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미와 소영이까지 넷이서 식사를 한 후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까지 하고는, 딸과 함께 국밥집을 나섰다.
예상했던 대로 큰길까지 걸어나오는 중에, 사귀고 싶은 청년을 인사시키고 싶다는 딸의 얘기를 들었다.
혼기가 차면 시집가야 하는거야 당연하지만, 인숙이의 고집으로 인해 딸애한테 남자친구가 생긴것을 편안스럽게 축하할
입장이 못 되는지라 영 개운치가 못하다.
반포 집으로 가는중에 수없이 생각을 굴리다, 결국 딸에게 인숙이와의 일을 털어놨다.
인숙이가 딸아이를 만나고 싶다는 말이 떠 올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또한, 애비의 일이지만 이미 성인이 된 딸에게
알리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 조금 있으면 도착할게다, 내 잘못도 크지만 애를 낳겠다고 고집을 부리니 어째야 할지 모르겠다.. "
잠시 생각을 하던 딸아이도 만나 보기로 맘을 굳혔는지 시간이 괜찮다고 해서, 인숙이를 처음 만났던 구반포 삼거리의
일식집으로 나오라고 했던 것이다.
" 그 분이 아빠와 같이 합치겠다는 얘기는 안해요.. "
" 소영이 담임이야, 소영이 땜에 만나서 어쩌다보니.. 합치자는게 아니고 자기 핏줄을 키우고 싶다고 하더라.. "
딸도 성인이 되니까 이런일도 의논한다 싶어 대견하기도 하다.
" 우리 아빠 능력있네, 아직도 애기를 만들 정도니.호호.. "
" 야, 임마.. 이 시점에서 농담이 나오니? 니가 시집이라도 가서 애기를 낳았으면 둘을 같이 키울뻔 했는데.. "
이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는것 같지 않은 딸 때문에 조금은 서운하기도 하다.
딸아이와 앉아 있는 방문이 열리더니 인숙이가 들어온다.
" 안녕하세요.. "
상밑 바닥으로 발을 내리고 있던 딸아이가 방바닥 위까지 올라서서 인숙이를 맞는다.
" 반가워요, 아빠랑 많이 닮았네.. "
일부러 편하게 입었는지는 몰라도 집에서 걸치는 츄리닝에 쉐타를 걸치고 온 인숙이다.
" 절 보고 싶다고 하셨다기에.. "
" 그래요, 아빠처럼 술을 잘한다고 하길래 나하고도 맘이 통할지 보고 싶더라구.. "
딸과 얘기를 나누는 인숙이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진다.
" 아빠처럼 자주는 아니지만 누구한테 져 본적은 없어요.호호.. "
" 무슨 여자들이 만나자마자 술 타령이야, 아주 주당클럽이나 하나 만들지 그래.. "
객적은 소리를 해서라도 어색한 분위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나이어린 처녀를 임신시킨건 아니지만, 괜스레 죄인이 된 심정인 까닭이다.
" 어머, 그러면 되겠다.. 정인이라고 했지, 아빠 말처럼 나랑 술친구 해주면 안될까.. "
" 술 드셔도 되겠어요, 애기.. "
" 아직까진 괜찮어, 적당히만 마시면.. "
" 그래요, 한잔해요.. 이런말 버릇없다고 보실지 모르겠지만 첫인상이 무척 싱싱해 보여요.. "
딸이라서 그런지 인숙이를 처음 본 내 눈과 별반 다르지 않다. 늘씬한 인숙이의 첫느낌이 체조선수로 보였였다.
" 싱싱하다.. 좋은데 그 표현, 정인이가 그렇게 봐 주니까 더 좋은것 같애.호호.. "
인숙이와 딸이 서로의 잔에 술을 따라주고는 술잔까지 부디친다.
" 만약에 말이지, 정인이한테 동생이 생기면 어떨까.. "
기어이 딸아이가 있는 앞에서 몸둘바를 모를 얘기가 인숙이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다.
" 좀 전에 아빠한테 얘기 들었어요, 저 보다는 할머니가 아시면 좋아 하시겠네요.. 나혼자 외롭겠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는데.. "
" 동생이 태어나면 이뻐해 줄거지.. "
" 이 사람이 지금 딸애한테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
음식상 밑으로 살며시 발등을 밟으며 눈짓을 해도, 딸아이의 얼굴에서 눈을 못 떼는 인숙이다.
" 글쎄요, 지금은 뭐라도 말씀을 드리기가 그러네요, 나도 동생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지만 아빠 입장은
틀릴테니까요.. 아무래도 내 의견보다는 아빠나 할머니의 생각이 더 중요할것 같은데.. "
매사에 진중한 편인 딸아이가 조심스럽게 나에게 시선을 준다.
" 난 그래, 설사 아빠나 할머니가 애기를 원하지 않더라도 난 반드시 낳을거야.. 아빠한테 얘기했지만 애기는 나
혼자서라도 키울 작정이야.. "
자기 최면을 걸듯 확신에 찬 어조로 강조를 한다.
" 그렇지만 아빠는 부담이 많이 되시는 모양인데.. "
" 그것도 그래.. 애초에 아빠한테는 뭘 기대하지도, 바라지도 않기로 했어.. 다만, 뱃속에 있는 아이를 이상하게
취급하지만 않았으면 하는게 내 바램이야.. "
애초부터 타협이란건 있을수도 없다는 강경한 인숙이의 주장만 확인했을 뿐이다.
일식집을 나와 택시를 기다리는 중에 언니가 될지 누나가 될지 알수는 없지만, 태어날 애기를 이뻐해 달라는 인숙이의
당부를 한번 더 들어야 했던 딸아이다.
" 할말이 있으면 해 보든가.. "
관계를 정리하기로 결심을 굳히고 '이차선 다리' 근처로 수정이를 불러냈다.
" 별 사이 아니야, 단골손님이 자꾸 들이대니까 한번 만나준거지.. "
박사장과 사귀는걸 숨긴 이유를 몰아세우자 거짓 핑계를 댄다.
" 며칠전에도 얘기했지만 그 친구가 누군지도 알고있어, 갈비집 박사장 맞지.. 속일걸 속여라, 이미 어떤 사인줄
뻔히 아는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고 가려지냐.. "
수정이의 얼굴에 곤혹스런 빛이 스친다.
" 오늘부터 가게에 나오지 마라, 너는 어차피 장사엔 뜻이 없었잖어.. 그리고 나 때문에 벌린 일이니까 며칠안으로
보증금하고 들어간 인테리어 비용은 통장으로 넣어줄께.. "
" 꼭 그래야 되겠어? "
수정이가 제 성질을 못 눌러서 그런지 아랫 입술에 힘을 준다.
" 그래야지, 나하고 어찌 해 보겠다는 년이 다른 남자까지 만나고 다니는 꼴은 보기 싫으니까.. "
내 입에서 안쓰던 욕까지 나오자 다소 놀라는 표정이다.
" 그러니까 왜 나를 버려둔거야, 내가 합치자고 했을때 받아주기만 했어도 좋았잖어.. "
" 서로간에 흉한 꼴 보이지 말자구.. 니 말대로 널 버려둔게 한달이 됐니, 두달이 됐니.. 어차피 너랑 나랑은 맞지
않는 사람들이야, 어쩌면 이게 당연한 일인지도 몰라.. 나 먼저 일어선다.. "
더 이상 마주보고 있어봐야 서로간에 감정의 골만 깊어질 뿐이다. 그나마 나를 좋아한다고 해서 일년여를 만났던
인연이다. 이보다 더 나쁜 꼴은 보고 싶지가 않다.
또한 박사장 와이프 친구인 영희가 만나자고 했기에 앉아 있을 시간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