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생각없어

아무생각없어 47

바라쿠다 2012. 4. 12. 11:42

" 그렇게 된거였구나.. "

태성이가 조금은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솔직한 얘기를 해주고 싶었다.        처음부터 사람을 믿는다는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웬지 태성이를 믿고 싶은 영희다.

더군다나 남자와의 관계를 끊은지 10 여년만에 쾌감을 일깨워 준 사람이다.

" 여진이가 그랬어, 오빠가 평소 꿈꿔 왔던 이상형이라구.. "

" 뭘, 이상형씩이나..  여진이도 어지간히 눈이 나쁘네.후후.. "

" 걔가 마음 고생이 많었어, 신혼이 지나고부터 남편하고는 사이가 벌어진 채로 살아 왔거든.. "

10 여년이나 외롭게 독수공방을 한 침대를 뜨거운 열기로 가득 채워 준 태성이다.

그 에게는 깊은 속내를 드러내 놓고 위로를 받고 싶었다.      

여진이가 나에게 태성이를 의도적으로 소개시켜준 이유를 얘기해 줄 참이다.

" 첫 아이를 가진 후에야 대책없이 밖으로만 나도는 남자인줄 알았지만, 홀아비로서 여진이를 애지중지 키워 낸 친정

아버지땜에 이혼은 꿈도 꾸지 못했구.. "

" 여진이도 겉보기와는 많이 틀리네.. "

사실 똑부러지는 여진이를 보면, 고민을 안고사는 여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여진이의 내면이 썩을대로 썩어 문들어지고 있었던걸 친구인 나에게는 가끔씩이나마 털어놓기도 했다.

" 제일 친한 나도 걔가 첫아이를 낳고 난 다음에 알았으니까.. "

" 하기야 예전에는 참고사는게 미덕인줄 아는 시절이 있었지, 우리 모친만 해도 그러셨으니까.. "

" 여진이도 그럴수밖에 없었어, 홀아버지가 어렵게 딸 자식을 키워 결혼까지 시켰으니 그 양반을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오랜시간을 참고 살아야 했어.. "

" 허어 ~ 제법일세, 의지가 굳은 여자네.. "

" 생전의 남편이 지방으로 발령이 나는 바람에 여진이와 오랫동안 소식을 끊고 살다가, 내가 이쪽으로 이사를 오는

바람에 다시 만나게 됐지.. "

 

한편의 아침 드라마처럼 영희의 얘기는 잔잔하게 계속 이어졌다.

오랜만에 나타난 영희를 친구들이 반긴다고 여진이의 가게에서 모임을 가졌더란다.

술좌석이 끝나고 거나하게 취기가 오른 영희를 여진이가 남편에게 데려다 주라고 했는데, 그만 박사장이 혼자 사는

영희를 덮치려고 했단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집에서 취업준비를 하던 딸이 들어오는 바람에 위기를 모면했지만, 그 뒤로도 수시로 집 근처에

와서는 핸폰을 했다고 한다.

도를 넘어가는 박사장의 행동을 여진이에게 알릴수 밖에 없었는데, 영희의 옆에 남자가 있으면 못된 자신의 남편도

어쩔수 없을거라면서 나를 소개한 것이란다.

" 그 친구나 나나 바람둥인건 똑같은데, 나를 어떻게 믿누.후후.. "

" 정말 그러네.호호..   여진이가 그러더라구, 다정다감한 남자라 욕심이 나길래 사귀고 싶었는데 웬수같은 남편이 나를

괴롭히는게 자신의 잘못이란 생각이 들어서 할수없이 양보를 한다고.. "

참말로 박사장과 나와는 전생에 무슨 인연이라도 있었지 싶다.      찰거머리같은 수정이를 잠시나마 떼어내 준 셈이고

영희같이 순수한 여자를 나에게 보내준거나 진배가 없지 않은가.

" 이 여자들이 자기들 멋대롤세, 내가 무슨 물건이야..   내 허락도 없이 누구한테 양보를 한다는건지,원.. "

" 정말 그러네.호호..  오빠한테 허락도 안 받고 우리들 마음대로 팔고 산 꼴이 됐네.호호.. "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웃음을 참지를 못하는 영희다.

" 그만 웃고 이리와, 영희가 대신 맡은 물건을 써 먹어야지.흐흐.. "

 

" 이제 그만 일어나요, 해가 중천에 떳는데.. "

영희가 부산스럽게 깨우는 바람에 눈을 떳다.

간밤에 영희의 뜨거운 몸을 식혀 주느라 새벽녘이 돼서야 잠이 들었다.

" 왜, 잠 좀 더자게 놔두지..  아침부터 무슨 약속이 있는거야? "

" 그게 아니고, 매트리스를 갈아야겠어..   비닐이 덮힌걸로.. "

유난히 분비물이 많은 자신땜에 어제밤만 하더라도 두번이나 시트를 갈았던 영희다.

시트를 갈았는데도 축축한 느낌이 들었던 이유가 매트리스까지 젖었기 때문이다.

영희가 시트를 갈아 세탁기에 넣는동안 거실쇼파에 앉아 TV를 보며 빈둥거려야 했다.

" 아침은 뭘로 해줄까, 국물이 있어야지.. "

베란다에서 세탁기를 만지던 영희가 거실쪽으로 고개를 내민다.

" 그러지 말고 갈비탕이나 사 먹자구.. "

갑자기 여진이와 그 남편이 떠올라 우리를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다.

" 갈비탕..  어디서, 여진이네를 간다는거야 지금? "

" 그럼, 쇠뿔도 단김에 빼랬는데..   팔짱을 끼고 들아가 보자구.. "

긴가민가 하는 영희를 재촉해서는 부랴부랴 택시를 탔다.      거리가 멀어서 점심시간에 맞추려면 서둘러야 했다.

 

집안 정리도 못한 영희를 앞세워 부산을 떤 덕에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에 여진이의 가게에 도달할수 있었다.

바쁜 점심시간이라 박사장이 카운터에 앉았고, 여진이는 손님들의 테이블을 누비는 중이다.

영희의 팔을 잡고 현관에서 신발을 벗는데, 박사장과 눈이 마주친 순간 움찔하는게 내 손에까지 전해진다.

종업원의 안내에 따라 작은 골방에 앉아 기다리자 여진이가 들어선다.

" 어머 ~ 어제밤에 둘이 같이 있었던거야.호호..   옷을 보니까 니네 집에서 잤구나.. "

" 눈치 하나는 빠르네.후후..   그나저나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더니 배가 무지무지 고파.. "

" 그러게, 밤새 얼마나 몸부림을 쳤는지 신랑 눈이 쏙 들어갔네.호호.. "

" 아이 ~ 기집애가 못하는 소리가 없어.. "

" 얘 ~ 저 웬수 표정 못봤지, 어떤 남자하고 니가 왔다고 나한테 알려주는데 얼굴표정이 볼만하더라.. "

통쾌한 마음이 생기는지 연신 즐거움을 감추지 못하는 여진이다.

" 이리로 오라고 해봐, 와이프 친구 애인이 왔는데 통성명이라도 해야지.. "

 

" 반갑습니다, 말씀 많이 들었네요.. "

" 네, 반갑습니다. "

남자답게 허우대도 있고 잘 생긴 얼굴이다.      굳이 흠을 꼽으라면 눈매가 삼각형이라 다소 약아 보인다는 점이다.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네자 마지못해 손을 내민다.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 싶다.

자기가 쫒아 다니는 수정이가 내 여자고, 자신의 바람끼를 못 마땅해 하는 여진이가 영희와 나 사이에 다리가 되어준걸

알게 된다면 어떤 표정이 될지 사뭇 재밌어진다.

" 이 집 고기가 맛있다고 우리 영희가 자랑을 하길래 같이 왔죠, 바쁘시지 않으면 가볍게 맥주라도 하십시다.. "

여진이가 수정이보다 두살이 어리다고 했고, 박사장은 수정이와 동갑이라고 했으니 나보다는 다섯살이 아래다.

불고기를 구워 맥주를 마시면서 의도적으로 영희의 어깨를 감싸기도 하고 손을 잡고는 애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바쁜 가게일이 대충 마무리가 됐는지 여진이까지 들어와 자리를 함께 했다.

" 진작에 만나뵐걸 이제야 오셨네.호호..  오늘 드시는건 내가 사는거니까 많이 드시고 가세요.. "

여진이가 한쪽 눈을 찡긋대며 내 잔에 맥주를 부어준다.

" 그럴수야 있나, 우리 영희를 생각해서도 내가 팔아 드려야지.. "

일부러 영희의 어깨를 감싸고 토닥여 주었다.      순간적으로 박사장의 얼굴이 벌레씹은 표정이 되었다 사라진다.

" 아니라니까요, 어디 영희가 나하고 그런거 따질 사인가.. "

" 그냥 여진이가 시키는대로 해, 오빠 ~ "

영희도 은근히 애정을 담은 표정으로 내 무릎에 손까지 얹는다.

" 그럼, 그럴까..  대신 나중에 더 맛있는걸로 보답을 해야겠네.. "

" 어머 ~ 진짜죠.호호..  비싼걸로 바가지 씌워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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