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랜만이네요. "
일주일에 한번씩 회사에 출근하기로 한 날이다. 정희씨의 조카 선영이가 회사에서 기다리고 있다.
" 여기는 어쩐일로.. "
" 내가 불렀어, 선영이한테 한번도 연락을 안 했다며.. "
자신의 조카 친구라며 선배가 선영이를 소개시켰고, 덕분에 첫사랑인 정희를 만났지만 그동안 그녀를 까맣게 잊고 지냈다.
" 시간도 없었잖수.. "
괜시리 선영이한테 죄스런 감정이 생긴다. 자신의 이모인 정희와의 관계를 알면, 아마도 놀라서 기함을 할 것이다.
" 전 괜찮아요, 삼촌이 자꾸 나오라고 하셔서.. "
" 괜찮긴.. 준호도 선영이가 싫지는 않다니까 오늘 저녁이나 함께 하라구.. 남녀가 자꾸 만나야 정이 쌓이지, 에구~ 둘 다
똑같이 순진해 빠졌으니.. "
또 다시 선배에게 등이 떠밀려 선영이와 마주해야 했다.
" 많이 바쁘시죠? "
" 아, 네.. 그냥 조금.. "
" 저.. 술 한잔 사 주실래요? "
" 제가.. 술은 잘 못하는데.. "
" 아, 네.. "
둘 사이에 또 다시 침묵이 흐르고 있다. 딴에는 용기를 냈을텐데 미안한 마음이다.
카페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먹으면서, 그녀에게 와인을 권했을 뿐이다.
일주일 만에 혼자 사는 오피스텔에 들렸다. 온통 먼지가 쌓여, 두고 볼수가 없다.
큰 맘 먹고 대청소를 했다. 유리창이란 유리창은 죄다 열고 바닥과 가구들을 쓸고 닦았다.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등과 목덜미로 땀이 흐른다. 조금은 개운해 진다.
~ 선영이 만났다며.. ~~
옷장을 열어 정희집으로 가져갈 옷을 고르고 있는데 메시지가 왔다.
~ 네, 회사로 찾아 왔길래.. ~~
~ 선영이가 좋아하더라.. 잘 해줘.. ~~
~ 말도 안 돼.. 정희씨 조칸데.. ~~
느닷없는 정희의 메시지에 화가 치민다. 자기를 향한 마음을 매도하는 것만 같아 서운하다.
~ 준호씨도 자기 인생을 살아야지, 언제까지 숨어 살래.. ~~
~ 내가 알아서 할께요, 선우는 뭐해요.. ~~
얘기의 주제를 애써 돌려야 했다. 정희의 아들이라서 그런지 하는 짓이 마냥 귀엽다.
유치원에 갈때마다 저절로 눈이 간다.
~ 조금 아까 재웠어.. ~~
~ 아저씨는.. ~~
~ 아직.. ~~
~ 내일 일찍 갈께요.. ~~
잠이 오질 않는다. 그녀가 옆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지 도통 잠을 이룰수가 없다.
정희의 움직임에 따라, 옮겨 다니는 재미가 쏠쏠하다.
성능이 좋은 카메라와 고성능 마이크를 집안 곳곳에 숨겨놓고, 그녀의 움직임을 낱낱이 지켜볼수 있었다.
다만 한가지 남편과 한 침대에 누워있는 그녀를 보는건 가슴이 아팠지만, 정희와 같이 있다는 행복에 비하면 그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남편이 출근하고 선우가 유치원에 간 뒤로는, 하루종일 그녀와 같이 있을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숨어 지낸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점차 요령이 생기기 시작했다.
남편이나 선우가 집안에 있는 시간이면, 노트북을 열고는 밀린 업무를 처리해서 회사로 송출을 했고, 그녀가 잠이 든
시간에 맞춰 잠을 자게끔 됐다.
눈을 뜨면 그녀가 움직이는 동선을 쫒아, 주방이나 욕실로 옮겨다니며 지켜봤다.
하루 온 종일 내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는 그녀를 바라보는 재미로 살았다.
어쩌다 찬거리를 마련하러 마트라도 갈때면, 잠시지만 허전한 맘이 들기도 했다.
옷을 갈아 입을때나 화장실에서 볼일을 봐야 할때 무척이나 어색해 하며 어쩔줄 모르던 그녀가, 이제는 천정을 쳐다보고는
빙그레 웃을만큼 여유를 부리게도 됐다.
~ 빨리 내려와, 도와 줘.. ~~
다락방에서 작업을 하던 중에 메시지를 받고는, 김치 담그는 그녀를 도와 부엌일을 하기도 했다.
정희도 내가 옆에 있는것이 싫지 않은듯 청소를 도와 달라고도 했고, 어떤날은 나에게 설거지를 하라며 반 강제로 씽크대
앞에 세우고는, 자신은 주방식탁에 앉아 내린 커피를 마시며 흐뭇하게 웃기도 했다.
" 이렇게 편할때도 있네.호호.. "
" 그것 봐요, 나도 가끔은 쓸모도 있지.후후.. "
" 에구~ 됐어, 맨날 어리광이나 부리면서.. "
둘 만이 집안에 남겨진 낮에는, 그녀의 무릎을 베고 잠을 자곤 했다.
단순하게 편안히 잤다는 표현이 부족할만큼, 어릴적 엄마의 품속처럼 아늑했다.
몇시간 동안 꿀잠을 자고 일어나면, 다리가 저리다며 눈을 흘기곤 했다.
어느날 새벽, 잠이 오질 않았다. 남편 옆에서 잠들어 있는 그녀를 바라봤지만,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기에 감질만 난다.
그녀에게서 나는 암내에 중독이 되어가고 있었다. 욕실 천정에 있는 개구창을 통해 그녀가 입었던 팬티 하나를 가져 왔다.
다락방에 누워 그녀의 팬티를 얼굴에 뒤집어 쓰고 잠을 청했다. 시큼한 그녀만의 냄새가 코로 스며들자 금새 편안해 진다.
휴게실의 쇼파에 앉은 그녀의 무릎을 베고는, 음악 감상을 하며 달콤한 오수에 빠져 있을 때다.
초인종 소리에 방을 나선 그녀가 인터폰을 보더니 기겁을 한다.
" 어머나, 어째.. 시동생이야.. "
얼마나 놀랬는지 손까지 부들부들 떨어대는 그녀다.
" 왜 그렇게 놀래요, 숨으면 될텐데.. "
나 때문에 그러는줄 알고 다락방에 몸을 숨겼다. 시동생이라는 남자와 젊은 아가씨가 현관 안으로 들어선다.
" 어서오세요, 서방님.. "
" 많이 이뻐지셨네, 우리 형수님.흐흐.. "
귀에 꽂은 리시버에 그네들의 대화가 또렷이 들린다.
거실 쇼파에 앉은 그네들의 앞에서, 어쩔줄 모르는 정희의 몸짓이 어색하기만 하다.
" 형이 잘 해주는 모양이네, 하기야 봉 잡은거지 뭐.. "
" 무슨 말을 그렇게.. "
" 아~ 그만 됐고.. 얘가 이번에 시집간대요, 형 딸인데 모르척 하면 되겠수? "
" .......................... "
" 누구 씨인지도 모르는 애를 데리고 들어오질 않나.. "
" .......................... "
" 토요일에 집으로 와요, 가족회의를 해야 하니까.. "
" .......................... "
휘적휘적 현관문을 나서는 시동생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는다.
대문을 나서는 그들의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부리나케 다락방을 나섰다. 여전히 거실 바닥에서 꿈쩍도 못하고 있다.
" 왜 이래요.. "
너무 놀라 그녀를 들어 안았다. 반쯤은 혼이 나간듯 눈에 초점이 없다.
그녀를 들쳐 안고 안방의 침대에 뉘였다. 처음으로 들어온 안방이다. 방안의 가구들이 나를 거부하는 느낌이다.
욕실에서 수건을 꺼내 얼음물에 적셔서는 그녀의 얼굴과 몸을 씻었다. 그녀의 아픔이 내 아픔인 양 정신이 없다.
차가운 수건으로 씻어서일까, 꿈틀하며 나를 올려다 본다. 정신을 차려준 그녀가 너무도 고맙고 반가웠다.
가만히 나를 응시하는 눈빛에, 슬픔인지 모를 처연함이 묻어난다. 이마에 손을 짚어가자 내 손을 치우는 그녀다.
" 됐어, 준호씨.. 혼자 있고싶어, 그만 올라가.. "
낮지만 단호한 그녀의 말을 거역할수가 없다. 참담한 심정이 되어 다락방에서 그녀를 지켜봐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