멤버들이 집들이를 한다고 모인 일요일이다.
배가 불러 힘들다고 중국 음식과 함께, 반찬가게에 부탁한 갈비나 나물들로 대신하기로 미리 양해를 구한터다.
거실에 큰상을 펼치고 음식을 나르는것도 영호와 멤버들이 대신 해 주느라 집안이 활기에 넘친다.
지연이까지 엄마 친구들의 심부름을 하며 일손을 돕고 나섰다.
" 지연이는 좋겠다, 새 아빠덕에 학교에서 석차가 많이 올랐다며.호호.. "
바로 옆동에 살면서 제일 늦게온 막내 소연이가 지연이가 들고온 나물 접시를 받으며 아는척을 한다.
" 내가 열심히 해서 그런거지, 이모는.. 둘이서 데이트 하느라고 내 공부는 뒷전이라니까.히힛.. "
요즘 들어 영호를 놀려먹는 재미에 흠뻑 빠진 지연이다. 그만큼 영호가 자신을 이뻐해 주는걸 아는것이다.
연주까지 오랜만에 얼굴을 보여 다섯명의 멤버와 영호, 지연이까지 웃고 떠들며 식사를 했다.
식사를 대충 마치고는 배달된 음식 접시들을 정리하고 작은상으로 바꿔서 간단한 과일과 내린 커피를 내 놓자,
지연이는 친구들과 만나기로 했다며 이모들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놀러 나갔다.
자연스레 서로의 근황을 묻는중에 그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던 연주의 일상이 가장 궁금했다.
" 집에서 나온지 좀 됐어, 지금 논현동에 있어.. 당분간 운동하러 오기 힘들거야. "
결국 남편과 별거하기로 하고 간단한 짐을 꾸려 논현동쪽에 오피스텔을 얻었단다.
" 어쩌면 그쪽에서 작은 매장을 하나 할지도 몰라.. "
며칠동안을 머리를 식히면서 여러가지 앞일을 걱정하던 차에 승우가 장사를 해 보라고 했단다.
마침 근처에 승우가 아는 친구의 건물이 있어 가게터를 정하고 숙녀복을 하는 회사들과 접촉중이라고 했다.
돌아가며 궁금한 점을 물어보면서 연주의 근황에 관심을 가졌다.
자유롭게 즐기며 살고 싶어했던 멤버들이, 연주가 처한일이 큰 데미지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특히나 막내인 소연이는 자유롭게 살아온 자신의 삶이 한순간에 무너질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처음으로 실감이 나서,
근신을 하며 집밖으로 나다니는 것 조차 삼가고 있었다.
자신의 행동을 시아버지가 눈치를 채고는, 경고를 하는 뉘앙스를 풍기는지라 전전긍긍하는 중이다.
만에 하나 자신의 불륜이 드러날 경우 어떤 결과가 올지 뻔한 일이기에 숨죽이고 있어야 했다.
명근이와 갑용이가 수시로 메시지를 날리며 유혹을 했지만, 그전처럼 나다닌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어쩌다 한가한 낮시간에 명근이와 갑용이를 따로 만나 식사를 한적은 있지만, 사실 그것마저도 맘이 졸여서 불안한
만남일수 밖에 없었다.
워낙 자유분방하게 자신의 삶을 누리던 소연이가 창살없는 감옥에 갇힌 심정으로 지내고 있는 중이다.
" 그러면 승우씨가 많이 도와줬겠다. "
맏언니인 정희도 멤버중의 하나인 연주의 힘든 변화에 마음이 편할리가 없다.
같은 동네에 살면서 남편끼리도 일면식이 있는터라, 조만간 자신의 행동에도 제약이 따를수밖에 없는 것이다.
권위적인 남편과 살아오면서 보통의 여자들이 겪듯이, 그저 순종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살아온 지난날이다.
우연찮게 휘트니스에 나가 연주와 소연이의 자유스런 모습을 보고는, 그동안 구세대인 자신이 얼마나 바보스럽게
살아왔는지를 절감하고, 처음으로 외간 남자와 애뜻한 교감을 통해 젊은 시절에도 가져보지 못했던 풋풋한 연애의
감정을 키워왔다.
그러던것이 그 남자 와이프의 견제로 인해 할수없이 애뜻한 감정을 접어야 했지만, 와이프를 여윈 명수를 만나 새로운
사랑을 느끼게까지 됐는데, 그만 연주의 사건으로 지속적인 행복이 끝날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침울한 요즈음이다.
" 이번에 깨달은게 많어, 남자라는게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야.. 사실 그동안 승우씨가
나한테 잘하는걸 알면서도 어느정도 무시를 하고 가볍게 대했던건 언니도 알거야.. "
거실 탁자에 놓인 커피를 한모금 마신 연주가 말을 잇는다.
" 승우씨가 물질적으로 나한테 도움을 줘서가 아냐, 엊그제도 자신만 바라보지 말고 증권회사에 다니는 명수씨라도
만나 울적한 기분을 달래라고 얘기를 하더라.. 어차피 내 모든걸 책임져 주지 못하는 입장이니까, 다른 남자라도
대신 내 기분을 풀어주기만 한다면 자기는 이해하겠다구.. "
모두의 시선이 연주에게로 쏠리며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다.
" 그래서 알았어, 승우씨야말로 나를 진짜로 좋아하는구나.. 어떤 남자가 자신이 이뻐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하고
만나는걸 지켜보겠어.. 어찌보면 영호씨도 미진이를 그만큼 좋아하는게 아닌가 싶어서 다시 보이더라.. "
직접 당한 일로 인해 많은 심경의 변화를 겪은 연주답게, 자조섞인 투로 털어놓는 얘기가 모두들의 가슴에 찐한 그
무엇을 심어주고 있다.
" 그냥 여자의 몸에만 관심이 있는 남자와, 그 여자의 정신까지 이해를 하려드는 남자는 하늘과 땅만큼 큰 차이가
난다는걸 이번에 알았어.. "
" 제가 잘은 모르지만 미진씨하고 있으면 맘이 편했어요, 총각시절에 만났던 여자들하고는 좋은감정이란건 생긴적이
없어서 미진씨를 놓치기 싫더라구요.. "
미진이 옆에 붙어 앉아 얘기만 듣던 영호가 불쑥 끼어든다. 아마도 남자들의 마음을 대변해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 그거야 형부가 눈이 낮으니까 그렇죠,호호.. "
소연이가 질투가 난다는듯 영호를 놀리고 있다.
" 너, 말 다했니.. 우리 영호씨가 얼마나 눈이 높은데, 거기에다 머리까지 좋은건 어쩌구.. "
" 그래, 이번에는 막내가 잘못했어.. 임산부 앞에서.호호.. "
짐짓 삐진척하는 미진이의 말에 모두가 맞장구를 쳐준다.
너무 늦으면 임신부인 미진이가 힘들겠노라고 모두들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성미의 가게에서 연주의 집이 가까워 지는 바람에 같이 택시를 타고는 성미의 가게로 향했다.
가게의 영업이 끝날 시간이 되어 일하는 사람들만이 청소를 하며 정리를 하는 중이었다.
" 언니말이 일리가 있어, 나도 요즘 고민중이야.. 가게에 오는 손님중에 두사람이 자꾸 눈치를 주면서 밖에서 만나자고
하는데 두사람의 느낌이 전혀 틀려서 고민이야.. "
두사람이 가게 안쪽에 있는 내실에서 커피를 타서는 마주 앉았다.
" 그런일이 있었어, 이제 너도 혼잔데 좋은 사람을 만나야지.. 이번일로 느낀게 많아, 너무 능력만 보지마라.. 너도
알겠지만 경제력은 부족해도 변함없는 사람이 좋은거야.. "
" 그거야 나도 알지, 하지만 사람일이라는게 나중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어찌 아누.. 애 아빠만 하더라도 그런식으로
경제사범이 될지 누가 짐작이나 했겠수.. 사람만 좋다고 내가 먹여 살린다는것도 그렇구.. "
졸지에 가정의 살림을 거덜내고 교도소에 갇힌 남편땜에 주위 사람들과도 왕래를 끊을만큼 힘든 시간을 보낸 성미다.
친정의 도움으로 갈비집을 내고는 경험없는 사업으로 인해 그동안 눈코 뜰새없이 지내왔다.
다행히 일찍 자리가 잡히는 낌새가 보이자 자신도 모르게 외로움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던 차에 손님으로 들락거리던 두 사람이 혼자 사는걸 어찌 알았는지 꾸준하게 데이트 신청을 하기에 이르렀다.
근처에서 건물을 하나 갖고서 편안하게 세를 받아 생활하는 홀애비로 나이는 성미보다 많긴 하지만 비교적 안정되게
보이는 최사장과, 봉고차를 끌고 근처 음식점에 식자재를 납품하는걸 호구지책으로 삼는 유사장이 그들이다.
" 일단 두사람을 만나봐, 남편이 있으면서도 못된짓을 한 나같은 년도 있는데 너야말로 자유스러운 몸 아니냐..
급하게 결정할 일도 아닐텐데 미리부터 걱정을 사서 한다니.. "
어느새 그렇게 꼿꼿하던 연주의 입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표현까지 스스럼없이 내 뱉는다.
" 글쎄, 그게 힘들어.. 언니도 알다시피 내가 어디 한눈 팔 사람이유, 맘에 와 닿는 사람은 있는데 너무 능력이 없어
보여서 걱정이야.. "
이런저런 얘기로 시간을 보내는데 승우가 와서는 연주를 벤츠에 태워간다.
그들이 떠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성미는, 여자의 인생을 왜 뒤웅박 팔자라고 했는지 어렴풋 느끼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