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좀 전에 회사에서 왔다갔어, 웬만하면 자기네 메이커로 결정해 달라고 하더라.. "
오피스텔에 따라 올라온 승우가 숙녀복 매장오픈에 대해 연주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 조건들이야 다 비슷하니까 결정하기가 그렇네, 그보다도 내가 거기에 빠져 잘 할지 자신이 없어.. "
진심을 말한 것이다. 막연하게 시간을 보내는게 싫어 승우의 제안을 넙죽 받았다가, 나중에 싫증이라도 나면 손해만
끼치고 문을 닫을까 싶어 걱정이 되는 것이다.
" 또 그런다, 연주가 하는일 없이 시간만 죽이면 마음속에 을화병 생겨.. 뭐가 됐든 하는일이 있어야 잠시나마 속상한
생각들을 머리속에서 지우지.. 아무리 장사가 안된들 자네의 웃음에 비할까.. "
" 먼저도 나 땜에 그 인간한테 천만원이나 줬잖어, 오빠한테 너무 미안해서 그래.. "
" 그냥 있을때 나눠 쓰는거야, 성격이 대찬 사람이 그까짓 걸 마음에 담고 그러냐.. 그만큼 약해진거야, 연주가.. "
맞는 말이다. 남편의 횡포를 참기 어려워 별거라는 제스처를 취하고 집을 나왔지만, 갑자기 바뀐 생활에 쉽게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나마 옆에 승우마저 없었다면 더 큰 후유증을 앓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 알았어, 오빠가 시키는대로 해볼께.. "
" 진작에 그럴일이지, 너는 웃는 모습이 이뻐.. 나한테 자주 보여주면 좋겠다.후후.. "
" 피 ~ 그거야 오빠가 여자 보는 눈이 낮으니까 그렇지.. "
" 이렇게 이쁜 연주가 옆에 있는데 아무려면 어떠냐.흐흐.. "
저렇게 자신만을 바라보는 승우를 그동안 만만하게 보고 아무렇게나 대했던 연주다. 요즘들어 승우에게 새삼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 에그 ~ 웃는게 꼭 모자른 사람처럼 그게 뭐야.호호.. 그나저나 집에 들어가야잖어.. "
" 우리 연주를 두고 벌써 들어갈수야 있나.. 걱정하지마, 내가 알아서 할께.. "
" 늦어도 되면 나 좀 재워주고 가, 혼자 있어서 그런지 요즘에는 잠이 오질 않아.. "
오피스텔에 온 이후로 부족한 가재도구며 전자제품까지 골라주며 자신을 챙겨준 승우다. 하는일이 없는 졸부같아
보여도 나름대로 처리할게 많은 사람이다. 입이 무거워 속내를 비추지 않아 그렇지, 자신과 있는 시간만큼 더 바삐
움직여야 했을 것이다. 그런 고마운 생각에 승우의 품에 안겨 잠들고 싶은 것이다.
같은 시각에 성미는 갈비집의 문을 닫고는, 음식점에 부식재료를 납품하는 유사장과 호프집에 마주앉아 있었다.
두어달을 지켜 봤지만 변함없는 성실함을 지녔고 나이도 동갑이라 편하게 생각하던 터이다.
근처에서 가게세를 꽤나 걷어들이는 건물주 이사장도 성미에게 눈독을 들이곤 했지만, 두사람중에 유사장을 먼저
만나기로 작정을 하고 개인적으로는 처음 대면하는 날이다.
" 뭐를 좋아하세요, 맘에 드는걸로 시키죠.. "
통닭집에 있는 안주라야 뻔한데도 처음 데이트하는 여자에게 선심을 쓰듯 한다.
" 그냥 유사장이 알아서 시켜요, 어차피 비싼 양주 마시는 곳도 아닌데.. "
주인에게 소주를 시키고 안주로 후라이드 통닭을 시키는 유사장을 보며, 고기집을 하는 자신과 와서는 닭고기를 시키는
그가 꽤나 융통성이 없는 사람으로 보인다.
" 유사장님한테 애는 없나요.. "
성미도 키우는 아들이 있기에 제일 먼저 홀로 있는지 궁금한 것이다.
" 딸이 하나 있죠, 이제 중 3 인데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곤 해요.. "
" 우리 애보다는 두살이 어리네요, 이제 고 2 니까.. 그래, 공부는 잘 한대요.. "
" 웬걸요, 날 닮아서 그런지 형편없어요.후후.. "
" 그런데도 웃음이 나와요, 나중에 대학이라도 가야 할텐데.. "
" 어쩌겠어요, 자신의 인생인데.. 나를 봐도 대학을 나온거와 성공하는 거랑은 거리가 먼게 확실한데.. "
" 그래도 나중에 자식한테 원망을 듣지 않으려면 뒷받침을 잘해야지, 아빠라는 사람이.. "
아무래도 둘 다 학부모 입장이라 화제거리가 애들쪽으로 흐르고 있다.
" 요즘엔 그것도 정답이 아닐걸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너도 나도 대학을 가는 세상이라 졸업을 해도 뚜렷한 직장을
잡기도 어렵지만, 다행히 좋은직장에 들어간다고 해서 그 아이의 인생이 장미빛으로 펼쳐 지는건 아니죠.. "
목이 마른지 옆에 놓인 냉수를 들이키는 유사장이다.
" 나도 인생관이 많이 바뀐 탓입니다. 그 아이가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 뭘까를 고민하고 있어요, 나같이 실패한 인생을
겪게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이끌어 줘야 할지 목하 연구중이죠.후후.. "
쓸쓸하게 웃어 넘기는 유사장에게서 많은 회한이 묻어난다.
" 참, 애엄마랑은 왜.. "
" 글쎄요, 내가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겠죠.. 나는 원래부터 큰 돈엔 욕심이 없던 사람입니다, 먹고 사는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는데도 애 엄마는 자꾸 욕심을 부리더군요.. 그 욕심에 맞춰 사업을 확장하다 보니.. "
" 그럼, 사업이 부도나서.. "
" 그게 다는 아니고, 뭐랄까.. 좋은 아이템이 있는데 자기가 직접 해 보겠노라고, 주위 친척들한테까지 급전을 빌려서
일을 벌렸는데 그만 사기를 당했어요, 그 뒤로 빚쟁이들이 집으로 들이닥치고.. "
본인도 많이 속상할텐데 자꾸 묻게 되고, 더불어 어두운 터널을 지나면서도 열심히 살아간다는 생각도 든다.
" 그 정도면 애엄마도 사는게 어려울텐데.. "
" 애엄마는 피신해 있고 애만 외가집에 맡겼어요, 내가 매달 생활비를 부쳐주고.. "
" 내가 너무 쓸데없는걸 물어봤네요, 유사장님도 힘들텐데.. "
" 다 지난 일이죠,뭐.. 이제 그 얘기는 그만하고 술이나 마시죠, 괜히 사장님까지 우울하게 만든것 같아요.후후.. "
자신과 상관이 없다는 투로 얘기를 하지만 듣기에는 외로움이 절절이 배어 있다.
" 너무 멀리 가지마, 금방 들어가야 해.. "
갑용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셋이서 바람쐬러 가는중이다.
" 알아, 멀리가고 싶어도 안된다는거.. "
운전을 하는 갑용이가 뒤를 돌아보며 씽긋이 웃어준다.
오랜만에 둘이 뭉쳤다고 얼굴이나 보여 달라는 메시지가 왔었고, 소연이 역시 두 애인을 보고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이들과 함께 하게 된 것이다.
" 걱정하지마, 아무리 욕심이 난다고 소연이를 곤란하게야 하겠어.. "
뒷좌석에 나란히 앉은 명근이가 자신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
올림픽 대로를 벗어난 차가 강화도로 가는 편도 1 차선 길로 접어들면서 철책선 너머로 한강이 흐르는게 보인다.
그간에 시댁에서 두문불출하며 외출도 못하고, 몸가짐을 조심했던 터라 바깥의 풍광이 한결 자유로워 보인다.
한동안 강변길을 달리던 차가 48 번 국도로 접어 들더니 강화대교를 건넌다.
강화대교 옆에 돌로 축성한 문화재인 갑곶돈대라는 성곽으로 들어가 차를 세웠다.
돌로 쌓은 성곽위로 오르니 굽이쳐 흐르는 한강이 내려다 보이고, 시원한 바람마저 불어와 두 애인의 말을 듣고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마저 든다.
갑갑했던 집안에만 있다가 탁 트인 바깥으로 나오니, 어쩔수 없이 근신을 해야했던 조바심마저 풀어지는듯 하다.
" 오빠 ~ 나 커피 마시고 싶어.. "
성곽위에 기대고 바람을 쐬었더니 따뜻한 커피가 마시고 싶다.
" 잠시만 기다려, 금방 다녀올께.. "
갑용이가 멀찌감치 유적지 입구에 있는 커피 자판기 쪽으로 걸어간다.
" 갑용이가 그랬어, 소연이만한 여자는 찾기 힘들거라구.. 여자만 보면 껄떡거리던 녀석이, 요즘에는 그 재미도
시들해 졌는지 소연이를 기다리겠다나.후후.. "
멀리서 커피를 뽑고 있는 갑용이의 근황을 명근이가 대신 얘기해 준다.
" 피이 ~ 오빠는 아니라는 말로 들리네.. "
" 왜, 아니겠어.. 그렇지만 어쩌겠어, 보고 싶어도 참을수 밖에.. "
명근이와 갑용이의 애틋한 마음이 손에 잡힐듯 느껴진다.
" 사실 나도 오빠들이 많이 보고 싶었어.. 시간도 없는데 그만 가자, 오랜만에 오빠들이랑 지내고 싶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