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후다.
과천의 모친에게 다녀와서는, 집 앞에서 과일 바구니를 사는 미진이다.
그리고 보니 과천에 사들고 간 과일 바구니와 똑같이 생겼다. 오전에 내 집으로 오면서도, 이곳에서 과일을 샀지 싶다.
" 우리 엄마한테 인사 갈때까지 조금 쉬어.. "
주방에서 렌지에 물을 끓이더니, 식탁에 커피잔을 내려 놓는다.
" 엄마도 별 말 없을거야, 쫄지 마.. "
" 쫄긴, 그럴 놈으로 보이냐? "
" 응, 그런 놈으로 보여.. 그래서 내가 골랐지만.. "
" 얘가, 근데.. "
" 겉으로만 강해 보이지, 마음이 약한 사람이야 오빠는.. "
완전히 여자한테 속속들이 파헤침을 당한 느낌이다. 앞으로의 내 인생이 녹록하지만은 아닐 듯 싶다.
" 니가 잘못 봤을수도 있어.. "
" 천만에.. 난 남자를 안 믿어, 아니 못 믿어.. 오빠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초희아빠 말고는 남자랑 같이 잔 적이
없는 년이야.. 그렇다고 내가 요조숙녀란 얘기는 아냐, 필이 꽂히는 놈을 못 만났을 뿐이지.. "
" 고맙구나, 이쁘게 봐 줘서.. "
" 에그~ 나이를 어디로 먹었길래 저리도 눈치가 없는지.. 오빠한테 필이 꽂힌건 아니니까 좋아하지 마, 잔머리나 굴리는
치사한 놈이 아니란게 보였기 때문이야.. "
나름대로 사람을 보는 눈은 있을것이다. 술을 마시고 헤롱대면서도, 속셈은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 ............... "
" 한가지만 부탁할께, 쓸데없는 일에 나서서 다치지만 않았으면 좋겠어.. "
" 어서 와요, 집이 누추한데.. "
" 별 말씀을 다 하시네요, 처음 뵙겠습니다.. "
미진이의 집 현관에 들어서자 모친이 거실에 나와 계신다.
" 어~ 깡패 삼촌이네.히히.. "
" 깡패 아냐, 앞으로는 그런말 쓰지 마.. "
제 방에서 나온 초희가 아는척을 하자 미진이가 매몰차게 야단을 친다.
" 절이나 받어, 엄마.. 뭐해, 빨리 절부터 해.. "
미진이에게 등을 떠 밀리다시피 해서는 큰 절을 했다.
" 나쁜 사람은 아냐, 하도 쫒아 다니길래 한번 믿어보기로 했어요.. "
미진이가 나서서 자기 모친을 다독인다. 사람좋은 웃음을 지어보이는 모친이다.
" 늙은이가 뭘 알겠니, 니가 오죽 알아서 골랐을라구.. "
" 돈을 버는건 자신없지만, 아껴주면서 살겠습니다.. "
어차피 자랑할 건덕지라고는 없는 놈이다. 누구보다 미진이가 잘 알고 있는지라 마음만은 편하다.
" 배고파요, 밥 좀 주세요.. "
" 식탁에 올리기만 하면 된다, 초희한테도 잘 해줘요.. "
" 명심하겠습니다.. "
식탁에 둘러 앉아 저녁을 먹었다. 졸지에 한 식구가 된 그들과의 첫 대면이 어색하다.
" 차린건 없지만 많이 들어요.. "
" 말씀 낮추세요, 제가 거북하네요.. "
" 그래, 엄마.. 그냥 김서방이라고 불러요.. "
" 형님, 축하합니다. 후후.. "
" 무슨 소리야, 실없이.. "
후배인 영식이를 만나기 위해 보통때보다 일찍 나왔다. 동네 터줏 대감격인 이여사가 장사하는 별다방이다.
" 벌써 소문 다 났어요, 미진이랑 결혼 하신다고.. 아니지, 이젠 형수님이라고 해야겠네.후후.. "
탁자에 놓인 냉커피를 마시면서 느물대는 놈을 보니 괜시리 면구스럽다.
" 그렇게 됐다, 너라도 좀 모른척하면 안되겠냐? "
" 좋은 일인데 뭘 감추고 그러신데.. 어차피 혼자살면 홀애비 냄새밖에 더 나겠수.. "
누가 얘기를 흘렸는지 모르지만, 영식이 놈이 안다면 동네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을것이다.
"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
" 그전부터 눈치는 챘지만 미진씨 정도면 형님하고 잘 어울리지 싶어요, 잘 생각했어요.. "
" 홍경장 놀음하는거 찍어놨지? "
내 신상을 들먹거리는 후배의 입을 막기 위해서도 본론을 매듭지을 생각이다.
" 물론이죠, 일수쟁이한테 꽁지돈까지 빌렸어요.. "
" 며칠동안 사무실 좀 비워라, 손해 보는건 내가 물어줄테니까.. "
홍경장의 비리를 밝히자면 아무래도 하우스를 하는 영식이한테까지 불똥이 튈수도 있는 것이다.
" 됐네요.. 형님한테 축의금 드린걸로 치죠,뭐.. "
딴에는 의리를 지킨다는 후배에게 미안한 감이 든다. 생기는 것도 없는 일에 영식이에게 신세를 지는것이다.
" 어떻게 된게 경찰이란 놈이 양아치도 아니고.. 이번에는 제대로 혼내 주련다.. "
" 괜찮겠어요, 그래도 경찰 공무원인데..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시지.. "
" 단란주점에 와서 애들처럼 삥을 뜯어 가더란다..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괴롭히는데 어떻게 그냥 놔 두냐.. "
" 적당히 하세요, 이제 형님도 성질 좀 죽일때가 됐는데.. "
젊은 후배까지 한쪽눈을 감고 사는데, 이 나이에 이런일까지 나서는게 좋은 모양새는 아닐것이다.
" 김사장 장가 간다면서.. 언제 한턱 내라구, 치사하게 도둑 장가가지는 않겠지.. "
이십여년을 한 자리에서 다방을 꾸려가는 이여사다. 온 동네에 소문이 났지 싶다.
" 오랜만이야, 바쁜 사람을 불러냈나? "
" 초저녁이라 사건도 없는데요,뭐.. 술은 못 마셔요, 요즘 사회부가 비상이라.. "
경찰서 출입기자인 박치영이다. 홍경장이 든든한 배경이 있다기에, 박치영의 도움이 필요하지 싶었다.
몇년전인가 술에 취한 박치영이 동네 건달들하고 싸움이 붙었던 적이 있었다. 마침 근처를 지나던 길이었기에, 두들겨
맞던 박치영을 구해주고, 건달들의 사과까지 받아준 인연이 있다.
인간성은 괜찮아 보였지만, 못 배운 사람들을 무시하는 부르조아 기질이 있는 놈이다.
" 미꾸라지 같이 경찰들을 욕 먹이는 놈이 있어, 혼을 좀 내주고 싶은데.. "
" 어떤 일인데요.. "
홍경장이 하고 다니는 못된 짓을 하나도 남김없이 들려주고,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만 감사에서 빠져 나갔던
얘기까지 해줬다.
" 어때, 신문에 내면 빠져나가지 못할텐데.. "
" 약해요, 그런 자잔한 일로 신문에 실을수도 없고.. 차라리 투서를 하세요, 무슨 빽이 있는지 모르지만 내가 나서서
틀어 막을테니까.. "
처음엔 기사거리를 건진듯이, 귀를 세우고 듣던 박기자가 난색을 표한다. 신문에 나기에는 특이한 죄질이 아닌지라
상품성이 없단다.
어찌 된 세상이 지은 죄도 인기가 있고,없고를 따져야 하는건지 모르겠다.
쉽게 생각했던 일이 꼬이게 생겼다. 투서라는게 뒤통수를 치는 방법 같아서 마음에 들지가 않는다.
차라리 대놓고 몇대 쥐어 박는게 적성에 맞을텐데, 그나마 폭행죄로 고발이라도 될까봐 엄두가 나지 않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