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금 이상해서 전화했다. 지연이하고 얘기를 해 봤는데 지 엄마가 재혼을 하는건 이해를 한다면서, 그 상대가 자기를
가르치는 과외선생이라고 하자 낯빛이 변하더라.. 혹시 지연이가 그 사람을 맘에 두고 있었던게 아닌가 싶다. "
이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린지 모르겠다. 영호가 공부를 가르쳐줄때 허물없이 지내기에 그러려니 했는데, 설마하니
맘속에까지 담고 있을줄은 몰랐다. 사춘기를 별탈없이 보내는가 했더니 까맣게 짐작도 못했던 일이 생긴것이다.
설거지를 끝낸 영호가 식탁으로 다가오더니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부딛쳐온다.
" 이러지마, 지금 자기하고 그럴 기분이 아냐.. "
" 왜 그래, 갑자기.. "
정색을 하고 뿌리치자 영호가 놀랜 눈을 해 가지고 바라본다.
" 지연이가 이상해, 집에 가봐야겠어. "
식탁에서 일어나서 집에 가기위해 겉옷을 걸치자 영호가 팔을 붙잡는다.
" 조금 늦게 가면 안되는거야.. "
지금 이 상황에서도 눈치없이 같이 있자고 조르는 영호의 행동에 어이가 없다. 나이가 서른이 넘어 자기 앞길을
헤쳐 나가야 할, 아니 행여라도 두사람이 합쳐질 경우에 지연이와 새로 태어날 애기까지 책임을 질 사람이 미덥지가
못한 행동만 하고 있다.
" 자기는 진짜로 생각이 있는 사람이야, 지연이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고 나섰는데도 같이 있자는 말이 나오니.. "
시무룩해서 입이 댓발이나 나온 영호를 뒤로하고 현관문을 나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지연이의 얼굴을 볼 생각을 하니 난감 하기만 하다. 십대의 딸이 좋아하는 연하의 총각을
에미인 자신이 인연을 맺겠다고 욕심을 부린 꼴이 됐으니, 지연이를 쳐다볼 용기가 없음이다.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들어서니 현관 바닥에 지연이의 신발이 놓여진걸로 봐서 이미 들어와 있지 싶은데, 미진이가
느끼기에는 집안 전체에 찬바람이 몰아치는 기분이다.
조심스럽게 지연이의 방문을 노크하고 방을 들여다보니 침대에 누워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다.
" 지연이, 자니.. 안자면 엄마하고 얘기좀 할래.. "
" ............ "
분명히 자신의 말을 들었음에도 아무런 대꾸가 없는 지연이다.
아무래도 마음에 상처를 입은것 같아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엄두가 나질 않는다.
우려했던 큰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휘트니스 멤버중에 미진이를 제외한 나머지 세명은 연주가 들려준 얘기에 모두들 어찌해야 몰라 전전긍긍해야 했다.
연주가 수소문 끝에 성훈이 와이프가 하는 양재동 꽃시장으로 찾아가 성훈이의 파렴치 한 짓을 들려 줬더니만,
마침 성훈이 와이프인 정숙이도 연주를 궁금해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면서 둘이서 얘기를 나눴더란다.
평소에 화환이나 꽃바구니를 가장 많이 주문해 주는 거래처인 성훈이의 동창 와이프한테서 전화가 와서, 동창회에서
있었던 불미스러운 얘기를 해주면서 앞으로 거래를 끊겠다고 통보를 했다고 했다.
자신은 평소에 남편인 성훈이를 그저 그러려니 하고 포기하고 살아온 터라 놀랄일도 아니었지만, 갑자기 매상이 뚝
떨어져 안그래도 힘든 살림이 더 힘들게 됐는데, 그 소식을 전해들은 성훈이가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도 연주를
가만히 놔두지 않겠다고 벼르면서 일을 꾸미고 다닌단다.
더 큰 문제는 같이 운동하는 멤버들의 뒷조사까지 해서는 모두의 집에다 알리겠다고 술이 취해 공언까지 했단다.
성훈이가 연주의 남편을 직접 만나서 자신과의 관계를 알려주고, 멤버들의 남자관계까지 폭로하겠다고 하루종일
쏘다닌다고 했다.
" 그것봐, 내가 불안하다고 참으라고 했잖어.. 우리집에서 알게 되면 어쩌라구.. "
소연이로서도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안그래도 자신을 이뻐해주는 시아버지가 자신을 불러 좋지않은 얘기를
들었다면서, 몸가짐을 조심하라고 타이른게 바로 어제의 일이다.
보통의 경우라면 난리가 났겠지만, 유독 며느리를 편애하는 시아버지 덕에 가슴을 쓸어 내렸던 것이다.
미리 미진이에게 귀뜸을 들은터라 결혼하기 전에 자신을 쫒아다녔던 남자가 갑자기 찾아와, 고수부지에서 처음으로
만났던 것이라고 거짓말을 해서 위기를 넘겼지만, 이미 시아버지의 믿음은 어느정도 신뢰가 깨졌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성훈이로 인해 다시 한번 집안이 시끄러워 진다면, 그것은 돌이킬수 없는 상황으로 빠질것이기 때문이다.
" 그전부터 자중 좀 하라고 그렇게 일러줬는데도 멋대로 하더니.. 이 일을 어쩌면 좋으냐.. "
초조하기는 맏언니인 정희도 다를바가 없다. 자신에게 다감하지 못했던 남편땜에 애인을 만들기는 했으나, 그것을
정당화 시킬 이유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가부장적인 삶을 살아온 남편이 알게 된다면, 한마디도 못하고 집에서 쫒겨나야 할지도 모른다.
지연이 때문에 머리가 복잡한 미진이는 그들의 고민이 물건너 불구경일 뿐이다.
점심시간이라 미진이를 뺀 다섯명이 방배동 꽃게집에서 다시 모였다. 소연이가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명근이를
부르고, 연주도 답답한 심경에 나이많은 승우를 불러 그들의 도움을 받을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로 한 것이다.
" 오빠, 미안해요.. 내가 성격이 못돼서 제멋대로 행동하는 바람에 오빠를 곤란하게 만들고 여기있는 정희언니나
소연이한테까지 피해를 주게 생겼으니 어쩜 좋아.. "
일이 걷잡을수 없게 벌어지고 나서야 자신의 잘못을 깨우치게 된듯 싶다. 연주로서도 자신의 남편이 먼저 밝혀진
두남자외에 성훈이까지 만나게 된다면, 지금의 불편한 생활은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그 여파는 짐작조차 어렵다.
더구나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멤버들의 가정에까지 평지풍파를 일으키게 된다면 아예 얼굴을 들고 다닐수 없을것이다.
" 그래, 힘들게 생겼구나.. 니가 섭섭하게 들리겠지만 그동안의 결과가 이런식으로 나타난건 순전히 니 탓이야..
일단 일이 더 커지기전에 수습할수 있으면 해야겠지, 그 친구에 대해선 명근이가 잘 알고 있을테니 어쩌면 좋을까.. "
" 글쎄요, 미워하는 사람이 나쁘게 되길 바라는건 누구나 품을수 있는 생각이겠지만 그 선배처럼 실제로 일을 벌이는
사람은 드물겁니다. 그만큼 어디로 튈지 대책이 없다고 봐야죠. "
명근이도 뾰족한 수가 있을수는 없다는 말이다. 더군다나 후배 된 입장으로 연주와의 다툼에 끼여들어 몰아 세우기
까지 했으니 자신의 말이 통할것 같지도 않다.
" 오죽하면 건달인 사촌동생한테 부탁할려고 생각도 해 봤는데, 오히려 일이 커질까봐 결정을 못하고 있는거야.. "
힘으로 제압을 한다면 누군들 못하겠는가. 성훈이도 한성격하는 타입이라 그 역시 좋은 방법이 아닌듯 싶은것이다.
" 니가 벌린 일때문에 꽃집의 매상이 줄었다고 했지.. 혹시 그 친구가 내말을 이해를 해 준다면 해결이 될수도 있겠다.
일단 명근이와 니 사촌동생과 함께 양면작전을 써보자. "
해결책이 있을수도 있다는 승우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꽂힌다.
" 좋은 방법이 있는거야.. "
바짝 애가 타 발만 구르던 연주가 구원의 눈길로 승우를 바라본다.
" 사촌동생이나 불러줘, 남자들 셋이 모여서 의논을 해야 할테니.. 늦으면 일이 터질지도 모르니까 지금 당장 불러라.. "
같은시간 미진이는 처음으로 충무로에 있는 영호의 직장 근처에서 점심을 같이 먹는 중이다.
" 자기가 직장 생할을 하긴 하는구나, 밖에서 보니까 의젓하네.. "
" 미진씨만 나를 무시하지, 이래봬도 회사에 있는 여직원들한테는 인기도 많네요. "
" 에고 ~ 그런가요, 그런데 왜 나이 많은 누나한테 재롱을 떨까요.. 여직원들이 영호씨 실체를 알면 뭐라고 할까요..
그저 여자 치마폭에서 떼만 쓰는 철부진줄 알고도 좋아 할려나.. "
" 자기는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지, 자기를 좋아하는 남자를 그런식으로 매도하면 맘이 편하냐.. "
점심시간이라 먹을곳이 마땅찮아 커피숍에 앉아서 직장인을 상대로 냉동 돈까스를 팔길래 시켜 봤지만, 영 개운치가
못한 맛이기에 손도 대지 않고 커피만 홀짝이는 중이다.
" 그런 농담하러 나온게 아니거든, 지연이가 문제야.. 엊저녁에는 얘기를 꺼내지도 못했어, 아마도 자기를 이성으로
느끼고 좋아 했었나봐.. "
하도 답답해서 기대는 아니라도 푸념이라도 할 요량으로 영호의 직장까지 찾아온 미진이다.
" 뭘 그런걸 갖고 고민을 한대, 자기는 내가 어리다고 우습게만 보이지.. 만약에 내가 지연이를 설득하면 어떡할래,
나한테 오빠라고 부르면서 큰절이라도 한다면 내가 해결해 줄텐데.. "
자신의 고민을 해결 해 주겠다는 영호의 자신감이 허풍으로 들리기도 하지만, 이제껏 그가 약속을 어긴적도 없음이
떠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