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래의 친구들이 사회적인 기반을 잡거나, 안정된 가정생활을 꾸려가는걸 보면서도 그네들과 다른 삶을 살아가는건 나에게
주어진 운명이려니 생각했다.
특수부대에 근무할때나 작은 회사에서 직장생활을 할때는, 그나마 맡은바 직책에 나름 열심히 매진도 했던것 같다.
그러나 한번의 결혼생활이 어긋나고, 앞날의 청사진도 없이 그저 밋밋하게 하루 세끼만 축내면서 세월을 보낸다는 생각에,
스스로 인생의 엑스트라 같은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그러던 차에 동네 지인의 도움으로, 자그마한 공터에서 얼기설기 지붕을 얹고 포장마차를 차려 근근히 살아가는 중에
어느날 미진이가 긴 장마뒤에 오는 따사로운 햇살처럼 다가왔다.
오랜 시간을 남들에게는 보여주기 싫은 외로움을 감추고 살아왔던 차라, 느닷없는 행운처럼 다가와 준 그녀에게 긴가민가
확신이 없기도 했지만, 나도 남들처럼 행복한 가정을 가질수 있다는 생각에 남몰래 설레기도 했다.
새록새록 미진이의 통통튀는 애교스런 움직임을 지켜보는 낙에 빠지기도 했고, 나도 모르게 실없이 웃는 통에 영식이에게
놀림을 당하기도 했다.
미진이가 그 몹쓸짓을 당하고 실어증으로 말을 못하는걸 지켜보면서, 늦게나마 소박하게 살아보려던 작은 꿈을 짓밟아 버린
놈들에게 그 아픔을 되돌려 주고자 했을때, 마치 자신들의 일처럼 마음을 써 준 사람들이 오늘 나와 함께 있다.
그리고 보니 내 주위에도 괜찮은 사람들이 꽤나 많은 편이다.
못난 나를 무슨 영웅시 하는 영식이와 그날 홍경장을 납치할때 도움을 줬던 후배들, '모래시계'의 사장 연숙이와 그녀의
동생 춘식이까지 모였다.
" 고마워서 불렀어.. 술이나 한잔씩 하자.. "
인원이 12명이라 둥그런 테이블을 세개나 붙여야 했다. 미희와 혜영이가 연신 꽃등심과 차돌백이를 구워대느라 바쁘고,
빈 소주병들이 늘어난다.
" 어 ~ 저 놈 짤렸네.. "
영식이의 말에 고개를 돌려보니 7시 저녁 뉴스에 홍경장의 형 된 인물이 나오면서, 그 밑에 자막으로 '청와대 경호실 소속
홍모씨 문책상 경질, 대통령 크게 대노해..' 란 글씨가 지나가고 있다.
" 당연히 짤라야지, 저런 놈을 그냥 놔두면 안되지.. "
연숙이 동생 춘식이의 말에 이어, 자막이 지나 갈때마다 모두의 시선이 TV로 모아 진다.
" 서장도 짤리겠는데.. "
화면에 내가 하룻밤을 지샌 경찰서가 비쳐 지더니, 사건이 일어난 관할 경찰서장을 대기발령 했다는 뉴스가 나오면서, 소속
경찰관을 단속하지 못한 서장의 책임론까지 뒤 따른다.
" 그나저나 형님이 유명 인사가 됐네.. 오늘 하루종일 형님 얘기 뿐이야.. "
" 저기 스님이 오시네.. "
TV에 빠져 모두의 시선이 그곳에 몰려 있는 중에 청송스님이 가게로 들어선다.
" 어허 ~ 이 중생들 보게나.. 이 좋은 날에 곡차를 마시면서 나를 빼 놓다니, 경을 칠.. "
" 어서 오세요.. "
" 우리 보살님이 아니었으면 그냥 지나칠뻔 했네.. "
" 자기가 땡중한테 연락했어? 평생 술값도 안 내는 저 고주망태가 뭐가 이뻐서 연락을 하냐.. "
" 이런 고약한.. 불자한테 말버릇 하곤.. "
" 호호.. "
" 미진아 ~ 빨리 막걸리 좀 내 와라.. 저 땡중 입에서 또 악담 쏟아질라.. "
술이라야 막걸리만을 좋아하는 청송스님이다. 본분은 지켜야 한다면서 고기는 입에 대지도 않았다.
미진이가 막걸리 병마개를 따고는 스님에게 술을 따라준다.
청송스님이 같은 종파의 스님들과 함께, 검찰청에 몰려가 피켓시위를 했다는 얘기도 전해 들었다.
" 앞으로가 더 중요해.. "
막걸리 한 사발을 숨도 안쉬고 입안에 털어넣고, 썰어놓은 오이 하나를 입에 문 땡중이 나지막하게 말을 꺼낸다.
" 그건 또 무슨 염불이야? "
" 몸가짐을 조심하란 뜻이야.. "
" 내가 뭘.. 그럼, 지금까지는 엉터리로 살았단 얘기야? "
"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네, 그려.. "
" 아니.. 이런 땡중이.. "
" 앞으론 쓸데없는 일에 나서지 말고, 자중하도록 해.. 바람 잘 날없는 사주야, 시주는.. "
" 자세히 좀 얘기해 주세요, 스님.. "
옆에서 듣기만 하던 미진이까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나섰다. 미진이 뿐만이 아니고 혜영이나 영식이까지 귀를 기울여
바싹 다가 앉았다.
" 타고 난 사주가 순탄치가 못 해.. 크게 다칠일은 없겠지만, 주위 사람들이 자네를 많이 찾을거야.. 그거야 당신이 원한게
아니지만, 뿌리 칠수도 없을게고.. "
" .................... "
" 자중해.. 그러면 별일 없을테니까, 지금도 잘 하고 있긴 하지만.. "
" 하여간에.. 머리에 든게 많은 인간들은 이해가 안 된다니까.. 뭔 말을 하는건지, 수수께끼를 내는 건지.. "
" 앞으로 또 나쁜일이 있을까요? 그러면 안 되는데.. "
미진이가 걱정이 많은 듯 울상이다. 험한 일을 겪고 난 미진이의 표정에, 또 다시 근심이 어리는걸 보니 부아가 치민다.
" 이 봐, 땡 중.. 당신이 아무리 말려도, 다시 한번 이런 일이 있으면 몽땅 죽여버리고 나도 가면 그만이야.. 더 이상 날
화나게 하는 놈이 없었으면 좋겠어.. "
" 이런.. 나이를 어디로 먹었대, 쯔쯔..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하면, 그게 화가 되는 이치도 모르는 중생이라니, 허허.. "
" 난 그런거 몰라.. 건드리지만 마.. "
" 내일부터는 열심히 할께.. "
진심으로 나와 미진이의 앞길을 빌어주던 이도 있었고, 지난일은 모두 잊으라며 위로를 해 주는 이도 있었다.
그네들과 회식을 하면서 찐한 동질감을 느꼈고, 다시한번 그들의 사심없는 우정을 받아 들였다.
오랜만의 소중한 시간이었고 장사까지 할 마음은 없었던 터라, 아쉬운 시간을 접고 미진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장모님을 뵙고 큰 절을 올렸고, 초희랑 넷이서 가볍게 음식상을 차려 한잔 하는 중이다.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미진이가, 번듯하게 가게를 차려놓고도 변변히 장사도 못했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 똑바로 해.. 오빠한테 딸린 식구가 셋이야.. "
" 알았다니까.. 돈 많이 벌어다 준다구.. "
" 에그 ~ 그저 남들 불러다 먹이는데만 정신을 판다니까.. "
주위 지인들과의 모임을 옆에서 지켜보며, 본인 역시 내내 흐뭇해 했으면서도 은근히 강짜를 부리는 것이다.
" 바가지가 많이 늘었다, 좀 적당히 해.. 어디 겁나서 살겠니? "
" 오빠는 단단히 죄어야 돼.. 아까 스님 말씀 들었잖어, 쓸데없는 곳에 기웃거리지 말라고.. "
강짜를 부리는 그녀의 속내가 이제서야 이해가 된다. 또 다시 힘든 일을 겪고 싶지 않다는 바램으로 들린다.
" 그래, 이제는 두 사람 모두 좋은일만 있어야지.. 나도 얼마나 가슴을 졸였나 몰라.. "
" 죄송합니다, 장모님.. "
미진이가 나쁜 일을 당하고 실어증으로 입을 닫아버린 그 순간에도, 남 몰래 속이 썩었을 장모님이다.
그저 죄송하다는 표현 이 외에는, 달리 그 무엇으로 그 분이 겪었을 아픔을 달랠 말이 없었다.
" 아닐세.. 앞으로만 잘 살아준다면 얼마나 좋을꼬.. "
" 네..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
" 에그 ~ 그저 철이 없다니까.. "
" 그래, 미안하다.. 철이 안 나서.후후.. "
가능하다면 미진이의 투정을 모두 받아 줄 작정이다. 못난 나에게 인생을 맡긴 여인이다.
" 다 먹었으면 빨리 씻어 줘.. "
" ....지금? "
뒤 늦게 그녀의 말을 알아 들었다. 경찰서로 가기전에 미진이의 발을 닦아 주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 매일 씻어 준다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