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휴식같은 단잠에 취했었나 보다. 이불 너머로 벽에 걸린 시계가 11시를 가르킨다.
욕실에서 시원스레 오줌을 갈기고는, 코트 주머니에서 핸폰을 꺼내보니 메시지 2개가 와 있다.
~~ 늦잠을 자는 바람에 아침은 못 했어, 선배. 흉보지 말아요 ~
새벽 두시경에 와서 두번씩이나 뒤엉켰으니 인숙이도 피곤했을게다. 학교에 지각이나 안 했는지 모르겠다.
~~ 가게 가기전에 잠시 볼수 있을까요. - 미숙- ~
오늘부터 '이차선 다리'에 나오기로 엊저녁 소개를 받았는데 하룻밤 사이 무슨 변동사항이 생겼는지 걱정스럽다.
오늘 일진이 어떨지 챙겨보질 않았지만, 이불속에서 핸폰을 해야 했다.
~ 전화를 하려다 아직 주무실거 같아서, 사실은 걱정이 좀 되길래.. ~
" 왜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
~ 그게 아니고, 경험이 없으니까 잘 할수 있을까 싶어서 미리 얘기라도 들으면 어떨까 싶더라구요. ~
못 나온다는 얘기가 아니기에 일단은 안심이 된다. 잠시 생각하다가 경험이 있는 수봉이와 같이 만나는게 좋을듯
싶어 5시에 만나기로 했다.
수정이와 미진이를 마주친 자리에서 얘기를 하는것보단 나을듯 싶어서다.
학교 점심시간에 맞춰 인숙이에게 전화를 했다. 신호음이 두번도 울리기전에 인숙이의 밝은 목소리가 들린다.
~ 잠꾸러기.. 여자는 잠도 못자게 하고 누구는 쿨쿨 잘만 자더라.호호.. ~
" 그랬어, 피곤해서 세상 모르고 잤네.. 그게 다 인숙이 탓이야, 너무 이뻐서 그냥 놔 둘수가 있어야지.후후.. "
~ 호오, 그러셨어요.. 바람둥이라 듣기 좋은 소리만 골라서 하시네요.. ~
" 미안 해, 학교에 출근하는건 봐야 했는데.. 담부턴 조심할께. "
~ 됐네요, 그건 그렇구.. 소영이가 학교엘 안 나왔어요, 핸폰을 해도 받지를 않는데.. ~
뒤통수를 얻어 맞은 기분이다. 어제 저녁까지만 하더라도 아무런 일이 없었다.
" 나도 잘 모르겠네, 고뿔이라도 들었나.. 나도 핸폰을 해봐야겠는데.. "
~ 궁금하니까 알려주면 좋겠는데.. 그리고 술집은 영업이 끝날때까지 선배가 있어줘야 하는건가요? ~
너무 늦어서 자신의 생활패턴이 바뀌는걸 염려하는 눈치다. 뒤집어 말하면 어제처럼 잠이 부족하게 될까봐 사뭇
걱정을 하는 것일게다.
늦게까지 뒹굴면서 휴식을 취하고 싶었지만, 부랴부랴 대충 씻고 옷을 챙겨 입었다.
아무래도 막내딸 소영이가 걱정이 되어 편안하게 누워 있을수가 없다.
성미의 집에 도착해서 문을 열고 들어 가보니 소영이가 제 방에 있다가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거실로 나온다.
무슨 일인지 묻고 싶었지만 소영이가 스스로 얘기를 할때까지 기다려 보기로 했다.
" 우리 막내가 학교에 있어야 할 시간인데 웬일로 집에 있나, 오늘 쉬는 날인가.. "
한참을 내 눈치를 보면서 망설이던 소영이의 눈가에 눈물이 고인다.
" 어제 저녁 늦게 그 아저씨가 술이 취해 찾아와서는 엄마한테 행패를 부렸어, 엄마가 아빠한테 알리지 말라고.. "
성미가 자신의 인생을 윤택하게 만들어 보겠다고 택했던 남자가 찾아 왔었다는 얘기다.
어찌 알았는지 국밥집이 끝날때 쯤 찾아 왔는데 이미 술이 많이 취했더란다. 남들 보기가 창피해서 집으로 데려
왔는데 술주정이 심했고, 이미 끝난 인연이라고 돌아가라고 성미가 대들자 소영이가 보는 앞에서 손찌검까지 했단다.
소영이의 얘기를 듣고는 혈압이 올라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그런일이 있으면 즉시 연락을 했어야 했는데,
그저 내가 알게 되는것만 겁이 나서는 소영이에게 입을 봉하라고 했단다.
다른 남자들도 그런진 모르겠지만, 어릴때부터 싸움질을 하다가 힘이 모자라 내가 맞는것은 별로 대수롭지 않아도
내 여자가 무시를 당했다면 세상이 뒤집히는 한이 있어도 참지를 못했다.
물론 화를 내는것이 정당화 될수는 없겠지만, 내 여자를 지키는 일에는 목숨까지 걸어도 좋다는 각오는 지니고 살았다.
" 오늘 국밥집은 어떻게 한다고 하디.. "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소영이의 기분부터 살폈다.
" 장사는 해야 한다고, 아빠한테는 비밀로 해야 한다면서 조금전에 나갔어.. "
" 엄마한테 내가 왔다고 얘기하고 오늘은 장사 쉬라고 해라, 지금 당장 들어오랬다고 해.. "
성미가 가게문을 닫고 올때까지 안방에 들어가 생각을 정리했다. 생각같아선 놈을 찾아가 당장에 요절이라도 내고
싶었지만 어린 소영이가 지켜보고 있다. 울며 겨자먹기로 최대한 참을 인을 속으로 되뇌이기로 했다.
" 언제 왔어, 아침 차릴까.. "
안방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서는 성미가 눈치를 살핀다. 눈두덩이가 벌겋게 부어 올라있다.
" 왜 나한테 연락을 안했어.. 너와 그 친구 사이에 아직도 내가 모르는게 있다면 지금이라도 모두 털어놔"
조금 열린 문사이로 소영이의 모습이 언뜻 스쳐 지나간다.
" 털어 놓을게 뭐가 있어, 그런거 없어. "
미안한듯 고개를 숙이면서 목소리에 힘이 없다.
" 돈이 걸렸다거나 무슨 약점이 잡힌게 있다면 지금 말하라구, 마지막으로 물어 보는거야.. "
한번 나를 떠났던 여자다. 행여 나를 만나면서도 거짓이 섞여 있다면 두번 다시 볼 생각이 없음이다.
" 정말이라니까.. 원래 술이 취하면 주사가 있는 사람이야. "
" 그런게 없는데도 내 여자를 찾아와서 행패를 부렸단 말이지.. 그 친구 뭐하는 사람이냐.. "
일단은 성미의 말을 믿어 보기로 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내 여자한테 손찌검을 한 그에게 응분의 대가를
돌려줘야 한다.
그냥 참으면 내가 잠을 못 잘것이고. 술주정을 받아준 꼴이 된다면 이런일이 또 다시 생기지 않는다고 장담할수도 없다.
" ....동대문에서 옷가게를.. "
한참을 망설이다가 내가 끈기있게 기다리자 마지못해 입을 연다.
" 그 친구 핸폰이랑 가게 약도 좀 적어줘, 두사람 사이에 끼여들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내가 마무리를 해야겠다. "
나를 말리기 어렵다고 판단이 됐는지 주섬주섬 적은 메모지를 건넨다.
" 조심해.. 덩치도 크고 성격이 과격한 편이야.. "
나름 나를 걱정해주는 성미의 말에 조금은 화가 풀린다.
" 너나 조심해, 또 다시 소영이한테 이런 꼴을 보이면 두번 다시 안 볼지도 몰라.. "
누구한테도 지기 싫어하는 성미가 얼굴도 들지 못하는걸 보니 괜시리 짠한 마음이 된다.
새벽에 옷장사를 한다면 그 시간에 맞춰 찾아가야 할것이다. 일단 만나보고 어찌해야 할지를 결정할 생각이다.
볼일을 보기 위해 나가는데 소영이가 안방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가 나와 마주쳤다.
소영이의 큰 눈망울이 불안해 보인다. 엊저녁에는 소영이도 꽤나 놀란듯 싶다.
소영이의 손을 잡아 내 품에 안고서 어깨를 쓰다듬었다. 작은 어깨가 살짝 떨리는게 느껴진다.
" 우리 막내가 속이 많이 상했겠네, 내일 학교에 가거들랑 감기 기운이 있어서 쉬었다고 해라.. "
조금 이른 시간에 약속장소에 나갔더니 미숙이가 먼저와서 커피를 마시며 기다리고 있다.
딴에는 치장을 한다고 짧은 치마를 입고, 하얀점이 박힌 검은 스타킹을 신었는데 나름 섹시해 보인다.
입술에도 찐한 루즈를 발라 안그래도 색기가 흐르는 얼굴이 엊저녁보다 더욱 도발적으로 보인다.
얼굴이 아무리 이뻐도 색기가 흐르는 타입은 싫어한다. 주위에 남자들이 꼬여 귀찮은 일이 생기는 까닭이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가니까 그것이 편견이었음을 알게 됐다. 이쁜 여자들 중에는 머리가 단순한 여자들이 꽤
있는 편이다.
자기 중심을 지키는 여자들은 또 다른 남자를 자신의 남자가 알지 못하게 단도리를 하지만, 단순과의 여자들은 꼬여드는
남자들을 무슨 자랑인양 내 보이고 다니는 잘못을 범할 뿐이다.
그로인해 자신의 남자 앞에서 우월감을 뽐내고 싶어 하는진 모르지만, 그 남자가 자신을 가볍게 볼수 있음을 모를
뿐이다.
한마디로 멍청한 짓을 태연하게 하고 다닌다. 어찌보면 성미와 비슷한 점이 많은 미숙이다.
똑똑한 여자라면 자신의 남자만이 최고인양 우쭐하게 만들어 사랑에 눈 멀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여자가 미진이나 인숙이라고 보면 되겠다. 속으로야 진심인지, 가식인지 자신할수야 없지만 자신의 남자를
띄워주는 재주가 있는 편이다.
수정이는 이도저도 아닌 부류에 속한다. 그저 자신의 맘이 가는대로 표현하고 가지려고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