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생각없어

아무생각없어 54

바라쿠다 2012. 5. 17. 14:31

영희를 만난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일부러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마음을 써주는 여자였다.

나에게 핸폰을 할때도 많은 고민을 했던게 느껴질 정도였다.     보통의 여자라면 자신이 필요할때 핸폰을 하는게

일반적이겠지만, 메시지를 남겨서 남자랑 편하게 통화를 할수 있는 상태인지 체크하는 여자도 있다. 

이틀에 한번꼴로 안부 메시지를 날리면서도, 혹여 내가 늦잠을 자느라 답장이 없어도 불평 한마디 없었다.

어쩌다 통화를 하게되면 오히려 숙면을 방해한건 아니나며 미안해 했다.      본인의 기분보다는 나를 배려하는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오랜만에 시간을 쪼개, 오랜세월 남편없이 외로웠을 영희에게 보답하고 싶었다. 

" 웬일이야, 가게는 어쩌구.. "

영희와 만나기로 한 회집에 들어서니 박사장의 와이프인 여진이가 같이 앉아있다.

" 영희와 놀고 싶어서 남편한테 가게 맡기고 나왔지.호호.. "

밖에서 딴짓을 일삼는 남편에게 일말의 기대감도 없다며, 자식들을 위해 살아간다던 여진이다.

" 별일이네, 그렇게 가게일에 열심이더니 어떻게 쉴 생각을 다했대.. "

" 나도 가끔은 충전을 해야지, 누구 좋은일 시킨다고 나만 고생을 하누.. "

영희를 나에게 떠 맡기고는, 자신과는 그저 친구처럼 편안하게 지내자던 여진이의 심사가 뒤틀려 있음이 감지된다.

" 자기가 여진이 기분 좀 풀어주면 안될까, 속상한 일이 있나봐.. "

의미심장한 여진이의 말을 친구인 영희가 받아 내 짐작이 맞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 남편은 어디다 써먹을려구, 이럴때 와이프 기분이나 풀어주지.. "

뻔히 알고 있는 일이지만 모르는척 하고 박사장에게 화살을 돌려본다.     

" 하이구 ~ 그 인간이 행여나.. "

열받는 일이 있었는지 소주잔을 들어 한입에 털어 넣는다.

" 오빠는..  애들 아빠땜에 속상해서 기분 풀러 나온 애한테.. "

영희가 그런 여진이를 보며 안타까워 한다.      하기사 방금전만 하더라도 수정이를 만나고 오지 않았던가.

" 내가 재주가 있어야지, 무슨 해결사도 아니구.. "

" 왜, 예전 애인이 불쑥 나오는 바람에 영희랑 데이트를 못할까봐 걱정이 되나 보네.. "

느물거리는 나를 편한 친구처럼 생각했는지 농담을 주고 받으며 한잔두잔 술이 늘어간다.

" 그럼, 걱정이지..  우리 영희랑 오랜만에 만나는건데.후후.. "

" 피 ~ 잘들 해보쇼..  누가 다리를 놔 줬는데, 은혜도 모르고.. "

갑자기 들이키듯이 부어댄 술에 취기가 오르는지 화장실에 가는 여진이의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럽다.

" 오빠, 왜 그래..  여진이 년 속이 말이 아닐텐데..  맘 좀 달래주지.. "

" 이렇게 웃고 떠드는게 도와주는거야, 달리 뭘 해줄게 있어야지.. "

" 저녁에 나가서 아침나절에 들어오는 날이 많아서 대판 싸웠다네..  가게문은 닫던지,말던지 하라구 남편한테 맡기고

나왔대.. "

 

빈 소주병이 얼추 다섯병이 넘었다.       영희도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에 모르긴 해도 여진이가 두병은 마신 폭이다.

기분이나 풀자며 영희가 여진이의 팔을 두르고 노래방으로 이끈다.

노래방에 가자마자 마이크를 붙잡은 여진이가 연신 노래를 불러 제낀다.

영희와 나에게 부르스를 추라며 밀어대고는 노래를 부르던 여진이의 눈가에 어느틈엔가 눈물이 가득 고여 있다.

여진이의 소리없는 눈물을 본 영희도 마음이 착잡한지 어두운 기색이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한평생을 일궈 나가는데 어찌 좋은일만 있겠냐마는, 어느쪽 한사람의 부도덕한 바람끼로 인해

단란했던 가정이 엉망이 되는걸 종종 보게 됐었다.

주위에서 가끔씩 불협화음으로 인한 파탄이 나는걸 보면서 주제넘은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어차피 행복한 가정을 유지하기 어렵다면 자신은 물론이지만 가족들을 위해 빠른 결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이혼을 하든지, 배우자의 잘못을 너그럽게 이해를 하던지 양단간에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세상이 변했다.    행복하게 살아야 할 인생을 자식들을 위한답시고, 예전 노인들처럼 숙명으로 받아 들이고 아깝게

흘려 보낸다는건 내 정서하곤 다르다.

그렇다고 새인생을 찾으라고 이혼을 조장하는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인생을 보다 소중하게 여겼으면 하는 바램이다.

1시간을 혼자서 마이크를 잡은 탓에 어느정도 술이 깼는지 노래방에서 나가 맥주라도 한잔 더 하잔다.

지하 노래방에서 나와 어느곳으로 가야할지 두리번 거리는데, 여진이와 얘기를 하던 영희가 다가온다.

" 오빠..  괜찮으면 우리집으로 가서 마셔도 될까.. "

" 셋이서 같이? "

" 응, 아무래도 여진이를 혼자 놔 두는게 불안해서.. "

어차피 영희랑 밤을 지새기 위해 나왔더라도 여진이까지 동행을 한다는게 맘에 걸렸지만, 마음의 상처를 안고있는

여진이를 내칠수는 없었다.

 

" 오빠 먼저 샤워해..  여진이는 안방으로 들어가구, 내가 옷 꺼내 줄께.. "

아파트 입구에서 사온 술과 안주를 비닐봉투에서 꺼내 거실탁자에 올려놓던 영희가 나를 욕실로 밀어넣는다.

샤워기에서 떨어지던 따뜻한 물줄기를 차가운 물로 바꾸었다.       시원한 물이 머리부터 몸 전체를 감싸자 술기운이

깨기 시작하면서 팔뚝에 소름이 돋는다.

항상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영희에게 몸보시라도 해야겠다고 나왔다가, 여진이의 아픔을 외면하기 어려워 짧지는

않을 시간동안 그녀의 푸념까지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을 하니 솔직이 조금은 따분하다.

샤워를 끝내고 나가보니 산뜻하게 정장을 차려 입었던 두 여자의 옷차림이, 집에서 살림을 하는 아줌마 패션으로

바뀌어져 있다.

통이 넓은 펑퍼짐한 치마에 반팔티를 입은 모양새가, 시내에서 마주했던 조금전과는 완연히 다른 모습이라 새삼

아줌마들의 화장술에 감탄스러움마저 생긴다.

" 야 ~ 완전히 속았네, 내가 이런 아줌마들과 술을 마셨단 말이지.후후.. "

" 그럼 내 나이가 몇갠데, 집에서라도 편하게 있어야지.호호.. "

" 미안해, 오빠.. 난 그냥 아무생각없이.. "

두 여자의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난 시점이다.       여진이가 털털하고 편안한 성격이라면 영희는 남자를 받드는게

몸에 뱄는지, 그간에 맨살을 섞었을때마다 먼저 일어나 화장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농담을 듣고도 아무렇치 않게 주워섬기는 여진이에 비해, 부끄러운듯 어쩔줄 모르는 영희다.

" 괜찮어, 농담이야.. 앞으로도 그냥 편하게 입어.. "

그제서야 얼굴이 펴지며 웃음이 감도는 영희다.       사실, 여자 스스로 자신의 태도를 조신하게 취하는게 어찌보면

이쁘게 보여서 좋긴 하지만, 편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까지 탓하는건 남자의 도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가볍게 맥주를 마시는 사이, 두여자가 번갈아가며 샤워를 하고 나왔다.

여진이가 먼저 샤워를 하고 나왔는데, 브라까지 벗었기에 반팔티위로 젖꼭지가 선명하게 도드라져 보인다.

" 어때요, 영희 참 착하죠..  앞으로도 부탁해요.. "

욕실로 들어간 영희를 들먹이는데, 아까와는 달리 존대까지 하는게 술이 많이 깬듯 싶다.

" 친구로 지내자면서 존대는.. 나 불편해, 그냥 말 놓자구.. "

" 그럴까, 그럼..   진짜 친구처럼 맞먹어야지.호호..  야 ~ 태성아 술 한잔 따라주라.. "

셋이서 새벽 2시경까지 웃고 떠들며 술을 마시고는, 피곤하다는 여진이의 잠자리를 봐 준다고 딸이 쓰던 방으로 들어갔던

영희가 다시 나왔다.

" 저기, 오빠..  오늘 여진이 좀 안아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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