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젊은 여자라니.. "
" 아버님 취향도 참 별나더라, 별로 이쁘지도 않더만.. "
" 이상하다, 그 짠돌이가 그럴리가 없는데.. 확실해? "
" 완전히 제 정신이 아니더라니까.. "
피씨방에 돌아 온 미영이가 조금 전 여의도에서 목격했던 시아버지의 행실을 정호에게 전해줬다.
정호에게 남겨 질 재산인데, 일면식도 없는 엉뚱한 계집이 채 가는건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 그 정도야?
" 완전히 푹 빠졌어, 그냥 호호 불고.. "
" 한번도 그런일은 없었는데.. "
" 자기가 한번 알아봐, 그냥 놔둘순 없잖어.. "
시아버지의 재산은 남편이 될 정호에게만 물려져야 하고, 그것은 곧 나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
여지껏 살아 오면서 친구들이나 형제조차에게도 소소한 장난감 하나 뺏겨 본 적이 없는 미영이다.
웬만큼은 살아가는 시댁이기에 정호와 결혼까지 하기로 한 이 마당에 그냥 두고 볼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 그러다 말겠지.. "
" 그러다 말기는.. 오빠도 똑같애, 어쩜 부자지간에 맺고 끊는게 없을까 몰라.. 그러다가 아버님이 그 년한테 한 재산
떼 주기라도 하면 어쩔건데.. 그 커피숍도 아버님이 차려준게 틀림없다니까.. "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모든 일에 그저 만만하고 대충 넘어가고자 하는 정호를 이대로 둘수는 없다.
그런 그를 확실하게 내 손아귀에 틀어 쥐어야만이 시댁의 재산을 온전히 지킬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 알았어.. "
" 꼭 여시같이 생긴게, 어디서 함부로.. "
" 어때,맛있어? "
" 응,쫄깃쫄깃한게 입에 착착 붙네.호호.. "
" 에구~ 누가 술꾼 아니랄까 봐.후후.. "
" 누가 날 이렇게 버려 놨는데.. 다 너 때문이잖어.. "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떠 온 회를 먹으면서 윤수랑 술을 마시는 중이다.
제법 맛깔나는 안주를 먹다보니 술잔을 부디치는 횟수가 늘어만 간다.
" 핑계는, 처음부터 술꾼이었으면서.. "
" 그래서 싫어? "
" 누가 싫대.. 벌써 술 취했나, 들이 대기는.. "
아무렇게나 버릇없이 굴어도 항시 포근하게 감싸주는 윤수가 미더워 보인다. 이제 며칠후면 그가 마련해 준 커피숍을
오픈하고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된다. 살뜰하게 모든 편리를 봐 주는 그가 남 같이 느껴지지가 않는건 당연하다.
새로이 만나기 시작한 남자 친구와의 연애 상담까지 자청하는 그였다. 30년이 넘는 나이차 때문에 더 가까운 인연으로
이어지지야 않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다시없이 믿음직한 사람이다.
" 나 흉보지마.. 니가 편해서 그래, 항상 고마워.. "
" 진짜 취했네, 안하던 짓까지.. "
"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날 이뻐해 주는데 난 그저 받기나 하구.. "
한없이 챙겨주려는 그의 마음이 너무나도 고마워 괜시리 찡해지며 감정이 복받친다.
" 니가 옆에 있어줘서 내가 더 고맙지, 이 바보야.. 울기는.. "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겨 앉은 윤수가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고는 등까지 토닥여 준다.
" 진짜 취했나 봐, 내가 왜 이런다니.호호.. "
" 그러게, 너답지 않아.. "
" 나 다운거? 그게 뭔데.. "
" 씩씩하잖어, 도도하고.. "
처음 만나게 됐을때 나이 많은 그의 들이댐이 어이없고 우스워 보여 깔보듯 함부로 대하기는 했다.
그런 나를 도도한 여자로 본 모양이지만, 윤수야말로 내 성격을 모르고 하는 소리일 뿐이다.
실상 찢어지게 가난했던 집안 살림과 가출해 버린 엄마로 인해 소심하게 어린시절을 보내야 했고, 간신히 여고를 마친
후에도 날 받아주지 않는 세상과의 괴리로 인해 자신감마저 잃고 우울하게 지냈던 지난날이다.
그런 나를 윤수는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양 끔찍하게 아껴줬고, 항시 내 기분을 우선시 하곤 했다.
윤수의 그런 아낌이 날 우쭐하게 했고, 나이 많은 그를 당당하게 맞서게 하는 계기가 된지도 모른다.
" 피~ 너한테나 그러지, 나 원래 안그래.. 니가 나를 이렇게 만들어 논거야.."
" 지금이 딱이야, 얼마나 이쁜데.. "
" 에구, 하여간에.. 나도 니가 좋아, 널 놔두고 남자 친구를 만나는 것도 미안하고.. "
얼마쯤은 그런 감정이 있는것도 사실이다. 어찌 될 인연이 아니기에 막연하게 만나고는 있지만, 윤수가 내게 베푸는
마음이 진실됨은 익히 알고 있다.
다마 그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면서도 그저 몸만을 줄수밖에 없는게 미안할 따름이다.
오늘만 하더라도 윤수의 전 부인을 만났을때 나도 모르게 이중적인 잣대를 대기도 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었겠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는 그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여자는 나 뿐이라는
생각이 고개를 쳐 들었고, 윤수의 뒤에 숨어지낼수 밖에 없는 처지가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윤수는 내 소유라고 당당하게 권리를 주장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는 내가 한없이 초라해지는 느낌이었다.
" 난 괜찮어, 신경쓰지 마.. "
" 그게 아니구.. 아까 니 와이프.. "
" ...애 엄마? 왜.. "
" 얘기하고 싶었어, 니가 내 남자라고.. 근데 안되잖어, 우리를 이상하게 볼테니까.. 속상하더라.."
" 그랬어? "
" 응.. "
" 그랬구나.. 몰랐어, 그런 생각까지 했는지.. "
언제부터인지 일편단심 변함없이 아껴주는 윤수를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게 됐다. 단지 물질적인 도움을 받아서만은
아니었다.
유부남인줄 모르고 마음을 줬던 백천이에게 배신을 당한 날, 화풀이를 대신 받아 주면서도 묵묵히 내 아픔을 감싸 안고자
하는 윤수에게 한없는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이 어린 나에게 대책없이 당하면서도, 내 슬픔보다 더 가슴아파 하던 그의 마음이 들여다 보이면서 그런 그의 애뜻함이
내 마음 깊숙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그와 어떤 언약이야 할수는 없지만, 그런 감정까지 숨길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내내 나를 일깨우곤 한다.
이런 진실된 사람을 몰라보고 이혼을 한 그의 전 처앞에서 윤수는 내 사람이라고 외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애써 누를수 밖에 없었던 그 현실이 마냥 우울한 지금이다.
" 나 너 많이 좋아해, 진짜야.. "
" ...고맙다.. "
" 진짜라니까.. "
" 그래.. 그래서 고맙다구.. "
" 바보, 고맙긴.. "
" 고맙지, 나같은 꼰대를.. "
나이가 많다는 이유 하나로 어린 나에게 쩔쩔매는 윤수를 보면 괜히 미안한 맘이 생기기도 했다.
" 또, 그런다.. 윤수야.. "
" 응? "
" 키스하고 싶어.. 잠깐만.. "
식탁에 놓여진 잔을 들어 입안에 소주를 머금고는 윤수의 입에 술을 흘려줬다.
졸지에 술을 마시게 된 윤수가 잠깐 멈칫하는가 싶더니 이내 목 안으로 넘기는듯 하다.
" 어때, 좋아? "
" 응, 훨씬 맛있네.후후.. "
" 자, 이것도.. "
회 한점을 맨손으로 집어 초장에 찍어 윤수의 입에 먹여주면서 집게 손가락 하나를 같이 디밀자 맛나다는 듯 빨아댄다.
이렇듯 변함없이 나를 아껴주는 윤수를 조금이나마 기쁘게 해 줄수만 있다면 그 어떤 애교라도 부리고픈 마음이다.
" 우리 둥이 땜에 오늘 호강하네.후후.. "
" 둥이? "
" 응,귀염둥이.. 앞으로는 둥이라고 부를래.. "
" 버릇없이 누나한테, 둥이는 니가 둥이지.. "
" 그런가? 후후.. 그러네.. "
" 윤수야.. "
" 왜, 누나.. "
" 나 하고 싶어, 옷 벗겨 줘.. "
적당하게 취기가 오른 지금 윤수가 맛있는 먹이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