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금만 마셔, 이 년아.. "
" 또 그런다, 술 맛 떨어지게.. "
" 그래, 냅 둬.. "
군함의 선상에서 이것저것을 둘러보다 회집으로 왔더니, 토요일이라 그런지 넓은 홀에 제법 손님들이 드문드문 있는
편이다.
아직 여고 2학년이지만 어렵게 생활을 꾸려가던 미경이 밑에서 다소 자유롭게 큰 때문인지 제법 술을 들이킨다.
벌써 소주가 3병이나 비워졌기에, 미경이가 제 딸에게 눈총을 줘 보지만 콧방귀도 뀌지 않는 유정이다.
오히려 화장기가 없는 미경이의 뺨에 발그스레 술 꽃이 피어 유정이와 대조를 이룬다.
예전 밤무대에 나가야 했을때 덕지덕지 화장을 떡칠한 것과는 다르게 그윽해 보이기까지 하다.
" 저기, 혹시 탈렌트 아니신가요? "
셋이서 토닥거리며 쓸데없는 기싸움을 하는 중인데, 옆자리에서 술을 마시던 해병대원 하나가 불쑥 끼어든다.
" 그렇긴 한데, 무슨 일이신가? "
얼룩달룩 군복을 입은 해병대원 뒤로 그의 일행인 듯, 같은 제복의 군인 둘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 저번주에 TV에서 유정씨를 봤습니다, 긴가민가 동료들이랑 한참 얘기를 나눴는데.. 실례가 안된다면 싸인 좀
받고 싶어서.. "
벌써부터 남들이 알아볼 만큼 TV라는 매체는 그 여파가 가히 상상을 불허한다.
" 자네 몇기지? "
" 네, 1154깁니다.. "
느닷없이 깃수를 물어가자 경각심을 느꼈는지 목소리에 절도가 붙는다.
흔히 해병의 일원이라면 느끼는게지만 기수를 물어올때는 거의 같은 선배라고 봐도 무방하다.
" 우리 유정이를 이쁘게 봐 줘서 고맙네, 그리 앉아.. 유정아, 니가 술 한잔 따라 줄래? 나라를 지키는 군인인데
그 정도는 해 줘야지.. "
" 감사합니다.. "
졸지에 TV에서 보던 유정이에게 술을 받게 된 해병이 감격에 겨워서는 절로 입가에 미소까지 번진다.
어찌보면 유정이가 그만큼 인기가 있다는 뜻일게고, 젊은 시절 국방의 의무를 해야하는 그에게 작은 즐거움이나마
선사하고 싶었다.
" 됐어, 후배니까 그런 특혜를 주는거야.. "
" 필씅~~ "
넉살좋게 자리에 앉으려던 해병 대원이 부동자세를 취하더니 횟집이 떠나가도록 고함을 질러댄다.
" 아~ 그만 앉아, 번거로운건 싫어.. "
" 호호~ "
" 네, 선배님.. "
" 술 받으세요.. "
갑자기 나타나긴 했지만, 이제 막 연예계에 발을 디딘 유정이를 알아봐 주는 덕에 불청객은 아니지 싶은 마음이다.
미경이나 유정이도 자신을 인정해 주는 팬이 있음에 흐뭇한 표정들이다.
" 네, 영광입니다.. "
" 무슨 영광까지.후후.. 이제 고등학생일세, 이 친구야.. "
" 아, 네.. "
" 들게, 시원하게 들이키고 동료들에게 건너가.. 우리 얘기를 자네가 끊었잖어.. "
" 네, 선배님.. "
더 데리고 있어봐야 득이 될건 없다. 아무리 팬을 자처하는 군인이지만, 우리들만의 술자리에 계속 끼여줄수는
없는 노릇이다.
" 유정아, 군인 오빠한테 싸인해 줘.. "
" 응, 삼촌.. "
느닷없는 행운을 만끽한 해병이 제 동료들에게 돌아가 한참 무용담을 펼치는 모습이 보기에 좋다.
" 어~ 취하네.. 그만 가자, 동훈씨.. "
" 엄마는.. 이제 막 술빨 받기 시작인데.. "
" 근데, 이 년이.. "
술기운이 오르는지 자리를 파하자는 미경이의 조름에 다시금 모녀들의 기싸움이 시작되려 한다.
" 그래, 이만 들어가자.. 내일은 일찍 일어나서 전등사 구경이라도 해야지.. "
모처럼 나선 나들이라 미경이나 유정이는 마냥 들 뜬 표정들이지만, 기실 그동안 바쁘게 사무실을 키워내느라 내심
피곤하기도 했거니와 처리해야 할 일이 늘어남에 따라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겸사겸사 모녀들과 이 곳 별장으로 오게 된 연유이기도 하다.
" 우리 한잔 더 하자.. "
" 취한다면서.. "
별장으로 돌아 와 모녀가 번갈아 욕실에서 샤워를 한다고 부산을 떨더니, 안방으로 들어온 미경이가 코맹맹이 소리를
해 댄다.
" 아이~ 자기는 눈치도 없냐, 유정이 년 빨리 재워야지.. "
" 에구, 그러셨어? 뭔 여자가 자꾸 뻔뻔해 진다니.. "
제 딴에는 별장까지 와 콧바람을 쐰 터에 은근한 감상에 빠지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녀의 속내가 들여다 보여 쓴 웃음이 배어 나오긴 했지만, 한편으로 그런 보챔이 살갑게도 느껴진다.
결국 못이기는 척 미경이의 바램대로 작은 교자상에 술과 안주를 마련해 안방에 마주 앉았다.
" 자, 건배하자.. "
" 이런~ 유정이 듣겠다, 목소리 좀 낮춰.. "
제 딸인 유정이한테는 술이 취했노라며 거짓말까지 둘러대고는, 둘이서만 오붓하게 술자리를 이어 간다는 것이
조심스럽기만 한데, 그녀는 마냥 당당하기만 하다.
" 호호.. 귀여워.. "
" 귀여워? 내가? "
" 그렇지, 그럼.. 유정이 눈치보는 거잖어,호호.. "
" 당연하지.. 유정이가 알아봐라, 치사한 어른으로 몰릴텐데.. "
" 걔도 다 컸어.. 알면서도 피해준거야, 이 바보야.. "
" ................. "
" 우리 아파트로 이사한 날 그러더라.. 좋은 아저씨 같다면서 꼭 잡으라고.. "
그 정도까지는 몰랐다. 그 동안 미경이 집에 드나 들면서도, 이미 훌쩍 커 버린 유정이지만 웬지 조심스러운 맘에
나도 모르게 눈치를 보곤 했다.
어른들이야 그렇다 치지만, 괜시리 어린 유정이의 눈에 떳떳치 못하게 비쳐질수도 있지 싶어 운신이 자유로울수는
없었다.
그래서 조심 아닌 조심을 했던것인데, 미경이의 설명을 듣고 보니 그간 쓸데없는 기우를 안고 살았지 싶다.
" 흠~ 그랬단 말이지.. "
" 응.. 그리고 자기한테 고맙더라, 유정이 맘 다치지 않게 하려고 신경 많이 써 주는거 알어.. "
" 당연하지, 한창 예민할 땐데.. "
" 유정이 눈에도 그게 보였을거야, 자기를 많이 따르잖어.. "
그저 어리게만 봤는데, 딴에는 제 속에도 나름의 판단은 가지고 있을것이다.
" 잘 키워야 돼, 지금이 가장 중요해.. "
" 난 자기 믿어, 앞으로도 부탁해.. "
무릎 걸음으로 다가 온 미경이가 내 무릎에 올라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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