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생(殘生)

잔생 69

바라쿠다 2017. 10. 17. 12:13
"일찍 오셨네.."
"아뇨, 방금왔어요."
서초동에 위치한 남부터미널 앞에서 버스시간에 맞춰 약속을 했다.
며칠전 신당을 찾은 박귀순이란 여인이다.
일요일에 보기로 했었지만, 토요일과 일요일 연이톨 중요한 행사가 예정되었기에
부득불 일정을 앞당기게 됐다.
가파른 절벽에 핀 한송이 꽃이기에 벌과 나비가 근접을 못한다.
부부라는 인연을 맺은 남편 역시 타고 난 역마살이 있어 한 가정에 안주하지
못하기에 날 찾았을게다.
"가십시다."
"날씨 좋네요."
인생사 답답하게 꼬여 내 힘으로는 작은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기에 산수좋은 곳을 찾아
바람이라도 쏘일 요량으로 만나기로 했다.
겉으로 보기엔 부자집 마나님처럼 온화하게만 보일뿐 근심걱정이라고는 찾을수가 없다.
어쩌면 자신의 속에 내재된 고통이나 울분을 갈무리하는 체념을 터득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평범한 등산복 차림으로 시외버스를 타고 소백산에 당도한다.
충청도와 경북을 잇는 산줄기로 서울에서 이곳까지 오려면 단양이나 풍기에서 죽령을 넘는
시골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간혹 찾는 곳이기에 번거로움 없이 죽령고개 정상의 휴게실에 다다랐다.
"천천히 산보나 하십시다."
"앞장서세요."
내년이면 60인지라 무리한 산행은 피하기 위해 능선을 따라 소롯길로 접어든다.
경치를 보고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태백줄기의 연장선에 있는 소백산 역시 꾸불꾸불 인도된 길을 따라
걷다보면 수많은 아름다움이 발아래 펼쳐진다.
마치 꽃구름위를 걷듯 그 경치는 황홀하기까지 하다.
"이쪽으로.."
며칠전 내린 큰 비로 밑으로 향하는 내리막길이 무너져 가파르기에 그녀에게 손을 내민다.
잠시 멈칫거리던 그녀의 손이 겹쳐지고. 몸을 모로 해 미끄러운 자갈길을 조심조심 내 딛는다.
그녀의 몸무게가 내 손에 실릴만큼 달리 의지할 곳이 없다.
십여미터를 위태위태하게 내려 와 겨우 목재로 계단을 만든 길에 안착이 된다.
"..무겁죠.."
"손이 따뜻해요.."
요즘 세상에 그깢 손이 스쳤다고 수줍음 피는 그녀가 순수해 보인다.
"잠시 쉽시다."
"..네."
나이를 감안해 일반 등산코스의 역행인 내리막 길을 택한게지만 산행이 벌써 두시간에 가깝다.
"저리로.."
".........."
제법 평퍼짐한 바위가 있어 앉아 쉬기가 용이해 보언다.
둘이 엉덩이를 맞대면 편한 자세가 되련만 굳이 바위끝에 간신히 걸친다.
산바람을 타고 그녀만의 체취가 코에 스민다.
소녀같은 감성을 지금껏 지닌 그녀에게 호기심이 인다.
"드시죠."
"..맛있네.."
배낭속에서 즐겨마시는 홍초를 꺼내 건넨다.
그깟 음료 한잔에 탄복한 듯한 과한 반응에 오히려 내가 어색스럽다.
"저쪽으로 내려갑시다."
"희방사 간다구.."
"내가 힘들어서 그래요, 버스탑시다."
"..네."
일부러 내리막길을 택한게지만 그녀가 힘에 부쳐 하는걸 눈치 챈 국진이다.
아직도 한시간 넘게 힘든 코스를 걸어야 그 곳에 당도할수 있다.
어차피 심신단련차 이 곳을 찾았기에 무리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다.

'시원하다.."
"그러네요."
희방사 초입의 폭포수에서 굉음과 함께 힘찬 물줄기가 떨어진다.
보는 이의 가슴이 시릴만큼 거센 폭포의 위용이 그럴듯하다.
"여자가 오줌누는것 같네, 후후.."
"어머,호호호~"
한번 봇물터진 그녀의 웃음은 그칠줄 모른다.
수줍은 그녀에게서 저런 활달함이 내재돼 있었는지 신기할 정도다.
"저쪽으로 가죠."
희방사에 들어 대웅전을 비롯 사찰곳곳을 누비며 눈요기를 한다.
나만의 생각인지 모르지만 묵은 때가 벗겨지며 마음에 평안이 깃든다.
이 곳을 지키는 산신각을 지나칠수 없기에 그녀를 이끈다.
"푸근해요."
"그래요?"
"네, 인자하세요."
일반인들은 신령님의 경이로움을 접하고는 지레 겁을 집어 먹는다.
산신령에게 친밀감을 느끼는 이는 본적이 없다.
보면 볼수록 새로운 면이 그녀 박귀순에게서 보여진다.
"시원스럽게 싸긴 하네요,호호.."
"그렇죠,후후.."
마음의 평온을 찾은듯 한결 밝아진 그녀와 하산길에 다시금 희방폭포와 마주했다.
폭포의 생긴 형태가 마치 여자의 그 곳인양 묘한 느낌이야 있다.
그렇다고 입 밖에 그런 표현을 스스럼없이 내비친다는건 그만큼 마음이 열렸기 때문이리라.

"난 한잔하렵니다."
"나도 줘요."
산행을 마치고 검색으로 찾은 식당에서 닭백숙을 시켰다.
술과는 다소 거리가 멀게끔 생긴 그녀가 잔을 내민다.
60 다 된 나이에 이토록 순수한 느낌을 간직하기도 쉽지 않을게다. 
겉으로 보기에는 50으로 보일만큼 상큼하기까지 하다.
"술 즐기시네요."
"못해요."
처음 신당을 찾아왔을때와의 그녀의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뭐랄까 세파에 찌들려 본연의 기품있는 우아한 자태가 오히려 버거워 보일만큼 안쓰러워 보였다.
술의 기운인지는 모르겠으나 밝은 표정이 보여 보기에 좋다.
"술 가까이 해요."
"..네?"
"박여사는 술이 어울리네.."
"그래요?"
"보기 좋아요."
인생사 틀에 맞춰 사는 해답을 구한다면 맘 편한게 우선일게다.
도덕이나 윤리에 얽매여 산다는것은 그만큼 눈에 보이지 않는 제약이 뒤 따른다.
고정관념을 버리지 않는 한 평생 멍에를 진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녀가 지키고자 하는게 반드시 정답일수는 없다.
"그럴지도 몰라요, 예전 남편의 외박이 잦을때 자주 마셨어요.. 남들이 흉볼꺼 싶어 멈추기는 했지만.."
"마셔요, 그게 도움이 될겝니다.
"그럴까요.."
"술이 좋은건 희석을 해 주기 때문이죠, 박여사가 매달리는게 별것 아니란걸 가르쳐 줄겁니다."
"그 말이 맞겠네요, 여지껏 버티고 살았으니.."
애초에 자식은 없는 사주기에 긴세월 남편만 보고 살았을게다.
밖으로만 도는 남편이 첩에게서 자신의 핏줄을 얻은 뒤로는, 대놓고 두집 살림을 한단다.
수십년을 일부종사한 댓가치고는 형벌에 가까운 지옥같은 세월을 참고 살았을게다.
"이제부터 버리는 연습을 해요, 그래야 덜 억울하죠."
"..나이가.."
"45입니다."
"14살 차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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