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생각없어

아무생각없어 63

바라쿠다 2012. 5. 31. 22:22

밖으로 나가는 아빠의 어깨가 유난히 무거워 보인다.     10 여년전 이혼을 하게 된 아빠를 이해하지 못했던 정인이다.

스스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아빠의 쓸쓸함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학에 입학했을때 축하를 해 준다며, 집앞에 있는 '아지트'에서 처음으로 아빠와 술자리를 같이 했다.

가끔씩 홀로 사는 아빠와 술자리를 했지만, 한번도 사귀는 여자를 입에 올린적이 없는 아빠였다.

홀아비로 살아가는 아빠에게 흑심을 품는 여자들이 꽤나 많았던걸로 기억된다.      중학교때 같은반 친구의 엄마는

남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혼자 애를 키우기 힘들겠노라며 밑반찬을 챙겨준다는 핑계로 수시로 집에 들락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아빠는 그런 유혹들을 외면했다.      철이 들면서 알게된 것이지만 딸한테 그런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한 까닭이다.

주위에 여자들이 많이 꼬이는건 은연중에 눈치로 알고는 있었어도, 같이 살고 싶은 여자가 있다고 자신에게 소개를

시킨건 소영이 엄마가 처음이다.

집에서는 할머니한테 닥달을 당하고, 좋아하는 여자한테서 따돌림을 당할지도 모르는 아빠를 그냥 지켜 볼수만은

없었기에 소영이를 만나러 나온것이다.

" 소영이한테 할말이 있는데..  우리도 잠깐 나갈까.. "

 

차분히 얘기를 나눌곳을 찾아 두리번 거리는데, 이수역 사거리에 통유리로 되어있는 카페가 눈에 들어온다.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통해 들어선 카페는, 시간이 늦어서인지 손님이 없는게 맘에 든다.

" 소영이는 아빠가 맘에 드니? "

거품이 넘치는 뷔엔나 커피를 빨대로 빨아대는 소영이가 천진해 보인다.     처음 만나던 날도 친동생을 삼고 싶을만큼

정감이 가는 아이였다.

" 잘 생겼지, 분위기 있지, 거기다 매너도 짱이고.히히..  내가 엄마라도 반했겠다.. "

" 아빠가 곤란하게 됐어.. "

되도록이면 솔직하게 얘기를 해주고, 결정을 내리는 것은 소영이와 소영이 엄마가 판단할 몫이라는 생각이다.

" .............. "

" 소영이 엄마 말고도 만나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애기를 가졌어.. "

" .............. "

" 그 사실을 할머니가 아시고는 그 사람을 며느리로 삼겠다고 했어, 아빠는 소영이 엄마와 헤어질수 없다고 하시고.. "

뜻밖의 말에 눈이 커지는 소영이다.     많이 놀랬는지 입에 물고있던 빨대를 빼지도 못한 상태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 애기가 생겼으면 책임을 져야잖어, 그 여자도 그걸 원할거구.. "

" 그 사람은 애기만을 원해, 아빠는 원하지 않는 애기를 가졌다고 떼라고 했던 모양이야.. "

" 아빠가 싫어하는데도 애기를 낳겠다고 하는거네.. "

" 외로운 사람이야, 그 분..  아빠랑 상관없이 애기를 낳아서 혼자서라도 기르고 싶대.. "

" 그 분이라고 하는걸 보니까 언니도 만나본 모양이네.. "

" 소영이도 아는 사람이야, 너희 담임 선생님.. "

얼마나 놀랬으면 벌어진 소영이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한참을 골똘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소영이가 고개를 들었을 땐, 그 큰 눈에 가득 눈물이 그렁대고 있다.

" 돌아가신 아빠가 술만 드시면 엄마를 때리곤 했어, 주사가 심했거든..  난, 그런 아빠가 너무 미워서 견딜수가 없었구..  

차라리 죽어 없어지라고 성당에 가서 기도했다?..   나 나쁜 아이지.히히.. "

" ..................... "

굵은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는 소영이가 입으로는 웃고 있다.

" 내 기도를 마리아께서 들어 주셨는지, 밤중에 술 마시고 여의도에서 길을 건너던 아빠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 

어릴때라서, 엄마를 때리던 아빠가 돌아가신게 얼마나 좋았던지.히히.. "

손수건을 건네주자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고는, 또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소영이를 위로해 줄 어떤 말도 떠 오르지가

않기에 그저 바라만 볼수밖에 없었다.

" 엄마가 혼자 날 키우면서 많이 힘들어 했어..   그러다 아빠를 만났는데 얼마나 따뜻하게 안아 주시던지, 돌아가신

친 아빠보다도 진짜 우리 아빠로 삼고 싶어서 성당에 가서 기도했어..   원래 내가 기도빨이 잘 받거든.히히.. "

 

소영이와 할 얘기가 있다고 자리를 비켜 달라는 정인이의 뜻에 따라, 카운터에서 계산을 치루고는 밖으로 나왔다.

답답한 마음에 밤하늘을 올려 봤지만 드넓은 하늘엔 그 흔한 별조차도 보이지 않는 어둠뿐이다.

얼추 시간이 10 시가 가까워지기에 성미가 있는 국밥집으로 발걸음을 옮기기로 했다.

조만간에 성미도 모든걸 알게 된다는 생각에 다시금 마음이 무거워 진다.

손님이 있는 식탁은 하나뿐이고, 아줌마들과 성미는 장사를 끝내려는 준비들을 하는 중이었다.

" 웬일이야, 이 시간에.. "

" 소영이 엄마 데리고 가려고 마중 나오셨겠지, 뭐.호호.. "

웬만해선 가게에 들리지 않던 내가 들어서자, 카운터에서 계산을 맞추던 성미가 반기고 그 동안 친해진 아줌마도 식탁을

닦고 있다가 허리를 펴고는 밝게 농을 건넨다.

" 술이나 한잔 줘.. "

" 집에서 소영이한테 달라고 하지, 왜.. "

" 지금 정인이랑 같이 있어.. "

밑반찬과 소주를 탁자에 내려 놓고는 맞은편에 앉는다.

" 어머, 둘이서만.. "

" 응, 자기들끼리 놀겠다구 해서 쫒겨났어.. "

얘기를 꺼내긴 해야겠는데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 그래서 나하고 대신 놀아 달라고 응석부리는 거네..  에고, 우리 신랑이 어쩌다 이렇게까지 인기가 떨어 졌을꼬.호호.. "

아무것도 모르고 애들 둘이서 같이 있다는 사실만을 좋아라 하는 성미를 보자니 죄스러운 마음까지 든다.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요것들이 아빠를 왕따 시키다니..   나쁜 지지배들이네.. "

자신과 합쳐지는걸 기정 사실화로 알고있는 성미는, 새롭게 만난 언니와 동생간에 정을 다독이고자 만나고 있는줄로만

알고 있다.

" 뭘, 젊은 애들끼리 통하는게 있겠지.. "

" 정인이도 당신을 닮아서 따뜻한가봐, 벌써부터 동생을 챙기니.. "

두 아이가 나누는 얘기의 주제를 성미가 알게 된다면, 아마도 그녀의 성격으로 미루어 입에 거품을 물고도 남을것이다.

아줌마들도 퇴근을 하고, 텅빈 가게에서 소주병을 2개째나 비워 가는중에 핸폰이 울린다.

~ 아빠..  나 소영이.. ~~

" 그래, 우리 막내딸.. "

정인이한테 모든 설명을 들었을거란 생각이 들자 면목이 없다.

~ 앞으로도 나 이뻐해 줄거지.. ~~

" 그럼, 우리 막내가 얼마나 이쁜데.. "

~ 엄마랑 있어? ~~

" 그래, 지금 가게에서 같이 한잔하는 중이야.. "

" 언니한테 바가지 씌우지 말고 빨리 들어오라고 해요.. "

몇잔술에 얼굴이 뻘겋게 달아오른 성미가 탁자에 턱을 괴고는 참견을 하고 있다.

얼큰하게 취기가 오르면 침대위에서의 몸짓이 더욱 뜨거워져 열락의 숨을 토해내는 성미다.     

~ 오늘은 집에 가서 주무세요, 엄마하고 둘이서만 할 얘기가 있거든.. ~~

" 그러자..  우리 막내한테 아빠가 미안하구나.. "

반포 집으로 가겠다고 하자 못내 서운해 하는 성미에게 등을 보일수 밖에 없었다.

잘못을 저질러 놓고, 어린 소영이에게 떠 넘긴 꼴이 되어버린 내가 한심스러워 견딜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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