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생각없어

아무생각없어 37

바라쿠다 2012. 3. 23. 12:06

'이차선 다리'로 출근하는 미진이를 바쁜일이 있다고 먼저 보낸후 인숙이와 약속한 라이브 카페로 향했다.

사당사거리에 있는 7080 카페는 초저녁이지만 통키타를 멘 여자가수가 무대 위에서 감미로운 노래를 불러대고 있다.

구석 테이블에서 손을 든 인숙이의 모습이 눈에 띈다.       가운데는 단체석이고 외곽쪽으로만 연인들이 데이트를

하게끔 작은 테이블들이 놓여있다.

" 늦어서 미안해, 학교에서 일찍 끝났나 봐.. "

" 아냐, 선배.. 나도 온지 얼마 안돼.. "

미리 생맥주를 시켜놓고 노래를 듣고 있었는지 2000짜리 피처가 절반 가까이 비워져 있다.    

말 한마디지만 상대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배려가 이쁘다.

" 조금만 더 늦었으면 맛있는 안주까지 없어질뻔 했구만, 그래.후후.. "

" 심심하지 않았어, 저 가수가 조금전에 심수봉 노래를 부르더라구.. "

항상 밝은 얼굴이지만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보인다.     밖에서 만나 맛있는걸 먹고 싶다던 그녀다.

" 맛있는걸 먹고 싶다더니.. "

" 선배가 백수라서 그냥 참기로 했어.호호.. "

" 어 ~ 우리 망아지가 완죤 무시를 하네, 내가 얼마나 캡 짱인데.. "

키가 커서 다리까지 육상선수의 그것처럼 늘씬해 경주마 대신 망아지로 애칭을 삼기로 했다.

" 참, 됐네요..  그런 말 쓴다고 어리게 봐줄줄 아나보지.. 노력은 가상하네.호호 ~ "

" 에고 ~ 눈치챘네..  그저 늙으면 갈데는 한군데밖에 없다더니.. "

" 솔직이 얘기 해봐라, 선배..  나랑 있으면 회춘하는것 같지.. "

" 윽 ~ 이렇게 나이 많은 망아지가 머리까지 지 멋대로네.후후.. "

인숙이와 있으면 한없이 편해지는 느낌이다.     나이차가 10년이나 나건만 서로의 생각까지 맞아 떨어진다.

" 근데, 선배..  나 좋은일이 생길것 같애, 축하해 주라.. "

유달리 밝아 보이던 이유가 있었지 싶다.      그녀한테 좋은일이라면 나도 나쁠리는 없지 않은가.

" 무슨 일인지 알아야 같이 기뻐하지, 뭐야 좋은일이라는게.. "

" 아직은 잘 몰라, 확실하게 되면 얘기해 줄께.. "

피처를 두개나 비우고 인숙이 집으로 가고자 했건만 한사코 가게일을 보라며 등을 떠민다.

 

인숙이가 택시를 타는걸 지켜보고는 '이차선 다리'로 가려다 수정이와 박사장이 떠올라 문득 심통이 난다.

오랜만에 집에 가서 모친의 얼굴이라도 볼 요량으로 반포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아파트 입구에서 택시를 내려 방앗간의 참새처럼 '아지트'를 그냥 지나칠수가 없었다.

" 웬일이래 오빠가, 한참 장사를 할 시간이잖어.. "

장사를 하고 있어야 할 시간에 내가 들어서자 무척이나 반긴다.      '아지트'에 손님이 없는 탓이기도 할게다.

" 미숙이가 얘기를 안하는 모양이네, 장사하는 시간에 가게에 남자가 있으면 안되지.. "

" 걔도 시시콜콜 떠벌리는 걸 싫어해, 그나저나 장사가 잘 된다는 얘기는 들었지..  나도 그런 장사나 해볼까.. "

요즘에 '아지트'의 매상이 시원치 않은지 다른곳에 눈을 돌리는 초희다.

" 초희하고는 안 맞을걸, 누구랑 같이 엮이는걸 싫어하잖어.. "

" 어머 ~ 오빠 족집게다, 언제 내 성격까지 파악을 했누.호호.. "

같은 술장사라도 혼자서 하던 사람들은 종업원들을 데리고 장사하기가 힘든법이다.        일하는 스타일이 맞지가

않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손님의 기분을 가장 많이 알고 있다고 착각을 하는 경우가 많다.

종업원이 손님의 시중을 들어줘도 자기가 하는것보단 양에 차지 않기 때문이다.       수정이나 미진이처럼 종업원이

하는대로 맡기는 것에 비하면, 자신을 도와주는 종업원들까지 관리를 하려 들기 때문에 더 힘들수밖에 없다. 

" 뭘, 그런걸..  그나저나 오늘은 민식이가 안 보이네.. "

" 어머 ~ 어떻게 알았대..  민식이 오빠가 매일 이곳에 들리는걸 오빠도 모를거라고 알리지 말라고 했는데.. "

손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다.     제 놈이나 초희가 숨긴다고 모르겠는가.      민식이나 초희도 어쩌면 비슷한 성향을

갖고 있지 싶다.     

눈앞에 내 보이지 않아도 짐작을 할수 있는일이 어찌 그것 뿐이겠는가.

" 니들 두사람은 차라리 솔직한게 더 어울리는 사람들이야, 내 눈엔 민식이가 숨쉬는 것도 다 보여.. "

" 오빠, 돗자리 깔아야겠다.호호..   글쎄 큰 비밀도 아닌데 오빠가 알면 안된다나.. "

어릴때부터 처음 만난 여자들에게 날리는 작업 멘트라는게, 서로의 비밀을 간직하게끔 바람을 잡던 친구다.

별것도 아닌걸 숨기는 척 여자의 호기심을 자극해서, 둘만이 같은 비밀을 공유하는 것처럼 착각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 초희는 좋겠다, 은근한 비밀이 많은 남자가 목을 매고 있으니.후후.. "

" 좋긴, 나야 매상을 많이 올려주는 사람이 좋지.. "

그래도 인간성은 나쁘지 않은 친구야, 잘해봐.. "

보지 않아도 뻔한 장면이 떠 오른다.      민식이는 매일이다시피 와서 술을 팔아주며 초희한테 작업을 걸 것이고, 초희는

그런 일련의 작업들을 받아 주는척을 하며 속으로는 술값을 계산하고 있을 터이다.

" 오빠는 내가 친구하고 썸씽이 있어도 괜찮은가 보지, 웬지 섭섭하다.호호.. "

" 얘가 무슨 흰소리를..   행여 양다리는 걸치지 마라, 나는 그런 여자 별로거든..   초희가 먼저 나를 홍두깨로 생각했잖어,

나랑 사귀어 보겠다고 꼬신건 아니였지, 아마.. "

여자들은 모른척 하고 들이대는데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다.       일단 자신은 맘에도 없는데 남자가 꼬시기 때문에

할수없이 넘어갔다는 식이다.      

그런 편리한 사고방식이라면, 세상의 모든 유뷰녀들도 모두 애인이 있을게고 사고가 터졌을게다.

차라리 맘에 들어서 어찌 하다보니 꼬심을 당했다고 하면, 내가 부족해서 그런가 싶어 더 잘해 줄지도 모르겠다. 

원래 끼가 있는 여자가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하는 식이니 가소로운 일이다.

" 피 ~ 아무리 그래도 오빠가 맘에 드니까 우리집까지 구경을 시킨거지, 나도 남자보는 눈은 있다구.. "

" 글쎄, 그걸 고맙다고 해야 하는진 모르겠지만 어차피 인연이 될수 없는건 초희도 알고 있잖어..   민식이도 좋은 친구야,

너무 애 태우지 마라.. "

이쁜걸로 치면 초희도 만만치 않은 편이다.      민식이가 마음에 둔 미진이는 은근하게 남자를 끌어 들이는 매력이 있지만,

초희는 어릴적에 학생잡지 모델을 했을만큼 눈에 띄는 미인형이다.

" 내가 아무리 술장사를 하지만 그렇게 가벼운 여자는 아니네요.. "

내 귀엔 작은 선물에는 옷을 벗지 않겠다는 말로 들린다.     민식이가 초희와 엮어져서 새로운 활력이 생기는건 좋은

일이지만 너무 빠져서 마냥 퍼다 줄까봐 내심 걱정이다.

" 됐어, 나이가 한두개도 아니고 서로가 알아서 하라구.. "

어차피 내가 나서서 왈가불가 할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군다나 민식이야 내 안테나 반경안에 있으니 지켜 볼일이다.

" 근데, 미숙이는 어떻게 됐어.. 요즘 오빠한테 목을 매고 있던데.호홋 ~ "

솔직이 미숙이와 어찌 해보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이럴때 조심해야 한다.      초희가 미숙이와 어찌 될른지 촉각을 세우고

흥미를 보이고 있다.     

이럴경우 여자들이 예민해 하는것 중에 하나가, 그 남자에게 누가 먼저냐로 소유권을 따지기 때문이다.

미진이만 하더라도 수정이가 먼저 나랑 사귀고 있었기 때문에 수정이 눈치를 봐야 한다.

" 어쩌긴, 뭘..   그저 도와주는게 고마울 뿐이지,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서 마음이 편할리는 없고.. "

" 조금전에 미숙이에게 전화가 왔길래 오빠하고 술 마신다고 얘기했는데.. "

" 쓸데없이 그런걸 알려주고 그러냐, 집에 들어가기 전에 가볍게 한잔 하려고 왔는데.. "

" 미숙이가 웬만해선 그러지 않걸랑, 겉으로 보기엔 야하게 보일지 몰라도 남자보는 눈이 까다로운 애야.. "

결국 '이차선 다리'에서 무슨 핑계를 댔는지 일찍 퇴근을 한 미숙이가 들이닥쳐 같이 술을 마셔야 했다.

들어서자 마자 내 술잔까지 새로 만들며, 딴에는 즐거워 하는데 싫은 내색을 보일수도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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