다.
한참을 그곳에 서서 몰려오는 흥분을 삭혀야 했다. 미진이가 겪었을 고통이 그대로 전해 지는듯 하다.
" 이만 가자.. 이곳 위치를 잘 기억해 둬.. "
병실로 돌아오니 초희와 장모님이 와 계신다.
" 어서오게, 우리들끼리 먹으려고 했구먼.. "
3단짜리 반합에 음식을 싸들고 오셨다. 몇가지의 전과 불고기, 흰 쌀밥이 펼쳐 진다.
보온병을 열어 그릇에 미역국을 따른다. 무슨 고기를 넣었는지 국물이 뽀얗고, 고소한 향이 병실 안에 퍼진다.
" 오늘이 초희 에미 생일일세, 그냥 지나치기 뭣해서 미역국만 끓였어.. 우리 사위도 같이 드셔야지.. "
초희는 침대위에 올라 제 엄마곁에 앉았고, 미진이는 따스한 눈길로 장모님을 바라보고 있다.
" 그랬구나, 오늘이 초희엄마 생일이구나.. "
수저를 들어 미역국 맛을 보던 미진이의 눈에 촉촉하니 이슬이 맺힌다. 이내 눈물이 되어 뺨위로 흐르기 시작했다.
병원 침대에서 생일상을 받은 자신의 처지를 한스러워 하는 것일게다. 우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으려는듯, 몇번이나
수저를 연이어 입으로 가져가더니, 종내에는 수저를 한 웅큼 물고 울음을 참고자 애쓰고 있다.
감정이 북받치는듯, 어깨까지 들썩이는 미진이를 보며 가슴 한편이 아려온다.
남은 생을 같이 하자고 다짐했던 여자를, 지켜주지 못한 내가 한심스러워 견딜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