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 배고프다, 소영아.. "
오후 2시쯤 성미집에 도착하니 소영이가 친구와 같이 반긴다.
" 제주도에 다녀 오셨다면서 식사도 못했어요? "
제 친구 정민이와 조리학원에 다니겠다는 소영이 때문에, 아침 비행기로 서울에 와서는 이곳저곳을 알아봐야 했다.
전날 저녁에는 은근히 대시를 해오는 미숙이를 달래느라, 밤새 술을 마시며 잠을 설쳤기에 피곤함이 더 했다.
" 우리 아빠가 한번 뵙고 싶대요.. "
소영이 친구인 정민이다. 사랑하는 자식이 뭔가를 새로이 배우겠다는데 무심하게 지나칠 부모는 없을것이다.
" 그래, 아빠한테 내 핸폰번호를 가르쳐 드려라.. 급하게 알아보니까 일주일에 한두번만 가르쳐 주는곳이 있더라..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가서 배우면 되겠더라구.. "
" 어머 ~ 잘됐다, 매일 다녀야 되면 힘들텐데.호호.. "
제 엄마 대신 식탁위에 찬거리를 올리는 소영이가 좋아서 어쩔줄을 모른다.
" 처음부터 욕심은 내지말고 일단 너희들한테 맞는지부터 보자꾸나.. "
지금이야 친구와 더불어 시간을 보내게 됐으니 염불보다는 잿밥에 더 관심이 있을 나이지만, 혹여 조리학원에
다니는 것이 적성에 맞는다면 구체적인 뒷받침이 필요할 것이다.
지켜본 바로야 소영이는 손재주가 있어 가능성이 있어 보이지만 친구인 정민이는 어떨지 자신할수가 없다.
" 정민이 엄마도 음식솜씨가 좋아, 김장김치가 얼마나 맛있는데.. 외할머니한테 배운거래.아빠.. "
벌써 내가 걱정하는게 뭔지를 알고 있다는 소영이다. 저만한 나이에 깊은 속내를 갖기도 쉽지 않은데, 아마도
제 에미인 성미보다는 죽은 제 아비를 닮았는지도 모르겠다.
" 그렇다면 다행이네.. 어쨋든지 니네 둘이 친하니까 서로간에 도움이 많이 될게다.. "
" 요즘에 정민이랑 인터넷 카페 '맛있는 세상'에 가입도 했어요, 거기 보면 이쁜 레시피가 많더라구.. "
배우기도 전에 의욕이 생기는지 자랑부터 한다. 동감이라도 하는듯 정민이도 고개를 끄덕인다.
" 그렇게 하나씩 취미를 붙이면야 좋지.. 맛있는게 있으면 만들어서 아빠한테 맛도 보여주고.."
" 안그래도 아빠가 좋아할만한 술안주가 있나 뒤져 본다니까.히히.. "
붙임성이 많아 누구에게나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아이다. 나부터도 소영이의 하는짓이 기특해 보인다.
" 앞으로는 우리 막내딸 덕에 무슨 안주를 먹을까 고민하지 않아도 되겠네.후후.. "
" 말밥이쥐 ~ 기대해도 좋아요.. "
" 나야, 집으로 갈까.. "
~ 지금 밖인데.. 1시간 후에 오면 되겠네.. ~~
소영이와 얘기를 나누고 나와서 인숙이에게 핸폰을 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알콩달콩 서로에게 빠져가는 중에, 일방적으로 생각할게 있다면서 당분간 기다려 달라던 그녀였다.
새록새록 정이 쌓여가는 시점에서 그녀가 심경에 변화를 일으킨 이유가 궁금했지만 참을수 밖에 없었다.
결혼을 전제로 남자가 생기거나, 자신과의 만남이 부담되어 자제를 하려 한다든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가능성에
대해 머리를 굴려 봤지만 속 시원한 답을 얻을수는 없었다.
어차피 인연으로 맺어지기 위해 만난 사이는 아니지만, 이유도 모르는체 그녀를 멀리 해야 함에 있어 마음이 개운치
못한것은 사실이다.
남는 시간의 무료함을 달래려고 근처에 있는 백화점에 들려 매장을 기웃거렸다.
신사복 매장이나 아웃도어 매장을 둘러 보면서 쓸데없이 시선만 줄 뿐이었지, 하등 머리속에는 들어 오지도 않는다.
쥬얼리 매장을 지나치는데 진열장 속에 나란히 늘어선 목걸이가 눈에 들어온다.
" 뭐 맘에 드는거 있으세요.. "
매장 안쪽에 있던 여자가 다가와 미소를 띤다.
" 이 목걸이.. 펜던트 소재가 뭔가요.. "
십자가로 된 펜던트가 차분하니 마음에 와 닿는다.
" 실버죠, 직접 수공해서 그런지 요즘 인기가 많아요.. 선물하시려나 보다, 사모님이 좋아하시겠네.호호.. "
사십이 채 안돼 보이는 여자가 주인인 듯 살가운 척을 한다.
" 가격은 얼마나 할까.. "
" 줄이 18k니까 23만원이예요, 하나 포장해 드릴까요.. "
인숙이 목에 어울리지 싶은데, 마침 똑같은 것이 세개다.
" 세개 모두 포장해 줘요, 따로따로.. "
성미와 미진이에게도 한개씩 줄 요량이 생긴 탓이다.
" 사모님이 세분.. 어머 ~ 죄송해요.. "
생긴대로 푼수짓을 한다. 누가 데리고 사는지 모르지만 남편되는 친구가 속깨나 끓이겠다.
남태령으로 가는 야산 중턱에 개나리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잔디가 허옇게 퇴색된 겨울에 이집을 처음 왔으니 그만큼 시간이 지났으리라.
대문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니 '찡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인터폰 화면에 뜬 내 모습을 봤으리라.
현관문을 열고 나오는 인숙이와 마당에서 마주쳤다.
아직 날씨도 쌀쌀한 편인데 칠부바지에 반팔티를 입고 있다. 긴 생머리를 뒤로 묶은 인숙이가 싱싱해 보인다.
" 어서와, 선배.. "
" 오랜만이네.. "
할말이 많지 싶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거실로 올라가니 주방쪽에서 맛있는 냄새가 풍긴다.
" 저녁 차리는 중인데.. 조금만 기다려요.. "
" 밥은 천천히 먹으면 되고.. 양주 있으면 한잔 줘.. "
나무로 만든 쟁반에 다니엘과 아몬드를 가져와 거실 탁자에 내려놓는다.
" 이거 한번 해볼래.. "
바지 주머니에서 포장한 목걸이를 꺼내 건넸다. 나머지 두개는 상의 안주머니에 미리 갈무리를 한다고 했지만
조금은 불안한 생각이 든다.
반팔티를 입어서인지 목걸이를 걸자 안 그래도 시원한 목선이 더 이뻐 보인다.
" 잘 어울리네.. "
내가 선물을 하고 자찬을 한 꼴이지만 워낙에 인숙이에게는 안성마춤이다.
" 선배가 처음 준건데.. 잘 간직할께.. "
언더락스 잔 하나에 양주를 붓고 얼음을 넣더니 나에게만 건넨다.
" 왜, 같이 마시지.. "
" 별로 땡기질 않네, 미안하지만 혼자 마셔요.. 그래도 되지.. "
술을 마실줄 아는 인숙이다. 마셔도 그냥 마시는게 아니고 상대편을 편하게 하는 주법이 몸에 밴 여자다.
주량도 웬만한 남자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이고, 같이 마시면서 분위기를 띄울줄도 아는 여자인 것이다.
" 할수없지, 뭐.. "
잔을 들어 한모금을 마시고는 인숙이를 바라봤지만, 나에게 할말이 있다고 한것에 대해선 전혀 내색도 않는다.
" 선배한테 딸이 하나 있다고 했지, 지금 몇살이야.. "
" 가만있자, 나하고 25살 차이니까 지금 25살이지.. 근데 갑자기 딸 나이는 왜.. "
" 그냥.. 선배 닮았으면 술도 잘 마시겠네.호호.. "
" 그야 그렇지, 대학 들어가서 신입생 환영회를 했을때도 남자 선배들까지 모두 보내 버렸다고 자랑을 하드라구.. "
다른건 몰라도 술을 마시는 예법만큼은 딸애에게 몇번이나 강조를 했던 터다.
맘에 맞는 친구들이랑 술을 마시게 되면 그들이 집에까지 안전하게 가는지 잘 챙겨주라고 누누이 얘기를 했었다.
" 나하고도 잘 맞겠다, 언제 한번 같이 마셔봤으면.. "
" 그야 어려운 일도 아니지만, 웬만해선 내가 잘 안불러.. 걔 입장에서는 노인네랑 술 마시는게 무슨 재미가 있겠어.. "
" 선배.. 나 애기 가졌어.. "
처음엔 무슨 뜻인지 느낌이 오지를 않았다. 전혀 상상도 못했던 얘기를 듣고 한동안 멍하니 있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