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떻게 보셨어요. "
영호가 먼저 나간후에 이여사가 어찌 생각하는지 궁금한 미진이다.
" 괜찮아 보이더라, 내가 젊었더라도 한번쯤 대시해 보고 싶을만큼.. "
" 어머니도, 참. "
기분좋은 어머니의 농담이 영호를 좋게 봤다는 뜻이기에 저으기 안심이 된다.
" 일단 네 아빠하고 의논을 해 보마, 니 복이 있다면 평생을 너만 아껴주며 살아가는 진실된 사람일텐데.. "
" 저도 그래요, 착한 사람이긴 하지만 나중에 맘이라도 변하면 어쩌나 싶기도 하구.. "
그랬다. 영호가 자신을 좋아하는것 못지 않게 미진이 자신도 맘이 끌리지만, 혹여 영호가 나중에라도 10년이나
연상인 자신에게서 마음이 떠날수도 있기에, 만의 하나가 염려스러운 것이다.
" 지연이한테 전화해서 오라고 해라.. 할아버지가 안 계실때 내가 슬쩍 떠 봐야겠다. "
" 애기를 낳아야 하는지도 자신이 없어요, 자꾸 맘이 흔들려요. "
" 지연이때도 그랬던것처럼 누구나 임신을 하면 나타나는 증상일게다. 모험이라기보다 좋아하는 사람의 분신이라
생각하거라. 그래야 애기한테나 너한테 좋을테니까.. "
세상을 살아온 연륜만큼이나 미진이에게는 보통의 어머니 이상으로 살아가는 지표가 되고 힘이 돼주신 분의 말씀이다.
그나마 혼자서 애 끓어 했던 문제를, 다행히 어머니가 덜어주는 덕에 얼마간이나마 마음의 안정을 얻게 되었다.
영호가 기다리고 있을 7080 호프집으로 가는중에 지연이에게 전화를 해서 할머니집으로 가라고 했다.
담배연기가 자욱한 7080 호프집의 무대 위에서는 이름모를 가수가 통키타를 치면서 이장희의 '그건 너'를 부르고 있다.
연주의 무용담을 듣느라 소연이가 두 애인 사이에 앉아 있고 영호가 연주옆에서 생맥주잔을 들고있다.
" 그걸로 끝날줄 아는 모양인데, 어림도 없는 말이지.. 두고봐 그 인간 집에도 똑같이 해줄테니까.. "
오늘 자신이 벌인 일에 스스로 고무되었는지 모인 사람들 앞에서 열변을 토하는 중이다.
" 그래도 좀 걱정된다, 그렇게 창피를 당하고도 가만히 있을까.. "
마음이 약한 소연이가 대신 걱정을 달고 있다.
" 지 까짓게 어쩔건데.. 내가 그대로 당할줄 알아, 어림도 없어. "
" 처형이 화가 난건 이해하지만 좀 심했지 싶어요, 물론 처형 입장에서는 성훈 선배가 먼저 저지른 일이니까 가만히
있을수 없어 복수를 했다지만, 만에 하나 그 사람이 앙심을 품는다면 서로간에 피를 봐야 할지도 몰라요. "
처음에는 흥분이 된 연주의 말을 말없이 들어주던 명근이가 차분하게 설명을 해준다.
" 나는 더 이상 망가질것도 없는 사람이야, 도저히 참고 있을수도 없고.. "
워낙 성격이 직선적이고 급한 연주다. 어떤 사태가 일어 나더라도 밀고 나가겠단 투다.
나중에 더 큰일이 일어날지 아직은 알수 없겠지만 이미 감정의 골은 깊어져서 멈추기도 어렵지 싶다.
" 난 자꾸 불안해, 좋게 매듭을 짓지 못하고 왜들 그렇게 싸우는지.. "
어떻게 남편이 아닌 남자들과 사귀는 배짱을 가졌는지 모를만큼 연약한 면이 많은 소연이다.
" 요즘엔 완전히 눈치만 보고 살아야 한다니까.. 지금만 하더라도 벌써 집에 가야잖어. "
자신의 일인데도 당한것만 억울해 할뿐, 앞으로 취해야 할 처신까지는 염두에 두지 않으려는 연주가 늦었다고 먼저
자리를 떳다.
" 걱정이네, 성훈 선배가 참지를 못하고 또 다시 일을 벌린다면 연주씨의 피해가 더 커질텐데.. "
갑용이도 일의 모양새가 좋지 않게 흘러감이 걱정되는 것이다.
" 소연이는 나하고 잠깐 얘기나 하고 들어가라.. "
얼추 헤어져야 할 시점에 미진이가 소연이를 불러 앉힌다.
명근이와 갑용이가 먼저 일어나고 영호까지 셋이 남은 자리다. 잠시 주저하던 미진이가 말을 꺼낸다.
" 어차피 영호씨도 알고 있는 일이니까 얘기를 하는거야, 너 혹시 남자친구랑 고수부지에 갔던 적이 있니.. "
" 처음 만났을때 두어번 갔었지, 왜 그러는데.. "
" 모르는 남자랑 고수부지에서 부둥켜 안고 있는걸 니 시아버지와 운동하시는 분이 본 모양이야, 시부모들 귀에만
안 들어 갔을뿐이지.. 회원들끼리는 쉬쉬 하면서 다 알고들 있다더라. "
사실이라면 심각한 문제다. 운동을 하는 회원들이 알았다면 조만간에 시부모들도 알게 되는것은 시간문제다.
지금이야 시부모들이 이뻐한다지만, 집앞에서 외간 남자를 부둥켜 안은 며느리를 눈감아 줄 사람은 없는것이다.
여지껏 죄의식 없이 자신의 일상을 즐기던 소연이로서는 처음으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 말해줘서 고마워 언니, 나도 먼저 일어날께.. 형부, 나중에 봐요. "
" 어머니는 뭐라셔.. "
영호에게는 가장 궁금한것이 미진이 어머니의 반응이다.
" 어머니야 당연히 내 편을 들어주겠지, 영호씨도 좋게 보셨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철부지처럼..
지연이가 어찌 생각할지도 걱정되고 남들이 흉이나 볼까봐 겁나서 그렇지. "
" 또 그런다 ~ 우리만 좋으면 되지, 남들 눈치는 보지 말자니까.. "
머리속에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 태평스런 영호를 보면 부러울때도 있다. 어찌 주위 사람들의 생각을 무시하고
산다는겐지.. 젊어서 배짱이 두둑한건지, 원래가 주위에서 보는 시선 따위에는 무관심인건지 알수가 없다.
" 몰라, 나도.. 지연이가 어찌 생각하는지 어머니가 떠 본다고 했으니까 기다려 봐야지, 뭐. "
이런 부분에선 서로가 틀려도 너무 틀려서 간격이 좁아지질 않는다. 아니, 의논조차 되지를 않는것이다.
지연이와 어머니의 대화가 어찌 결론이 날지 아까부터 조마조마한 심정이 되어 애를 끓이고 있는 미진이다.
자신이 믿고 의지하려는 이 연하의 남자는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는 헤아릴줄 모르는 것이다.
" 걱정하지마, 어머니가 얘기해서 안되면 내가 지연이를 만나볼께.. "
도통 대책이 없어 보인다. 아무리 철이 없기로 자기가 지연이를 만나서 어떻게 이해를 시킨다는건지..
" 됐네요. 차라리 벽에 대고 얘기를 하는게 낫지, 누군 불안해서 죽겠구만.. 일어나, 영호씨 집에 가서 기다리게.. "
영호네 집에서도 할일이 많다. 며칠동안 가보질 못했으니 부엌살림이며 세탁물이 산더미처럼 쌓였을것이다.
혼자 있을때는 깔끔하게 정리해 놓고 살더니, 집근처로 집을 옮기고선 아예 방치를 하고서 손도 까딱않는 영호다.
씽크대엔 설겆이 할것이 잔뜩 쌓여있고 베란다에도 세탁기위에 빨래감이 산을 이루고 있어 기가 막힌다.
팔을 걷어부치고 씽크대부터 정리를 하려는데 영혹가 뒤에 와서 살며시 껴안아 온다.
" 저리 비켜, 애기만 낳아주면 뭐든지 하겠다는 사람이 잘하는 짓이다. 이게 몸이 무거운 사람이 할 일이야.. "
안그래도 지연이땜에 초조하기까지 한데, 집안을 치우려고 생각하니 짜증이 밀려온다.
" 누가 자기한테 일하래, 이리와 봐.. "
뒤에서 허리를 감아안고 있던 영호가 자신을 들어 식탁의자에 앉힌다.
" 여기서 차나 마시고 있어, 내가 다할께.. "
커피포트에 물을 붓고 콘센트에 꼽더니, 스폰지에 세재를 묻혀서는 설거지를 하기 시작한다.
" 손에 습진이라도 생기면 어쩔려구 그래, 고무장갑을 껴야지.. "
뒤에서 하는양을 지켜보고 있으려니 남자에게 부엌일을 시킨게 조금은 미안하다. 베란다로 가서 빨래감을 정리
하려는데 어느틈에 쫒아 나왔는지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빨래감들을 나눠서 세탁기에 넣는다.
혼자 사는게 습관이 된 사람이라 그런지 제대로 빨래감이 구분돼서 소쿠리에 담겨있다.
" 내 팬티는 왜 따로 놨는데.. "
그냥 세탁기에 같이 넣으면 될텐데 작은 소쿠리에 따로 담겨져 있다.
" 히 ~ 그건 손으로 빨려고 그런다, 왜. "
당연하다고 자랑스럽게 웃기까지 하는 영호를 보며 기가 막히는 미진이다.
" 아직도 그 버릇 못 고쳤어, 맨날 같이 있는데 냄새나는 팬티는 뭐하러 챙기는지 모르겠네.. "
자주 만나지 못했을때 영호가 자신의 팬티를 원하는 버릇이, 그의 어머니를 만나서 외롭게 살아 왔다는걸 알고나서는
유독히 냄새에 집착하는걸 이해하게 되었었다.
지금도 그런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것은, 영호가 자신을 좋아해서 그러리라는 생각이 들자 뿌듯해진다.
식탁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영호를 지켜보고 있는데 미진이의 핸폰이 울린다. 친정집의 번호가 액정에 뜨자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하는 미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