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짜로 그 여자 건드릴거야? "
문여진과 헤어지고는 모처럼 휴식을 취하고 있을 미진이의 집으로 왔다.
늦은 시간이지만 '이차선 다리'가 쉬는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모처럼 얼굴이 싱싱하다.
조금전에 만난 여진과의 얘기를 들려줬더니 촉각을 세우고 내 의중을 살피고자 한다.
" 글쎄, 별다른 느낌은 없는데.. 앞으로 어떨지는 나도 잘 몰라.. "
" 아무리 그래도 오빠가 좀 심한거 같애, 그냥 잘 됐다고 생각하고 지울수는 없어? "
수정이가 내 곁에서 떨어져 나간다고 좋아했던 미진이가, 나에게 또 다른 인연이 생길지 몰라 질투 하는걸로 들린다.
" 별반 다른 느낌은 없다니까 그래, 그런식으로 나를 옭아매지 말어.. 안 그래도 골치가 아픈데.. "
" 그럼 난 뭐야, 오빠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술 장사까지 하고 있는데, 오빠가 다른 여자한테 눈길을 주거나 말거나
목석처럼 못본척 하라는게 말이 되니? "
기어코 눈가에 물기가 어리며 격한 감정을 드러내는 미진이다.
미진이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맞는 소리겠지만 내가 자신하고 결혼이라도 할 처지는 아니다. 저 자신도 그런 기대를
하지 않겠노라고 하고선 날더러 어쩌란 말인지 모르겠다.
더군다나 수정이를 내 여자라고 생각진 않았지만 다른 남자에게 그녀를 도둑 맞았다는 일말의 생각이 들던 터라,
그 남자의 와이프인 여진이를 어찌해 보겠다는 호승심이 은연중에 이는것도 사실이다.
" 그 여자랑 사귀겠다는 얘기도 아닌데 왜 과민하게 반응을 하냐구, 그리고 수정이와 어찌되든 내 옆에 있는다면서..
그런쪽으로 마음쓰면 너만 손해야, 제발 부탁인데 나 좀 가만히 내버려 둬.. "
어차피 미진이도 제 남편이 이혼을 해주지 않아 나와 인연이 되고파 했던걸 없던일로 치부하고, 가끔씩이나마 보자고
했다.
성미와 합치게 되더라도 미진이 만큼은 가끔씩 만나려고 했었다.
이런식으로 내 사생활에 끼여 든다면, 아무리 마음이 아프더라도 만나선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 나 이만 간다, 여자가 눈물 흘리는건 딱 질색이야.. "
나하고 같이 살 사람이라면 미진이의 기분을 달래주는게 도리겠지만, 어차피 해답이 없을진대 마주앉아 고문을 당하기는
싫었다.
뒤통수가 뜨거웠지만, 마음을 독하게 먹고 미진이 집을 뒤로 했다.
미진이와 오랜만에 밤을 지새러 갔다가 찝찝한 마음의 부담만 안고 자정이 넘은 시간에 그곳을 나오고 보니 마땅히 갈만한
곳이 없다.
인숙이가 궁금해 핸폰을 해 보려다가 그녀의 의견을 존중해 참기로 했다. 무슨 고민이 있어 오랜시간을 두문불출
하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으나 남자 체면에 가볍게 보이기는 싫다.
성미나 소영이도 내일부터는 바쁘게 일주일을 시작해야 하는지라, 밤늦게 가기도 뭣해서 집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아파트 입구에서 택시를 내렸는데 일요일에는 문을 열지 않던 '아지트'의 간판불이 켜져있다.
" 어쩐일이냐, 이 시간에.. "
초희와 둘이 붙어 앉아 있던 민식이가 먼저 아는척을 한다.
" 너야말로 어쩐일이야, 지금쯤 집에 있을 시간이잖어.. "
" 술 한잔 드릴까.. "
민식이 옆에 붙어 앉아있던 초희가 아무일도 없었던것처럼 자리에서 일어선다.
먹고 노는것 같지만 나름대로 바쁜 친구다. 더군다나 성격이 보통이 넘는 와이프가 집에서 기다릴텐데, 월요일을
맞는 시간에 이곳에 있다는게 뜻밖이다.
" 동창들 모임에서 놀러갔어, 동남아로.. 수요일이나 돌아온다네.흐흐.. "
" 그래 ~ 좋겠다.. 맘 놓고 바람필수 있어서.후후.. "
" 같은 말이라도, 참.. 너 친구 맞냐, 기왕이면 로맨스라고 해라.. "
" 허이구 ~ 잘났다.. 그게 불륜이지, 로맨스냐.. "
민식이와 말을 주고 받는중에 출입구 문이 열리더니 '이차선 다리'에 나가기 시작한 미숙이가 들어선다.
" 어서와라.. 빨리도 왔네, 기집애.호호.. "
주방에서 술과 안주를 챙기던 초희가 반긴다.
" 가까운데,뭐.. 우리 사장님은 너무한다, 여기서 술 드시면서 나 좀 부르지.. "
제 자리인양 스스럼없이 내 옆에 붙어 앉는 미숙이다.
" 사장은 무슨, 닭살스럽게.. 모처럼 집에서 쉴일이지, 뭐하러 나와.. 미숙씨도 어지간히 술을 좋아하나봐.. "
나를 꼬셔 보겠노라며 초희한테 장담까지 했다던 말이 떠 오른다.
" 그럼 오빠라고 부를까.호호.. 부모를 잘 만난 덕에 웬만하면 술에 지는일은 없네요.. "
초희와 같이 언더락스 잔에 양주를 붓고 얼음까지 띄워서는 잔을 부디치잔다.
" 근데 내가 온지 10 분밖에 안된것 같은데.. "
아무리 가까워도 여기까지 오려면 10 분으로는 어림도 없는 시간이다.
" 니가 올줄은 모르고 내가 불렀다, 왜.흐흐.. "
민식이가 느물거리며 웃는다. 옆에 앉은 초희도 덩달아 웃으며 우리쪽을 쳐다본다.
" 사실은 민식이 오빠가 미숙이를 부르라고 하더라구, 제주도에 같이 가자고 오빠를 꼬셔보라고.. "
" 같이 가자, 너랑 같이 공치러 간다고 해야 알리바이가 생기지.. "
바람끼 많은 민식이를 남편으로 둔 덕에, 호시탐탐 행선지를 체크하는 와이프의 눈을 속이려는 것이다.
" 니가 뭐가 이쁘다고 알리바이까지 만들어 주는데.. 니 와이프한테까지 욕먹기 싫어, 임마.. "
머리가 단순해서 툭하면 자신의 와이프한테 빌미를 줄때마다 내가 총대를 메곤 했다.
그나마 무슨 연유에선지 중간에 내가 나서면 못 이기는척 넘어가 주는 와이프를 보더니, 이제는 대놓고 내 핑계만을 대는
친구놈이 뻔뻔해 보인다.
" 그러지 말고 같이 가요, 나도 원님덕에 나팔좀 불게.. 요즘, 안 하던 일을 하느라고 힘든데.. 내가 사장 오빠면
그 정도는 해 주겠다,뭐.. "
은근히 팔장까지 끼며 애교를 부리는 미숙이다.
" 그래요, 웬만하면 같이 가요.. 미숙이도 오빠 때문에 거기를 나가는 건데, 이 참에 바람이라도 쐬 줄겸.. "
초희까지 셋이서 작당을 하고 나를 몰아세운다. 하기야 미진이 때문에 마음도 편치 않던 참이다.
" 너 이번이 마지막이야, 나중에 초희랑 있는걸 들켜도 난 모르는 일이야.. "
못 이기는체 받아 주기로 했다. 안 그래도 평상시보다 바쁘게 생활한 덕에 나 역시도 휴식을 취하고자 했다.
" 내일 나가서 토요일날 쉴거라고 미리 얘기해야지.히히 ~ "
미숙이도 덩달아 좋은지 단숨에 술을 들이키고는 그 잔을 내 앞으로 내민다.
아마도 수요일인듯 싶다. 때아닌 비가 추적이는 오후에 아무도 없는 성미집에서 빈둥거리는데 문여진이에게서
메시지가 들어왔다.
~ 오늘 저녁에 술 한잔 할래요.. ~~
갈비집을 하는 여진이 저녁시간이 빈다는게 이해가 되질 않아 핸폰을 들었다.
" 무슨 일이래, 장사는 어쩌구.. "
~ 오늘 친구랑 약속이 있어서 남편한테 가게 봐 달라고 했어요.. ~~
수정이를 꾀어낸 박사장에게 은근히 승부욕이 생기던 참이다.
" 먼저처럼 나이트 가려구? "
~ 그건 아니구, 나랑 제일 친구가 있는데.. 아마 그날 봤을걸, 단발머리에 빨간색 바바리를 입고 나왔던.. ~~
기억이 난다. 갸름하니 고운 턱선에 깊은 눈매가 인상적인 친구가 유독 나를 빤히 바라보곤 했다.
" 어디로 가면 될까.. "
~ 그 친구집이 안양이라 사당동에서 보기로 했는데.. ~~
" 알았어, 이따가 보자구.. "
집에서 가까우니 천천히 움직여도 될것이다. 이제 두번째 만남이라 여진이에 대해 더 알아야 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