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 없어, 빨리해요.. "
결혼식 날이다. 새로 이사한 집에서 마지막 매무새를 가다듬는데 새신랑인 영호가 보챈다.
" 그래, 엄마. 제발 적당히 해라.. 원래 여자가 나이를 먹으면 화장발이 잘 안 먹는거야.히히.. "
딸년까지 지 엄마를 놀리면서 즐거워 한다. 늦은 나이에 결혼이란걸 한번 더 하게 된 미진이지만 여느 신부처럼
예쁘게 보이고 싶은 것이다.
다행히 영호의 어머니가 간략한 결혼식을 허락해 주었기에 그나마 번잡스러움을 피하게 됐다.
종교가 없던 미진이 집과는 달리, 절에 다니시는 시어머니의 뜻에 따라 가까운 양재동의 절에서 결혼식을 하게 됐다.
시간이 갈수록 배가 불러 올것이기에 서두른 것이다. 신혼여행이라는 것은 아기를 낳은 후로 미루기로 했다.
아파트 계단을 내려가자 부모님과 시어머니가 나란히 서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 우리 며느리 참으로 곱구나, 뱃속에 있는 애기땜에 힘들텐데 고생이 많다. "
새집으로 이사를 하고서 살림살이를 꾸며 주신다고 자주 오셨던 시어머니다. 미진이 어머니와도 맘이 맞아 두 분이서
같이 다니며 혼수준비를 해 주셨다.
미진이는 영호의 친구가 운전하는 차로 지연이와 같이 타고, 미진이의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에는 두 분 어머니가 동승
하기로 했다.
양재동에 있는 절로 들어서자 낯익은 얼굴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오색 테이프로 치장한 차 앞으로 몰려온다.
영호의 아버지께는 결혼을 하기로 했다는 말씀만 드리고, 시어머니가 참관할 예정이니 서운해도 오시지 말라고 했다.
원체 숫기가 없는 사람이라 친구들도 적었고, 회사측에도 친한 사람 두엇만 초대를 했다.
미진이도 가까운 친척에게만 알리고 되도록 하객수를 줄였기에, 신랑신부측 손님들을 모두 합해서 30여명 안밖이다.
휘트니스에서 운동을 하는 멤버들도 참석을 했지만, 연주만은 경사스런 날에 악재가 낄수도 있다며 스스로 빠졌다.
맏언니인 정희는 애인인 명균이와 같이 자리했고, 소연이는 남편과 같이 오는 바람에 결혼식에 하객으로 온 명근이와
갑용이하고는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해야 했다.
주지스님께 전통혼례를 주관할 사람을 부탁 드렸고, 한복을 예복으로 대신할 만큼 간단한 예식을 치뤘다.
다행히 날씨가 춥질 않아 주차장 한켠에 광목천으로 된 천막을 치고 그 속에서 혼례를 올렸다.
혼례상을 사이에 두고 신랑신부가 마주서서 사회자가 시키는대로, 나름 진지하게 식이 진행됐다.
" 신부 ~ 배 ~~ "
사회자가 미진이에게 큰절을 시킬때, 친구인 성미와 소연이가 부축을 했다.
" 언니는 형부한테 또 큰절을 하네.후훗 ~ "
소연이가 자신의 겨드랑이를 부축하고 작은 소리로 속삭였을때, 옆에 있던 성미가 큰소리로 웃는 바람에 구경을 하던
하객들이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몰라 두리번 거리기도 했다.
미진이의 속사정을 아는 사람들만이 참석을 하는 바람에, 두 사람의 결혼식도 나름 진지한 축하의 자리가 됐다.
결혼식이 끝나고 간단하게 피로연을 한다고 성미의 가게를 빌려 손님들에게 식사를 대접했다.
양가의 친척들도 자리를 함께 해서 신랑신부의 절을 받으며 진심으로 축하를 해 주었다.
늦게까지 술을 마시는 사람들을 성미에게 부탁하고는, 집안 식구들은 새로 이사한 신혼집으로 모였다.
" 얼른 치마 저고리부터 벗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거라.. "
시어머니는 미진이가 힘들까봐 여간 챙기는게 아니다. 첫 만남부터 미진이를 아껴주는 마음을 보여 주었던 어른이다.
안방에 들어가 펑퍼짐한 임신복으로 갈아입고 식구들과 함께 거실에 둘러 앉았다.
" 이제는 사돈께서도 애들과 합치시는게 어떨런지요, 우리 딸애가 잘난건 없지만 어른만은 공경할겝니다. "
미진이 아버지가 안사돈에게 쓸쓸하게 계시지 말라고 몇번이나 말씀을 드렸었다.
남편도 없이 먼발치에서 커가는 핏줄을 지켜봐야만 했던, 영호 어머니의 외로움을 듣고 안 연후의 일이다.
" 그래요, 어머니.. 이제 장사는 그만 접으시고 저희들과 같이 지내세요. "
자신을 친 자식인 영호 만큼이나 아껴주시는 시어머니한테 정이 가는 미진이다.
" 나중에 나이가 더 들면 생각해 보마, 지금은 너희들이 재밌게 보내야 할 시간이야.. "
" 그래도 영호씨는 어머니랑 살고 싶어 하는데.. "
" 나중에 애기를 낳으면 귀찮아 해도 자주 올테니 몸이나 돌보거라.. 그때는 우리 며느리 손잡고 시장도 같이 가고,
음악회에도 같이 가자고 할테니.. "
그전에도 모시고 살겠다고 말씀을 드렸지만, 한사코 둘이서만 재밌게 살아 달라고 손을 내 젓던 영호의 어머니다.
지연이도 엄마를 닮아서 심성이 곱다며 자신의 친손녀인양 이뻐해 주고, 영호에게도 친딸처럼 돌보라며 신신당부를
하는걸 옆에서 지켜본 미진이다.
그럴수록 영호에게 더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고,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싶은 생각까지 드는것이다.
마음이 닿으면 진실이 통하는 법인지, 어린 지연이마저 새로 생긴 할머니가 맘에 드는 눈치다.
그도 그럴것이 며느리의 남색 저고리를 지으면서 지연이의 한복도 겸하게 되었는데, 멀리서 두 차례나 다녀가시며
얼굴에 어울리는 한복감을 골라주는 정성을 보여 지연이가 감동을 했을 정도다.
손수 지어주신 남색치마와 노랑 저고리를 입고서 친할머니에게 자랑을 하러 가기도 했다.
부모님들의 입장에서도 나이많은 자신을 품어 준 영호를 딸의 평생을 책임질 사위로 이뻐하기도 하지만, 따뜻하게
자신들의 딸과 손녀를 보듬어 준 안사돈의 성품에도 저으기 안심을 하면서 잘 받들어 공경을 하라고 말씀하셨다.
주무시고 가라고 붙잡아도 며느리가 피곤해서 힘들거라며, 며칠후에 또 오시겠다는 말씀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아니게 아니라 긴장을 한 탓인지 만사가 귀찮고 눕고 싶을 뿐이었다.
영호가 자신이 초저녁부터 침대에 눕는걸 보고는, 지연이와 함께 저녁을 먹는다며 바로 근처인 처가집으로 간 덕에
깊은 잠에 빠질수 있었다.
" 벌써 일어난거야? 엄마가 피곤해 한다고 삼촌이 더 있다 가재.. "
꿀맛같은 휴식을 취했는데 문득 옆이 허전해서 잠에서 깨어났다. 시간이 벌써 10시가 넘었는데 영호와 지연이의
모습이 보이질 않아 친정으로 온 것이다. 항시 영호의 가슴에 안겨서 잠이 들던게 어느새 버릇이 된 미진이다.
" 삼촌이 뭐냐, 이제부턴 아빠라고 해야지.. "
영호와 같이 거실에서 매운탕을 곁들여 술을 드시는 아버지가 지연이를 나무란다.
" 놔 두구려, 어색해서 금방 고쳐 지겠수.. "
주방을 오가며 안주를 챙겨주는 어머니가 지연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 궁금해서 건너 왔어요, 지연이가 내일 학교를 가야 할텐데.. 아빠도 약주 좀 적당히 드세요, 먼저도 탈이 나셔서
엄마가 얼마나 놀래셨는데.. "
" 몇잔 안 마셨다, 오늘이 결혼식인데 우리 사위가 신혼여행도 못 간게 마음에 걸려 한잔 하는중이지.. 그렇지 않은가.. "
술을 마시는 이유를 사위 때문이라고 방패막이로 삼을만큼 영호를 마음에 들어 하는 아버지다.
짧은 시간에 처가집 식구들의 사랑을 받을수 있는게 영호의 장점일수도 있겠다. 아무리 위장술이 뛰어난 사람
일지라도 가식적인 행동과 말은 마음에 와 닿지 않는 법이다.
그런점으로 봐서는 타고난 태생이, 상대편에게 호감을 안겨주는 영호에게 마음이 끌린 부모님이다.
미진이 자신부터가 영호를 처음 만났을때 그런 편안함을 느끼고 믿게끔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 많이 안 드셨어, 내가 심심할까봐 기분만 맞춰 주신거야.. "
영호까지 나서서 장인의 입장을 대변하고, 그런 두사람의 뻔한 거짓말을 흐뭇하게 바라보시는 어머니다.
전 남편과는 이렇게 마음을 열고 식구들과 어울린 기억이 별로 없다. 그저 말로만 번지르하게 마누라와 처가집에
자신의 사람됨을 과장되게 포장을 했고, 부모님들은 그저 들어 주는척만 했을 뿐이다.
" 빨리 가요, 지연이도 학교에 가야하고 영호씨도 출근할 준비를 해야지.. "
의례 남자들의 직장생활은 스스로 알아서 하는것이고, 가장으로서의 역할도 미진이의 맘에 들건, 말건 그러려니
하고 살아온 지난날이지만, 이제는 완전히 뒤바뀐 미진이다.
한 순간도 영호와 떨어지기 싫은것이다. 가능하면 눈앞에 두고 하염없이 지내고 싶은 여자가 돼 버렸다.
" 그래, 이제 그만들 하시고 건너가도록 하라구.. 나도 피곤해서 쉬고 싶구나. "
자신의 딸이 변한걸 알고 계신 어머니다. 그 전과는 달리 사위의 사랑을 먹고 사는 딸이 대견해 보인다.
늦은 나이에 아기를 갖고서도 표정이 밝아보여서 보기 좋다고까지 하셨던 친정 엄마다.
서운해 하는 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 지연이를 앞세워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