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지트'면 니네 집 앞에 있는 카페잖어, 널 찾는걸 보니까 벌써 길을 터 놨구만. "
" 그런거 아냐.. 여기 개업하느라 사람이 부족해서 부탁 좀 했어. "
워낙 떠벌이는 걸 좋아하는 놈이라 안심이 안된다. 더군다나 미진이에게 눈독을 들이는 중이라 틀림없이 말을 옮길
공산이 크다. 되도록 입조심을 시키고 싶은데 방법이 없다.
" 아니긴, 내가 너를 모르냐.. 모르긴 해도 엊그제 왔던 선생인가 하는 여자도 눈치가 이상하던데.흐흐.. "
" 글쎄,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리고 넌 왜 그렇게 입이 싸냐, 니 놈하고 은행을 같이 털고 싶어도 그 입 때문에
안하는거야. "
" 내가 언제.. 나처럼만 입이 무거우라고 그래라. "
" 입이 무거워서 우리 어머니에게 내가 결혼을 하고 싶어도 홀로 사는 어머니땜에 여자들이 싫어한다고 했냐? "
우리집에 놀러 왔다가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틈에 어머니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어서, 며칠동안이나 식음을 전폐하는
바람에 맘고생을 한적도 있다.
그것뿐이 아니고 딸애한테도 그간 사귄 여자가 한 트럭이 넘는다며, 자유롭고 싶어서 결혼하기 힘들거라고도 했다.
딸애한테 바람둥이로 찍혀서 여자 문제만큼은 지금도 신용이 없고, 지 엄마랑 이혼을 하게 된것도 순전히 내 잘못으로만
알고 있다.
" 그건 사실이잖어, 내가 없는말을 지어낸 것도 아니고.. 너를 좋아하던 성미도 그래서 너랑 헤어진거 아니냐구.. "
성미하고 만나는것도 알고 있던 민식이에게 헤어진 이유를 돈 때문이라고 알려주게 되면, 성미를 가볍게 볼까 싶어
이유를 둘러 댄것이 그렇게 오해가 생긴것이다.
지금도 성미를 다시 만난다는걸 알게 된다면, 미진이와 수정이 귀에도 들어 갈것이 뻔한지라 숨겨야만 했다.
" 그러는 너는 바른생활의 사나이라도 된다는 얘기네, 내가 니 와이프를 만나도 꺼릴게 없단 말이지.. "
" 얘가 왜 이러냐, 치사하게 내 약점이나 들추고.흐흐.. "
찔리는게 많은 놈인데도 말이 많은게 이해가 안된다. 내가 입이 무거운줄 아는 놈이니 그런 걱정은 안하겠지만,
나도 감정이 있어 가끔씩 화가 날때도 있는지라, 태평스런 놈을 대할때면 약이 오를때가 있다.
" 그러니까 입조심해, 남자 자식이 그렇게 입이 가벼워서 어디다 쓸래.. "
" 아무리 생각해도 알수가 없어서 그래, 너야말로 감시를 하는 와이프도 없는 자유인인데 그렇게 조심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니까.. "
그야말로 모르는 소리다. 여자들은 한결 같아서 지 남자가 남편이건 애인이건간에 자신만을 아껴주기를 바란다.
집에 남편을 두고도, 자신의 애인이 와이프한테 잘해 주는걸 싫어한다. 자신만의 소유도 아니면서 남편이나 애인을
자기 맘대로 요리하고 싶어한다.
심지어 아내가 사준 옷을 입었다고 하면 촌스럽다고 질투를 하고, 아내가 마련해준 보약을 먹었다고 하면 자신이
먼저 나서서 효능을 맛 보려고 한다.
옛말에도 본 마누라보다 첩이, 씨앗에 대한 질투가 더 심하다고 했다. 남자를 차지하려는 여자들의 소유욕은
임자가 있거나 없거나 다를바가 없는 것이다.
어쩌면 집에 있는 본처가 남편이 딴 여자를 만나는데 대해서, 오히려 더 너그러울수도 있는게 여자들의 심리다.
바람을 피다가도 언젠가는 집으로 돌아 온다는걸 믿는 것이다. 그에 비해 애인이 된 여자는 그 남자가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경우에 다시는 가까워지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수정이가 수시로 들락거리며 내 눈치를 보고 있다. 오늘 밤을 같이 보내고 싶어서 안달을 하고 있다.
미진이 역시 혹여 수정이와 같이 갈까봐, 나와 얘기라도 나누고 싶은데 같이 있는 민식이 때문에 애가 타는 모습이다.
나는 나대로 인숙이와 메시지를 주고 받고는 적당한 시간에 빠져 나갈 생각이다.
민식이가 화장실에 간 사이 미진이가 틈새를 노리고 들이댄다.
" 오늘 시간 좀 내줘.. 민식이 오빠가 자꾸 들이 대는데 미치겠어. "
" 안돼, 오늘은 집에 가야 해.. 그리고 민식이가 뭐라고 하길래 미치기까지 하냐.. "
내가 제일 싫어하는 거짓말까지 하게 된다. 앞으로도 수정이와 미진이로 인해 난관이 만만치 않을텐데 걱정이다.
" 이번 일요일에 놀러 가재, 올때 백화점에 들려 옷도 사준다면서.. "
나랑 있고 싶다는 핑계치고는 너무 약하다.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가 옷을 사준다고 날 격동시키고자 한다.
" 좋겠네, 이 참에 아예 밍크 코트라도 하나 건지면 되겠다. "
" 오빠 ~ 내가 옷이 없냐, 뭐가 없냐.. 자꾸 귀찮게 하니까 그러지.. "
" 니가 허점을 보이니까 그렇지, 쌀쌀맞게 대해도 그럴까.. 알아서 처신 잘해. "
" 오빠 친구니까 너무 야박하게 굴수도 없잖어. "
" 그럴수록 더 확실하게 해야지, 괜히 어영부영 했다가는 수정이까지 눈치 챌지 몰라.. "
점점 우려했던 일들이 현실로 다가 올까봐 걱정이다. 나중에라도 둘의 관계가 알려지면 무슨 낯으로 그들을 대할지
벌써부터 암담하다.
같이 있고 싶어하는 미진이의 맘을 모르진 않지만, 수정이와의 부채관계를 정리할때까지 만이라도 숨기고 싶다.
물론 그 후에도 미진이와 잘 되리란 보장은 없지만, 서로간에 헐뜯는 모양새까지 보고 싶지는 않은 까닭이다.
수정이에게도 핑계를 대고 가기 싫다는 민식이와 같이 '이차선 다리'를 나섰다.
미진이가 하도 귀찮다고 해서 다른곳에 가서 마시자며 반강제로 끌고 나온 것이다.
" 어머 ~ 너무 오랜만이다, 얼굴 잊어 버리겠네.. "
같이 들어선 민식이를 반갑게 맞아주는 '아지트'의 초희다. 나랑 올때마다 술값을 계산했던 민식이다.
가끔 기분이 좋을때는 내가 달아놓은 외상 술값까지 갚아주곤 했기에 곰살맞게 군다.
" 그러게 말이야, 친구가 얼마나 바쁜지 부르지도 않더라구.. "
" 흰소리 그만하고 술이나 마시자.. 남은 술 있으면 주고, 없으면 새걸로 하나 가져와. "
술이 취하면 또 어떤 소리를 지껄일지 걱정부터 앞선다. 초희도 내게 부담은 안 주겠다지만, 여자들의 말은 애초에
믿을수가 없다.
종래에 가서는 여자의 마음을 몰라 준다며 울고불고 하는게 그네들이다.
" 조금 남았는데 어차피 하나 개봉해야죠,뭐.. 안그래도 손님이 없어 적적했는데 나도 한잔 얻어 마셔야지. "
세팅이랄것도 없이 얼음통과 간단하게 치즈와 아몬드를 내 왔다. 초희가 각자에게 술을 따라주고는 건배를 한다.
" 누구 한사람 소개해 주려고 보자고 했어요, 나이는 39인데 30 초반으로 보이고 얼굴도 이뻐서.. "
" 그런 사람이 있으면 나한테 소개를 해야지, 아직도 이 친구가 날도둑인지 모르나 보네,흐흐.. "
적당히 눈치를 봐 가면서 해야 하는데, 여자만 보면 무턱대고 들이대고 본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중요한 자리에는
데려가질 않았다.
" 하여간에 침 좀 그만 흘려라, 넌 어째 매사가 작업이냐.. "
" 뭘 그래, 너보다는 양호한 편이지.흐흐.. 안그래, 초희씨? "
가뜩이나 조심성이 없는 친구가 술까지 마셨기에 안심이 되지 않는다.
" 글쎄요, 내가 그걸 어찌 알겠어요.. 그치만 여자들이 많이 따르게는 생겼지,뭐.호호.. "
손님의 기분을 맞춰 준다고 재밌는 쪽으로만 밀고 나가려는 초희다.
" 둘이 마음이 잘 맞네, 잘해 봐.. 그 친구는 언제 만날수 있는거야? "
친구놈의 실없는 짓을 말릴수도 없는지라, 포기하기로 마음을 다 잡고는 여기에 온 목적만 챙기기로 했다.
" 지금 오라고 전화할께요, 집이 서초동이라 금방 올수 있을거야.. "
" 솔직하게 말해봐라, 초희 건드렸지.. "
초희가 통화를 한다고 주방쪽으로 간 사이 민식이가 낮은 목소리로 묻는다.
" 아니라고 했잖어, 임마. 속고만 살았나.. "
믿을수 없는 민식이의 가벼운 입 때문에 속일수 밖에 없었다. 진실을 알려 준다면 모르긴 해도 내일이면 '이차선
다리'의 식구들도 모두 알게 될 것이다.
" 오늘 보니까 더 섹시하네.흐흐.. "
" 언제는 미진이가 맘에 든다며.. "
" 임자 없는 여자를 찔러 보는것도 잘못이냐? "
민식이의 레이다가 쉴새없이 움직이게 생겼다. 에구 ~ 먹을게 많아서 생각할 것도 많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