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 임신을 했다는.. "
너무 놀란 마음에 말까지 더듬게 된다. 임신을 했다는 인숙이의 느닷없는 말에 잠시 평정심을 잃고 말았다.
" 몇개월째야.. 아니, 그 보다 언제 알았는데.. "
" 선배, 침착해라.. 선배답지 않게 왜 그리 허둥대.. "
놀랄걸 예상이라도 했는듯 의외로 차분한 인숙이다. 하지만 그런 인숙이의 반응이 나를 더욱 당황케 한다.
" 이게 침착할 일이야.. 지금 내 나이가 몇살인줄 몰라서 하는 얘기냐구.. "
" 이 상황이 나이랑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지금 선배 모습이 보기가 좀 그러네, 내가 선배한테 책임이라도 지라고
할까봐 미리부터 발 빼려는 겁쟁이로 보여.. "
차분하면서도 당당한 인숙이로 인해 나 혼자만이 도외시 된 듯한 느낌이다.
" 누구 책임을 따지자는게 아니고 내 입장이 그렇찮어.. "
" 소영이가 선배한테 아빠라고 부르는것도 알고 있는 나야.. 그리고 소영이 엄마와 선배 사이에 끼어들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어.. 난 단지 내 핏줄이 갖고 싶은거야, 다시한번 말하면 이 애기는 선배와 상관없이 내가 낳아서 기르고
싶은거란 말이지.. 선배가 원한건 아니겠지만, 태어날 애기의 아빠인건 확실하니까 알려 주는것 뿐이구.. "
나하고 떨어져 있는 동안에, 세세하게 뒷일까지 생각을 한 듯 막힘이 없다.
" 그렇지만 태어날 애기 생각도 해야지, 부모가 되면 보란듯이 올바르게 키워야 할 책임이라는 것도 있을게고.. "
내 나이에 이제 애기를 낳는다면 팔십이 가까워서야, 그 아이가 결혼이란걸 하게 될 것이다. 완전히 할아버지가
손자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이랑 다를바가 없는 것이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 난 하늘이 내게 내려준 선물이라고 생각해, 선배한테는 말을 안 했지만 결혼초에 애기가 들어 섰었어.. 죽은 오빠가
누구의 애기인지 모르니까 지우라고 했기 때문에, 할수없이 수술을 하고 나서 오랜세월을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
처음 듣는 얘기다. 친오빠와 근친간의 부적절했던 과거 얘기는 들었지만 임신까지 했었다는 얘기는 듣질 못했다.
하기사 여자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분신을 낳아 기르고 싶은 마음이야 왜 없겠냐마는, 꼭 그 상대가 나이어야
한다는 것에 겁이 난다.
내 스스로 지금의 인생이 맘에 들지 않아,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려는 룸펜이다.
말년을 맞아가는 이 나이에 내 핏줄이 태어 난다는건 또 다른 중압감일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결론을 내지 못하고 얼마동안 생각할 시간을 갖자며 인숙이를 달래고는, 차려준 저녁을 먹는둥 마는둥하고는
그 집을 나서고야 말았다.
" 이게 웬거야.. 오빠가 안하던 짓을 다하구.호호.. "
인숙이로 인해 커다란 고민을 안게 되고는, 마땅히 마음을 다스릴만한 곳이 떠 오르질 않아 미진이 집으로 왔다.
백화점에서 산 목걸이를 내밀자 목에 걸고는 거울까지 들여다 보며 애들처럼 좋아한다.
" 그렇게 좋아할줄 알았으면 가끔 점수 좀 딸걸 그랬네.후후.. "
" 선물도 반갑지만 오빠가 나를 생각해 준다는게 더 좋지롱 ~호호.. "
성격이 조용한 편이라 해바라기처럼 기다릴줄 아는 그녀다. 수정이처럼 들이 대지도 않고, 성미처럼 자신한테
소속이 된 양 바가지를 긁지도 않는 그녀다.
오늘처럼 울적하거나 마음이 싱숭생숭할때 포근히 감싸줄줄 아는 천상 여자인 것이다.
" 오늘은 니가 만들어 준 안주를 먹을 자격이 생긴거네.. "
" 오빠도 츠 ~암.. 서운하게 왜 그래, 내가 오빠한테 눈치 준적이라도 있는것처럼.. "
섭섭하다는 듯 눈을 흘기는 미진이다.
" 아냐, 농담이야.. 니가 편해서 해본 소리야.. "
그제서야 서운한 표정을 풀고 입가에 미소를 머금는다.
" 근데, 아무래도 수정이하고 박사장이 사귀는게 맞는것 같애.. 조금전에도 가게 일 때문에 핸폰을 했더니 옆에 누가
있는지 할말을 못하고 머뭇거리더라구.. "
언제까지 수정이를 계속 봐야 할지 고민하던 중이다. 수정이와 어떤 결말이라도 지으려면 이 참에 그녀의 행동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 그랬단 말이지, 잠깐만 조용히 해 봐.. "
식탁에 마주앉은 미진이에게 조용히 하라고 이르고는 수정이한테 핸폰을 했다. 한동안 신호음이 울리고 나서야 겨우
수정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 웬일이야, 이 늦은 시간에.. ~~
" 응, 할말이 있어서.. 지금 어디냐.. "
~ 어디긴, 집이지.. ~~
" 그래 ~ 그럼 잠깐 나와라, 니네 집 앞에 있는 호프집이야.. "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도 안되는 핑계를 대는 수정이다.
~ 지금은 안돼, 시골에서 손님이 오셔서 얘기중이야.. ~~
" 너한테 전해 줄 선물이 있어서 그래, 잠깐 나와.. "
박사장과 같이 있는게 맞다는 감이 들기 시작하자, 그녀의 약점을 쥐어야 한다는데까지 생각이 미친다.
~ 글쎄, 안된다니까.. 내일 만나.. ~~
초조해진 수정이의 억양이 높아진다. 제 할말만 하고 핸폰을 끊으려는 눈치다.
" 얘가 왜 이러냐, 잠깐이면 된다는데.. 니네 집에 가서 초인종 누를테니까 선물만 받으라구.. "
목소리만으로 그녀의 움직임을 파악하려니 조금은 억지를 부릴수밖에 없다.
~ 자꾸 왜 그래.. 오지 말란 말이야.. ~~
짜증까지 섞인 그녀의 목소리로 봐서, 박사장과 같이 있는게 틀림이 없다는 확신을 갖기에 이르렀다.
" 너 지금 남자랑 같이 있구나.. "
~ .............. ~~
정곡을 찔린 수정이가 숨 죽인채 당혹해 하는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 누구랑 같이 있는지도 내가 알아 맞춰 볼까, 그렇게 숨길것까지는 없잖어, 내가 니 남편도 아니고.. 됐다, 둘이 있는걸
방해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나중에 만나서 얘기하자.. "
일단은 수정이한테 통보를 한 격이니 더 이상 말을 섞는것도 무의미하다는 생각에 통화를 끝냈다.
" 어머 ~ 둘이 같이 있는게 맞어? "
핸폰을 닫고서 식탁위에 내려놓자 미진이가 궁금증을 드러낸다.
" 그런거 같애.. "
" 어쩜 ~ 오빠는 그렇게 머리가 빨리 돌아간다니.. 집으로 쳐들어 간다고 했을때 수정이 년이 얼마나 놀랬을꼬.. "
삼류 소설같은 이 현실을 미진이가 더 반기고 있다. 수정이의 눈치를 보면서까지 내 옆에 머무려는 미진이로서는
큰 관심사일수 밖에 없는 노릇일게다.
" 이제 그만 수정이하고 매듭을 짓고 싶은데 '이차선 다리'가 마음에 걸려.. 나 몰라라 할수도 있겠지만 날 믿고 따라온
식구들도 있구, 나중에라도 가게가 엉망이 되면 수정이한테 원망을 듣는것도 모양새가 그래.. "
" 왜 오빠가 그런데까지 신경을 쓰냐구, 지 년이 벌린 일인데.. "
" 내 마음은 그렇지가 않아, 어찌 됐든 나한테 잘 보일려고 벌린 일이니까.. 괜히 찝찝해서 싫어.. "
" 에그 ~ 체면이 밥 먹여주나.. "
미진이야 수정이와 정리를 하는것에만 신경을 쓰겠지만, 나로서는 헤어지더라도 좋게 매듭을 짓고 싶다.
" 미진이 니가 맡아서 하면 어떻겠냐, 장사는 잘 되니까 손해 볼일은 없지 싶은데.. "
그전부터 혹시 수정이와 틀어질 경우를 대비해서 염두에 뒀던 말을 꺼냈다.
" 글쎄.. 내가 꾸려 나갈수 있을까.. "
앞에 나서는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그녀이기에 어찌보면 당연한 반응이다.
" 그거야 가끔 내가 들려서 코치를 해주면 될거구, 수봉이와 미숙이만 잘 데리고 있어도 괜찮을거야.. 해 보다가
정 힘들면 팔아 치워도 제 가격은 받고도 남지 싶은데.. "
큰 사업은 아니더라도 주위 친구들에게 새로운 일을 시작했노라고 한지가 불과 얼마전이다. 웬만하면 가볍게
보이는게 싫고, 그만 두더라도 깔끔하게 끝내고 싶은 마음이다.
" 오빠가 도와준다면 모를까, 혼자서는 자신이 없어.. "
다행스럽게도 나같은 놈을 남자로 대접해 주려는 미진이가 반 승낙을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