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보다 먼저 시댁에 들어선 정희는, 주눅이 든채 그네들의 싸늘한 시선을 받아야 했다.
명절이라면 부엌에 가서 일손이나마 거들텐데, 못 볼 꼴을 본 것 같은 그네들의 냉랭한 시선을 받고 있자니 사면초가에
내 몰린 기분이다.
" 결혼할 사람은 뭐하는 사람이야? "
" 그게 아줌마가 왜 궁금할까? "
" ..................... "
" 형수가 남자들한테는 관심이 많지.흐흐.. "
서로간의 마음을 열고 싶어 말을 건넸지만, 그네들에게서 돌아온 반응은 상상을 초월했다.
" 무슨 말을 그리 심하게.. "
" 에잉~ 내숭은.. 우리 형을 꼬셔서 친정으로 돈 빼 돌릴땐 언제고 순진한 척은.. "
" 그러게 말이예요, 삼촌.. "
" ..................... "
너무나도 기가 막혀 입이 얼어 붙었다. 자신의 형과 자신의 아버지가 같이 사는 여자한테 막 말을 서슴치 않는 그들의
정신세계가 신기할 뿐이다.
그로부터 2시간이 넘도록 입을 봉한채 그들의 멸시어린 눈총을 받아내야 했다.
생각 같아선 그대로 이 곳을 뛰쳐 나가고 싶었지만, 남편에게서 돌아올 보복이 두려운 나머지 그 모진 수모를 고스란히
당해야 했다.
오후가 늦어서야 동생집에 나타난 남편과 시동생의 언쟁을 또 다시 지켜봐야 했다.
" 형한테 하나밖에 없는 핏줄이야.. 그 까짓 돈 몇푼으로 시집을 보낸단 말이유? "
" 나도 별로 사정이 안 좋아.. 지금 나한테는 그 만큼도 벅차.. "
" 나이 어린 형수하고 누구 씨인지도 모르는 꼬맹이한테는 잘하고 있잖어.. "
차라리 귀를 막고 싶었다. 입에 담지 못할 폭언이 내 가슴을 후벼파고 있다.
" 근데, 이 자식이.. 니가 뭘 안다고 그런식으로 떠드는거냐? "
" 뻔하잖어, 젊은 여자 치마속에 몽땅 들이 붓겠지.. "
" 너.. 말조심 좀 해, 뚤린 입이라고 함부로 놀리지 말고.. "
" 한번 물어봅시다, 형수.. 내 말이 틀렸수? "
결국 분을 삭이지 못한 남편이 시동생의 뺨을 후려쳤고, 시동생이 남편의 멱살을 잡으면서 집안은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 야~ 선우 제법이다.. 다리힘이 나보다 더 좋아, 나중에 축구선수 해도 되겠네.. "
허공에서 레일에 매달려 있는 자전거를 둘이서 같이 탔다. 어린애가 높은곳에 떠 있으면서도 겁이 없는지, 신이 나서
페달을 밟아댄다.
오히려 밑에서 구경하는 선영이가 조바심을 내며 올려다 보는 중이다.
대공원을 절반이나 돌며 놀이기구와 각종 동물들을 구경하고 다녔는데도 아직도 선우의 눈은 빛나고 있다.
" 아저씨.. 우리 언제 밥 먹어? "
" 선우가 배가 고픈 모양이네.후후.. 뭐 먹을까? "
" 햄버거.. "
" 그래, 가자.. "
그토록 재밌어 하며 지칠줄 모르던 선우가, 집에 돌아가기 위해 탄 택시 안에서는 깊은 잠에 빠져 버린다.
조수석에 앉은 선영이가, 택시기사에게 집으로 가는 길을 설명해 주고 있다.
어느 덧 해가 기울어 정희의 집으로 가는 골목길에 접어 들었을때는 택시의 전조등을 켜야만 했다.
" 정말 고마워요.. "
정희가 대문 밖으로 나왔다. 느낌이지만 선우를 감싸 안은 그녀가 초조해 보인다.
" 아뇨, 선우땜에 저도 즐거웠어요.. "
" 선영이도 이만 가라, 너무 늦었어.. "
" 응, 이모.. 갈께.. "
그녀의 남편이 또 다시 정희를 괴롭힌 것만 같아 심란스런 와중이지만, 선영이와 함께 골목길을 되돌아 나올수밖에 없었다.
주택단지를 벗어나 지나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중이다.
" 가볍게 맥주는 어때요? "
" 맥주라면.. "
사당역에 위치한 라이브 카페로 갔다. 어느새 퇴근시간이 지난지라, 그 넓은 홀이 손님들로 붐비고 있었다.
술에 자신이 있는지 생맥주 2,000 cc를 시키더니 제법 마시기 시작하는 선영이다.
" 주량이 얼만지 체크해 본 적도 없나요? "
손잡이가 달린 작은 조끼에 맥주를 부어 자작을 하던 선영이가 묻는다.
" 네, 아직.. "
" 에이~ 남자들은 여자들한테 술을 먹이지 못해 안달이라던데.. "
맥주를 연거푸 마셔서일까, 오늘따라 제법 말이 많다. 술의 힘을 빌린 그녀의 뺨도, 붉으스레 한것이 보기에 좋다.
" 너무 재미없죠? "
" 네.. 어머~ 호호.. "
" 미안합니다, 재미 없어서.후후.. "
" 대신 진실돼 보여요, 겉치레도 없고.. 뭐랄까, 허풍과는 담을 쌓았다고 해야 하나.호호.. "
술의 힘이 좋은 점도 있기 마련이지 싶다. 오늘은 선영이가 얘기를 주도하고 있다. 다른 날과 달리 어색할 새가 없다.
" 잘 봤어요, 그런건 익숙치가 않아서.. "
" 아버님이 재혼 하셨다면서요.. "
" 네, 그렇죠.. "
" 그럼.. 결혼해도 아버님과는 같이 안 사시겠네요.. "
" 그럼요.. 아버지도 신혼이신데.. "
" 어머~ 좋으시겠다, 그 연세에.호호.. "
~ 어디야, 빨리 와.. ~~
정희의 메시지가 왔다. 아쉬워 하는 선영이를 택시로 배웅하며 미안해 진다.
지하도로 길을 건너 마을버스를 탔다. 숨어서 살긴 하지만, 웬지 이 동네 주민인것 같은 착각이 든다.
집 앞에서 보니 모든 방의 불들이 꺼져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 뒤를 돌아 산등성이와 연결된 곳으로 갔다.
그 남자가 깨어 있을지도 몰라 소리를 죽여야 했다. 집 뒤에 있는 배관 파이프를 통해 이층으로 올랐다.
내가 기거하는 방의 창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섰다. 침대위에 사다리가 놓여져 있고, 천정으로 통하는 문이
열려져 있다.
사다리를 밟고 올라서니 그녀가 그 곳에 등을 보이고 앉아 있다.
" 혼자 뭐해요? "
" 응.. 왔네.호호.. "
몸을 돌린 그녀의 손에는 술병이 쥐어져 있다. 그녀가 지켜보던 모니터에 그 남자가 누워있는게 보인다.
" 왜 그리 독한 술을.. "
독한 위스키 한병이 거의 바닥을 드러내는 중이다. 가까이 다가 앉으니 그녀의 입에서 독한 술내가 풍긴다.
" 저 인간을 보면서 술 마셨다, 잘했지.. 혹시 깨어나면 얼른 내려가야 하잖어.. "
혀가 꼬일만큼 많이 마신걸 알수 있었다. 시댁에 가서 좋지않은 일이 있었다는게 미루어 짐작이 간다.
" 이제 그만 마셔요.. "
" 바보.. 빨리 오지, 우리 애기 기다리다 취했잖어.. "
" 미안해요, 빨리 올려고 했는데.. "
" 아~ 참, 선영이랑 데이트 했구나.. "
" 방금 헤어졌어요.. "
" 괜찮어, 자긴 착한 내 천사니까.. 나 뽀뽀하고 싶어.. "
술병을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려놓더니 내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춰 온다. 싸한 위스키의 열기가 내 입 가득 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