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만에 회사로 출근을 하는 전철안에서 많은 생각이 떠 올랐다가 사라진다.
이제는 삶의 한 부분이 되어버린 아련했던 첫사랑의 그녀를 만났고, 그녀에게 품었던 연정을 현실로 끌어내 나름 행복한
시간을 지내고는 있지만, 온전치 못한 정희의 요즘을 보는게 힘이 드는 준호다.
어릴적 나만의 여신이였던 그녀가 살고있는 그 곳은, 당연히 맑고 아름다운 호수여야 했다.
생기차고 발랄한 그녀가 본인만의 매력을 발산하며, 그 곳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며 유영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가 머물러 있는 그 곳은 혼탁한 진흙탕 물과 다를바가 없다. 어찌 그리도 여린 그녀를 괴롭히는 못된
이무기들이, 물을 흐려 놓는지 준호로서는 참고 있기가 힘들었다.
그녀를 그런 탁한 구렁텅이에서 꺼내, 그녀에게 어울리는 맑고 깨끗한 호수로 돌려 보내고 싶은 것이다.
" 미스 리~ 여기 커피 좀 줘.. 다 끝냈어? "
" 네, 대충.. "
영철이 선배와 회의실 탁자에 앉아, 만들어 간 프로그램을 usb를 통해 보며 논의를 하는 중이다.
요즘 들어, 사용자의 음성인식이 되는 핸폰과 네비게이션이 나름 정착을 하게 됐다. 하지만 그 용도가 다소 식상하고
평범하다 보니 더 큰 메리트가 없이 주춤거리는 중이다.
" 몇가지나 되는데? "
" 음성 시스템은 무한정으로 써 먹을수 있지만, 아무래도 유명 연예인의 목소리를 흉내내는게 잘 먹힐거야.. 그 외에도
어린아이들 목소리나, 만화 캐릭터 같은 음성을 집어넣긴 했는데 선배가 한번 들어보고 결정해요.. "
네비게이션이나 핸폰을 만드는 회사와 구체적인 협상이 이루어 진건 아니지만, 오늘 가져온 프로그램을 토대로 그들에게
어필은 할수 있을것이다.
그네들과 본격적인 협상 단계에 들어가면, 좀 더 기술적인 문제를 보완하고 지적 보호권도 행사하게 만들면 될 것이다.
" 일단 커피부터 마셔, 자세한 얘기는 이따가 점심이나 먹으면서 하자구.. "
" 네.. "
사무실 아가씨가 준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있자니, 아침부터 내린 커피만 마시는 그 녀의 모습이 떠 오른다.
" 그리고, 언제 술 한잔 해야 할거야.. 우리 정사장이 널 한번 보고 싶다네.. "
" 난, 별론데.. "
" 그러면 안돼.. 명색이 돈을 투자한 사람인데, 기술이사와 서로 얼굴도 모른대서야 말이 안되잖어.. "
" 그래도 싫어요.. "
" ................... "
" 목소리 인식장치를 활용하면, 사용자가 직접 핸폰이나 네비에 자신이 하고싶은 얘기까지 녹음시켜 재생하게끔 할수도
있으니까 참고 해요.. "
내가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숫기가 없는게 탈이다. 주위에 변변한 친구 하나 없으니 말이다.
모르긴 해도 정사장이란 인물을 만나도 별로 할 얘기가 없겠지만, 그 역시 그런 나를 일종의 희귀 동물로 볼수도 있기에
새로운 사람과 대면한다는게 부담까지 되는 것이다.
준호가 집을 나서는걸 거실 창을 통해 지켜보던 정희는 문득 허전해 진다.
어느새 준호가 내 생활의 일부분처럼 자리매김을 하게 됐는지, 그의 외출마저 달갑지가 않은 것이다.
실소를 금할수가 없다. 그를 만나기 전에는 홀로 집을 지키며, 남는 시간동안 음악에 빠져 위안을 삼았더랬다.
이제는 홀로 음악을 듣는것도 시들해 진다. 그가 내 무릎을 베고 누워, 음악에 맞춰 흥얼거리곤 하던게 버릇이 됐는지
예전에는 나만의 휴식을 만끽했던 그 호강마저 이제는 흥미가 없음이다.
아침을 먹고 남겨진 그릇들을 치우면서, 그와 처음 몸을 섞은 그 날의 기억이 새롭다.
" 저기.. 한번 맡아봐도 될까요.. "
" 어디를.. 거기를 직접? "
" 네.. "
수줍어 하며 개구장이 같은 욕심을 내 보인 준호가 너무나도 귀여웠고, 또 나 자신 알수없는 기대감에 몸을 떨었었다.
뜨거운 입김을 연신 불어대며 냄새를 맡고 있던, 준호의 혀가 그 곳을 부지런히 돌아다니게 되면서부터 참을수 없을만큼
희열이 몰려 왔었다.
지금 역시 설거지를 하면서도, 준호와 부디쳤던 그 기억만으로 아래가 흥건히 젖어 옴이 느껴진다.
또 한번 실소를 머금게 되는 정희였다. 고무 장갑을 벗고는 의자에 앉아 키친 티슈로 젖어버린 그 곳을 닦아야 했다.
조금 전에도 이 식탁 의자에서 부둥켜 안고는, 졸지에 벌린 정사의 흔적으로 남은 밤꽃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다.
대충 집안일을 한 정희는 음악을 듣는 대신,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준호가 기거하는 다락방으로 올랐다.
이 좁디 좁은곳에 숨어서, 나를 지켜보며 홀로 지냈을 준호의 마음이 와 닿아 가슴이 저민다.
달랑 남겨진 노트북만이 외롭게 공간을 채우고 있다. 전원을 켜고 그가 지켜보았을 집안 곳곳을 살펴보기로 했다.
자신의 옆에 머물고 싶다며, 이 좁은 공간에서 숨을 죽인채 내 움직임을 낱낱이 지켜봤을 그의 마음을 헤아려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후 늦게, 일반 회사들의 퇴근시간에 맞춰 거리로 나섰다. 정희에게서 받은 남편의 명함을 들고, 그의 회사가 있는
주소를 찾기로 했다.
만년필처럼 생긴 소형 안테나를 안 주머니에 갈무리 하고, 리시버를 귀에 꽂았다.
마침 주소가 같은 논현동이라 찾기는 그닥 어렵지 않아 보인다.
남편이 차를 타기만 해도, 1키로 반경 안에서는 통화하는 내용을 들을수 있을것이다.
얕으막한 언덕 뒤 골목에서 명함에 적혀있는 주소를 찾을수 있었다. 4층짜리 작은 건물 앞에 그의 차가 보인다.
골목 입구 2층에 작은 커피 전문점이 눈에 들어온다. 골목이 내려다 보이는 창가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 어디야.. ~~
~ 왜요? ~~
그녀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리시버를 한쪽 귀에 꽂은채 답신을 보냈다.
~ 이따 오면 나한테 혼날줄 알어, 각오해.. ~~
~ 무슨 일인데요? ~~
~ 지저분한 걸 컴에 담아 놨잖어.. ~~
~ 거기 어딘데요? ~~
~ 어디겠어, 다락방이지.. ~~
이제서야 무슨 말인지 감이 온다. 며칠전에 술에 만취한 그녀가 오줌을 눈 세숫대야와 함께, 널브러진 모습까지 사진을
찍어 컴퓨터에 저장을 시켰던 것이다.
~ 모두 지울거야.. ~~
급하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녀의 토라진 듯한 목소리가 들린다.
~ 왜.. ~~
" 그거 지우면 안돼요.. "
~ 준호, 변태지.. 내 허락도 없이 그런걸 찍으면 어떡해? ~~
" 하여간에 지우면 안돼요.. "
~ 싫어.. 망측해서 못 보겠어.. ~~
" 안돼요.. 단순히 그것만 담겨진게 아니란 말이에요.. "
~ ...................... ~~
그때 귀에 꽂혀있는 리시버에 차문을 여는 소리가 들린다.
" 잠깐만요.. 지금 나가 봐야 하니까, 그 사진 지우지 마세요.. 이따 핸폰할께요.. "
급하게 계산을 치루고는 골목 입구로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