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생(殘生)

잔생 2

바라쿠다 2016. 12. 6. 02:37

" ..저기 딸아이때문에.. "

고개는 약간 밑으로 숙여 져 있으나 눈은 새초롬히 들어 내 동선을 살피고자 한다.

치마 밑으로 보여지는 허벅지께의 맨살 위로 공손히 두손을 겹쳐 잡아 마주한 자태는, 얌전한 척 내숭을 떠는 그 이상은

아니다.

매니큐어 따위는 없더라도 입술에 연하게 루즈가 그려진걸로 봐서는 제 년의 끼를 감추고자 하는 폭이겠지만, 훤히

비치는 매미옷으로 나신을 가린것처럼 속이 들여다 보일 뿐이다.

" 불러,생년월일. "

일단 밥벌이는 해야 하기에 붓에 먹을 찍어 그러잡는다.

" 1997.12.3.. "

" 시는.. "

" 아침 9시.. "

어린것이 풍파가 제법 낀 사주다.   어쩌면 물림을 했을수도 있지 싶다.

" 자네껀.. "

" .. 왜 제껄.. "

뭔가 불안한 듯 자신있게 대답 못하는걸로 봐서는 그 에미에 그 딸년은 아닐런지..

" 이룬~ 네가 싸질렀잖어~ "

" ..1970.2.9.. "

" 자네 이름. "

" ..고연숙.. "

엄쳥 팔자가 늘어진 생활을 해 왔지 싶다.    47이면 적지 않은 나이건만 네,다섯살은 족히 어려 보인다.

하대를 하는데도 반항할 엄두는 안 나는지, 죄 진양 고개를 푹 수그리는걸로 봐서 전력이 많아 보인다.

여자와 첫대면을 했을때 나름 스스로 깨우친 게 있다.

얼굴이 됐던 몸 어디 한 곳이 됐던 이쁘게 보이기 시작하면, 곳곳이 전염되듯 온몸으로 번져 색끼가 흘러 보이기까지

하기에 꼬시고 싶어 안달이 난다.

" 고3이네.. "

" 네, 그래서 대학은.. "

야무진 여자들은 자녀의 어린시절부터 학원이나 과외 따위로 치성을 들이는 법이다.

이미 한참이나 뒤늦은 시기에 불로소득을 바란다는건 코 안풀고 날름 먹겠다는 수작이다.

" 남편은.. "

이왕 정보를 득함에 있어 모든걸 알아 둬야 써 먹기 용이하다.

" ..그이는 왜.. "

" 이룬~ 그 인간 능력이 자네꺼잖어. "

" ..1966.8.16.. "

" 추석뒤라 먹을 복은 타고 났네, 덩달아 잘 먹고 잘 사는게고.. "

재물운이 곡식 창고가 차고 넘치다 못해 썩어 문드러 질 정도니 하늘의 보살핌이 없고는 어림도 없는 사주이다.

남의 사주풀이나 해 먹고 사는 나에 비해 8살이나 많은 놈이 은근 부럽기까지 하다.

" 저기..  대학은.. "

" 부적 써 줄께.  베개속에 감춰. "

" 그러면 대학 가는거죠~ "

" 딸아이 말고 니 남편꺼야. "

"..왜.. "

흔히 액땜이란게 당사자에게만 국한 돼 있다고 잘못 알려져 있다.

한 가정의 운명은 공동체로 짜여 진 경우가 다반사다.

더군다나 어차피 실력으로 대학가기는 어려울 것이고, 대신 남편의 바람끼는 잡아 줘야만이 가정의 풍파는 잠 재울

것이다.

" 꽉 막히긴..  남편이 다른 년한테 갖다 주면 어쩔건데.. "

".. 그 이가 바람피나요? "

" 눈 돌리는게 잘못만은 아냐, 정 붙이는게 문제지. "

수많은 사람들과 부디끼며 살아감에 있어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 왜 없을손가.

그저 스치는 바람이면 상관없겠으나 만남의 횟수가 거듭될수록 정이 쌓이는게 문제다.

부적을 그려 냄에 나름 온 신경을 집중하여 공을 들이는데, 궁금한지 무릎을 펴 곧추 세우고는 좌탁위로 몸을 기울이는데

옅은 향기가 코 끝에 맴 돈다.

(곱긴 곱네.  이러면 안되는데,신빨 떨어지겠어.)

부지불식간에 아랫도리에 힘이 쏠리기에 내리긋는 획이 깔끔스럽지가 못하다.

" 얼마나 드려야 할지.. "

" 알아서 줘, 자네 정성만큼 부적이 운을 가져다 줄게고.. "

" 이거면 될른지.. "

명품인듯 한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백만원짜리 수표 한장을 내민다.

언뜻 지갑 속이 보이는데 하얀 수표가 제법 여러장이다.

" 딸아이랑 한번 같이 와. "

" ..왜? "

" 면상을 봐야 방법이 생기지, 답답하긴.. "

" 네,도사님. "

밑밥은 뿌려놨으니 얼마간은 용돈벌이가 될 것이다.

일견 허점이 많아 보이는 여편네인지라 제대로 울궈낼수 있으리라.

 

" 어딜 가는데 그리 찍어 바르누. "

" 친구랑 약속있어. "

급한 마음이었던 희정이는 머리카락이 온전히 마르지도 않았건만 약속 시간에 늦지 싶어 거울앞에 앉아 대충 스킨만을

뺨에 두드리고 입술에 립스틱을 그리는데 애들 아빠가 안방으로 들어서며 시비를 건다.

 " 돈 좀 줘. "

" 무슨 돈.. "

웬수나 다름없는 인간이다.     하릴없이 밥만 축내며 집에서 빈둥거린지 10년이 넘었다.

" 왜 이래, 유세떠는거야? "

" ..얼마나. "

" 5만원. "

더 이상 맞대응해야 스트레스만 쌓일거라는 생각에 몸을 일으켜 낡아빠진 장롱 앞으로 걸음을 옮긴다.

몇번의 주먹질로 인해 가뜩이나 오래 된 옷장은 보기 흉하게 상처가 남아있어 더욱 우울해지는 마음이다.

맨 밑 이불사이에서 5만원짜리를 꺼내면서 비상금 숨기는 곳을 옮겨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 아껴 써. "

눈도 마주치기 싫기에 꺼낸 돈을 방바닥에 던지듯 내려 놓는다.

" 엄마, 어디 가? "

꼴도 보기싫은 인간을 피해 거실을 가로질러 힐을 발에 꿰어 신는데 둘째 놈이 현관에 나타난다.

보통이야 오후 7시쯤 집을 나서지만 약속이 잡혀 있는지라 일찍 서두르게 된 폭이다.

" 응, 니 형은.. "

" 오늘 늦을거야, 친구들이랑 놀러 갔어. "

큰 놈은 고3인데 공부는 진작에 포기하고 또래 애들과 어울려 다니며 간혹 사고도 치기에 골머리를 썩이는 중이다.

그 나이면 제 엄마를 이해해 줄 때가 됐으련만, 딴에는 무슨 불만이 많은건지 밖으로만 맴도는 놈 때문에 어찌해야

좋을지 머리가 지끈거린다.

" 일찍 오라고 꼬셔, 니들 방에 운동화 가져다 놨어. "

애들 아빠가 교통사고 휴유증으로 무위도식하게 된 이후로, 여자의 몸으로 가정을 힘들게 꾸려 가고는 있지만 나 역시

사람인지라 견디기 힘들때가 많다.

그럴때마다 술의 힘을 빌게 되고, 최근에 배운 사교춤을 써 먹는게 요즘 들어 가장 재미난 일이나 다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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