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갔다 올께. "
" ..어디 가는데.. "
" 응, 삼성동. "
민수가 이곳으로 온지 3개월이 넘어 쌀쌀한 겨울의 매서운 바람까지 느껴야 하는 날이다.
어느 날인가 수경이와 우혁이를 챙기고 하우스에 나왔더니 민수가 타이까지 맨 정장 차림이다.
주로 이층방에서 컴퓨터와 씨름하던 그였기에 오랜만의 외출이 신기하게 보인다.
" 무슨 일이야. "
" 일이 잘 되려나 봐, 신용장 받으러 가. "
민수가 모는 승용차가 하우스를 돌아 소롯길로 나가는걸 보며 진호에게 이유를 묻는다.
아마도 이층방에서 수출과 관련된 일로 그간 시간을 보냈나 싶다.
가끔 일손이 바쁠때 하우스에서 모종 옮기는 수수한 작업만 도왔다.
여러가지 꽃들이 박스에 담겨 출하가 되는 날은, 일손이 부족해 정기적으로 출근하다시피 하는 아주머니 외에 근처
연세 지긋한 할머니 두분까지 오시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그네들의 점심까지 차려 소소한 도움이나마 주었기로 나름 뿌듯한 맘이었다.
동생인 치영이 역시 자주 트럭가득 물건들을 실어 나를만큼 분주해 보이기에 하는 일이 잘되지 싶었다.
" 민수씨가 도움은 돼? "
" 그럼.. 얼굴 좋아보이지? 이번 껀으로 매출이 상당히 늘었어, 그만큼 바빠질게고.. "
" 다행이네. "
" 오늘 자축파티나 하자. "
" 파티? "
" 응, 하우스에서.. "
" 먼저처럼 삼겹살 굽게? "
" 그게 젤 만만하잖어. "
우혁이가 제법 뒤뚱이며 걸어다니자 하루종일 녀석과 붙어 지내는 수경이는 잠까지 같이 자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신이 낳은 두 아이가 나란히 자는걸 보는게 요즘 유일한 낙이며 즐거움이다.
가끔 이층방과 하우스를 오가며 두 남자와 번갈아 잠자리를 하는 곡예를 하기도 한다.
누구 하나에게 소속이 될수 없는지라 나름 두 남편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게 용이스럽지만은 않다.
아침이면 같이 밤을 보내지 못한 남편의 눈치까지 괜시리 살피게 된다.
그러던 차에 셋이 마주해야 한다니 어찌 처신을 해야 할지 조금은 신경이 쓰인다.
" ..미안해 진호씨. "
" 뭐가.. "
" 요즘 내 행동.. "
" 별.. 괜찮어. "
아무래도 진호에게는 지금의 심정을 솔직하게 얘기하는게 맞지 싶다.
그나마 날 이해해 주는게 그 밖에 없음이다.
나이가 더 많은 민수는 자기만 챙겨주길 원하는 마마보이같은 심성을 지녔기에 속 깊은 얘기는 꺼려진다.
" 나 그때 죽으려고 했어. "
" 언제.. 나 실종됐을때? "
" 응, 살기 싫더라. 당신 어머니땜에 맘 추스렸어. 자기가 죽었는데 며느리까지 생 목숨 끊어 봐. 어머니 마음은
어쩔거야. 이거 핑계 아냐. "
" 알아, 어머니한테 들었어. "
젖먹이인 수경이를 놔 두고 친정 엄마에게 끌려 강제로 생이별을 한게 세번쯤일게다.
아마 그때만큼 내 스스로의 평상심을 잃어 본 적이 없다.
진호가 죽었다는 소식과 함께 열달씩이나 내 뱃속에서 꿈틀대다 태어 난 수경이까지 떼어내야 한다는 생각에 절반쯤은
삶을 포기하려고 했다.
" 수면제 먹어서 병원에 실려 갔었어. "
" ..그랬구나. "
사랑하는 진호가 없는 세상은 견디기 힘들만큼 절대적이었다.
그때 작은 위안이나마 돼 준 사람이 민수씨였다.
( 내가 지켜줄께. 네 행복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거야. )
처음엔 대면대면했지만 틈만 나면 내 곁에 붙어있고자 하는 민수가 고마웠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 했던가, 잔잔한 신경을 써 주는 그가 눈에 들어왔다.
어린 수경이를 떼어 낸 이유는 되지 못해도 어느 정도 마음의 평온을 찾은건 사실이다.
자분자분 내 마음을 달래주려 애쓰는 그에게 기대게 된 시점이다.
" 선배~ "
" 응? "
어두운 저녁 하우스에 차려 진 간이 테이블에 셋이 마주 앉았다.
꽃이 길러지는 곳이라 간편한 쉐타 차림이지만 이 곳 실내는 훈훈한 온기로 가득하다.
벌써 네병인가 술병이 비워졌지 싶다.
처음에는 늘어 난 수출 물량에 대한 얘기가 주를 이뤘기에 분위기가 많이 부드럽다.
" 선영이 이쁘지.. "
" 당연한 얘기를.. "
느닷없는 진호의 말에 당사자인 나나 민수씨 역시 그 의중이 궁금하다.
" 선영이 입장 생각해 봤수? "
" ..무슨.. "
" .................... "
" 오늘 모이자고 한건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야.. 요즘 두 사람 다 자연스럽지가 못해. "
" .................... "
생각이 깊은 진호인지라 그간 지켜보던 우리 세사람 모두의 마음쓰임을 염려하는듯 하다.
하기사 나 역시도 이렇듯 얽혀진 자체가 불안스럽긴 했다.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겠지만 불편한 이 관계가 지속되는게 떳떳할수만은 없는게 사실이다.
보편적으로 외간을 한다는건 주위로부터 질시를 받아야 하는 세상이다.
유혹스런 맘으로 샛서방을 감춰둔게 아니건만, 어쩌다 보니 남편을 둘씩이나 가진 지금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내 입장을 이해시킬 방안은 없다.
" 선영이는 우리 두사람 모두에게 미안한 감정이 있는것 같애. 눈치보면서 선배와 나 사이를 오가는게 보여. 선배도
자연스럽지가 못하구.. "
" ..내가 뭐가.. "
" 솔직이 얘기해 봐요, 선영이를 나한테 뺏겼다는 생각은 없는지.. "
" 뺏기기는.. 무슨 물건인가. "
진호는 내 입장을 거슬리는 말이나 행동이 없었지만, 민수의 경우는 그와 달랐다.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졸지에 살아 돌아온 진호로 인해 질투란 감정을 지니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겉으로야 내색치 않았지만 몇년간 부부로 살아온지라 그의 표정만 봐도 속이 들여다 보인다.
" 이런.. 나부터 솔직하게 얘기할께. 난 그랬어, 첨에 한국에 왔을때 선배한테 선영이를 뺏겼다구 생각했어. "
" ..그건 미안하다. "
" 츠암~ 누구 잘잘못을 따지자는게 아냐. 일이 여기까지 흘러왔잖어. "
" ...................... "
" 굳이 잘못을 따지자면 한국을 떠나 타지에서 죽은 내 잘못이고 죽은 후배의 와이프를 욕심낸 선배 잘못이야, 선영이는
우리 두사람 사이에 낀 피해자에 불과해. "
" ..그야.. "
첫사랑이면서 첫남편이었던 진호가 평소에 품고 있었던 얘기를 하는 것이다.
언제인가 동생인 치영이에게서 그런 언질까지 전해 들은 적이 있다.
그가 나서서 꼬여 진 실타래를 풀고자 애를 쓰는게 눈에 보이는지라 더 더욱 믿음이 간다.
" 우리 그만 불편해 합시다, 인정하면서 살자구.. "
" 알아 들었어, 이제 그만 해. "
" 조선시대에도 그랬대, 삼처사첩은 흉 아니었다고.. 남녀가 뒤바뀌긴 했지만 우리 그렇게 삽시다, 우리 둘 다 선영이
남편으로.. "
" 헐~ 아주 신났구나. "
술이 취하는지 제 딴에는 잔소리나마 하고 싶었나 보다.
취중진담이라고 속에 담아 두었던 내심이 밖으로 표출되는 것과 다를바 없다.
진즉에 알고는 있었지만 그의 입을 통해 나를 대하는 잣대가 그려 진다.
" 선영이는 누구께 아냐, 우리가 선영이꺼지. "
" 얘가 아주 날 잡았구나, 그만 하래니까.. "
두 남편이 내 앞에서 자기만이 잘났다며 한치도 물러서지 않는다.
흔히 남자들이 여자앞에서 기죽기 싫어하듯 쓰잘데기없는 자존심 싸움으로 보인다.
" 선영이 넌 어때. "
" 뭐가.. "
" 내 말 맞아 틀려.. "
" 취했나 봐 진호씨. "
돌연 화살이 내게 돌려 져 당혹스런 마음이다.
내가 처신을 잘못한게 있는가 싶어 빠르게 필름까지 돌려 본다.
" 안 취했어, 내 앞에서 한번 해 봐. "
" 뭘? "
" 여기서 찐한 영화 한편 찍어보라구. "
" ..무슨 말도 안되는.. "
" 그렇잖어, 선배는 네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궁금한 모양이야. "
" ...................... "
" 해 봐 선배, 니꺼 내꺼 따지지 말고.. "
술 취한 진호의 얘기가 뭘 뜻하는지 이해는 간다.
하지만 진호가 보는 앞에서 그짓까지 해야 하는지는 공감조차 안되는 선영이다.
둘 다 남편이라고는 하지만 동물과 다름없는 그런 행위는 꿈 꾼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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