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생(殘生)

잔생 1

바라쿠다 2016. 12. 4. 17:06

" 어머, 빨래하셨네요 "

" 안돼~ 거기 내 자리라니까..  저쪽에 널어야지. "

(지지배가 매너 꽝이네, 먼저번에도 얘기했건만 남의 빨래줄을 무단점거하다니..  꼭 지 생긴대로 놀고 있어.) 

국진이의 일요일 아침이다.

그동안 귀찮아 밀어 놔 뒀던 빨래감들을 찾아 세탁기에 쳐 넣어 시작 버튼을 누르고는, 지저분한 방과 주방,거실 역시 

창문까지 활짝 열어 젖히고 땀까지 빼 가며 노동을 해야 했다.

" 도사님 빨래 없길래.. "

10여년만에 찾아왔다는 더위 때문인지 올 여름은 특히나 숨쉬기조차 어려운 몸뚱아리다.

가뜩이나 움직이기 싫어 침실창 위에 달린 벽걸이 에어컨 밑에서 꼼지락거리다 큰 맘 먹고 일어난 폭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부지런을 떨어야 손님 하나라도 맞이하기에, 전기세 비싼 거실의 스탠드형 에어컨까지 틀어

집안의 온도를 낮춰야만 한다.

옥탑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사는지라 지붕 위에 달궈 진 열기를 식히자면 여름 한철은 전기세가 장난이 아니다.

비록 옥상이라 하지만 건평이 80평인지라 숙식이 가능한 내 보금자리는 35평이다.

" 얼렁 옮겨요, 바빠 죽겠구만.. "

제법 넓은 평상위에 빨래 담아 온 바구니를 올려 놓고는 담배 하나를 입에 물어 불을 붙인다.

펑퍼짐한 흰색 반바지 밑으로 두 곳의 빨래줄을 오가며 바삐 종종거리는 늘씬한 종아리가 언뜻 눈에 거슬린다.

가끔이야 마주치긴 했지만 이리 느긋하게 그녀의 뒷모습을 감상하기는 처음이다.

바로 밑 4층으로 이사온지 달포 가량 됐지 싶은데, 지나치다 한두번 눈인사를 한게 전부이다.

" 걍 들어가요, 내가 널어드릴께.. "

한동안 그녀의 모습을 훔쳐 보느라 정신줄 놨지 싶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 선 그녀의 목소리에 화들짝 정신이 든다.

(지지배 이쁜짓도 하네.)

" 그래도 되겠수?  미안해서리.. "

하기사 오전부터 푹푹 찌는 날씨인지라 반갑기는 하다.

" 술이나 한잔 사시던지,호호.. "

입술 한쪽 끝에 콕 찍혀있는 점 때문인지 애교가 철철 흘러 넘친다.

가뜩이나 밉지 않은 인상이건만 언제 봤다고 친한척 하는겐지 아리송 하다.

" 헐~ 여자가 술 좋아하면 팔자가 드센 법인데.. "

" 피~ 많이 안 마셔요, 무슨 거사님이 쫀쫀하다니. "

눈마저 흘기며 배시시 미소짓는 모습에 은근 회가 동한다.

" 그럽시다, 나중에 봐요. "

" 넹, 들어가세요. "

진작부터 나와 엮일 기회를 노렸는지 콧소리가 누리끼리하다.

 

어제 마신 술로 더부룩한 참이었기에 몸을 정갈케끔 욕실 샤워기밑에 섰다.

요즘 들어 신빨이 떨어진 듯 며칠간 우중충한 기분이 감돌곤 했다. 

아무래도 목욕재계하고 신당에 정성을 들여야지 싶다.

남들은 남자가 화장품을 쓴다며 의아해 하겠지만, 나와 같은 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하다 여길것이다.

내 경우만 하더라도 신내림을 받았을때 주위로부터 쪽집게 소리를 들었으며, 신께 갈구하는 소원 역시 만사형통이란

별명까지 생겼기에, 더불어 부적을 원하는 고객이 많아 흥청망청 인심을 썻던 시절까지 있더랬다.

그러던 것이 차츰차츰 신끼가 떨어지는 경우가 늘었고, 결국엔 본 바닥에서 밀려 이곳으로 와야 했다.

부족한 신끼를 충족하기 위해 속리산이나 그 외 험준한 산세를 찾아 다니며 치성을 드리기도 여러번이었지만, 과거의

신통력을 되찾기 어려웠다.

아예 일반인처럼 평범하다면 차라리 모든걸 버리고 신내림 받기 전으로 돌아갈수도 있겠으나, 그 능력이란게 아슬아슬

경계선에 걸쳐지듯 왔다갔다 종잡을수 없기에 그럭저럭 세월보내는 중이다.

한가지 짐작되는 바가 있다면 아마도 여자를 가까이 하는 카사노바 기질이 있기에, 어쩌면 괘씸죄가 작용해 모시는

신에게서 혼나는 중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 띵~똥 "

CCTV에 모르는 여자의 영상이 떠 오른다.

4층에서 5층으로 오르는 계단 천정에 카메라를 장착했기에 이 곳 옥상으로 오르는 인기척을 가늠할수 있다.

조금후면 현관 차임벨이 울릴것이기로 미리 도포를 입고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한다.

어쩌다 찾아오는 고객의 뚜렷한 용모는 파악하지 못하더라도, 작은 실마리나마 건져야 그에 대비하기가 수월하기

마련이다.

" 삐리리~ "

드디어 낚시대의 찌가 움직이는지, 거실에 울리는 초인종 소리마저 경쾌하다.

" 들어오세요. "

현관문이 열리고 고개를 빠끔 들이미는 여자의 얼굴이 보인다.

" 실례합니다. "

이쁘장스레 생긴 여인네가 쭈빗거리며 안으로 들어 선다.

소담스럽게 웨이브 진 머리카락 사이로 시원스레 큰 눈이 인상적이고 콧날도 도톰하니 고집은 없어 보인다.

" 이쪽으로.. "

거실 정면의 신방으로 안내하고자 걸음을 옮기면서도 자꾸 흘깃거리게 될 만큼 몸매가 늘씬하다.

40은 넘어 보이는데 곱게 나이먹은 티가 날만큼 또래들보다 화사해 보이지만, 걸음걸이는 사뿐사뿐 조심스레 옮기기에

대는 약하지 싶다.

신방 중앙에 놓여진 좌식탁자를 돌아 신당을 등지고 앉았다.

흔히 사주나 관상으로 그 사람을 점 쳐야 확률이 높지만, 나처럼 약발이 떨어진 경우에는 상대의 몸놀림만으로 

궁금증을 풀어 선견을 메꾸는 편이다. 

" 안녕하세요 도사님. "

제 딴에는 조신해 보이고자 양무릎을 한 곳으로 모아 방석 위에 둔부를 눌러 앉히는데 제법 큰 키라 영 어색하다.

이 곳에 오는 여자들이 그러하듯 짧은 치마는 입기 어려웠을 것이고, 무릎께까지 내린 길이지만 몸매가 드러날만치

폭이 좁은 옷이라 운신하기는 불편해 보인다.

" 어찌 왔누.. "

첫 대면서부터 아랫사람 대하듯 말을 놓아야 요리하기가 좋은 법이다.

격식을 차린다고 변호사와 의뢰인처럼 예의를 갖춘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고객은 투사처럼 변하기 십상이다.

하다못해 시장에서 손님을 상대로 장사할지라도 친한 이웃 대하듯 곰살맞게 대해야 판매하기가 용이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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