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남자

숨겨진 남자 3

바라쿠다 2012. 9. 14. 18:54

" 내린 커피 좋아하는지 모르겠네.. "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그녀가 스피커 위에 커피잔을 내려 놓는다.

" 그러다가 쏟아지면 어쩌려구요, 명품인데.. "

" 에이~ 명품이면 뭐해, 소리가 별론데.. "

자신의 커피잔은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쇼파에 앉는다.      무릎 위로 포개 올린 다리 하나가 허공에서 까불어 댄다.

" 그렇지 않아요, 주인이 스피커의 성능을 몰라서 그렇지..  근데, 방안에 쇼파가 하나밖에 없네요.. "

" 여긴 나 만의 공간이에요, 남편은 음악을 좋아하지 않아서.. "

" 네에..  음악 좀 틀어 보실래요? "

커피잔을 쇼파옆 교탁에 내려놓은 그녀가 내 옆으로 다가와 오디오를 켠다.     

다시금 은은한 추억의 냄새가 코 끝으로 스민다.

" '삼바파티'네요.. "

" 어머나~ 이 노래를 아시네.. "

" 네, 알죠..  어느 여인이 가르쳐 줘서.. "

" 어머, 좋아하는 여자가 있었나 보다.호호.. "

재밌다는듯 상큼하게 웃어 제끼는 그녀의 모습에 정감이 간다.       예전보다 나이는 들었지만 그 때의 그 느낌 그대로다.

" 네, 잊을수 없는 첫사랑이 있었죠.. "

" 누군지 좋겠다, 이렇게 멋진 박사님의 기억속에서 사는 여자는.. "

그게 바로 당신이라는 말이 입속에서 맴돈다.      철없던 시절, 그저 맹목적일수 밖에 없었던 나만의 여신이 눈 앞에서

미소를 짓고 있다.

" 그 분은 내가 좋아했는지도 모를겁니다.. "

" 이긍~ 짝사랑이었네..    얘기나 해 보지, 나라면 받아 줬을텐데.. "

스피커를 열어 진공판에 작은 고무판을 붙이고, 케이스 뚜껑을 다시 닫았다.

" 어때요? "

" 글쎄..  소리가 조금 굵어진 것 같기도 하고.. "

" 예전 레코드는 바늘로 음악을 재생하기 땜에 긁어대는 소음이 겁쳐 더 정감이 있었죠, 지금의 CD는 그 단점을 보완을 한

것이고..   울림판 안에 비닐을 구겨 넣거나 스치로폴 가루를 넣으면 더 효과가 있을겁니다.. "

" 고마워요, 뭘로 보답을 한다지.. "

하마터면 키스를 해 달라고 할 뻔 했다.      문득 그녀와 같이 있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 술 한잔 사 주실래요? "

" 술?  좋아, 까짓거..  어차피 나도 심심했는데.호호..  잠깐만요.. "

 

아직 퇴근시간이 일러서인지 사당역에 있는 양곱창 집은 손님이 두 테이블 뿐이다.

" 나만 좋아하는 음식인가? "

" 아뇨..  이모님이 좋아하시면 저도 좋습니다.. "

기름이 튈까봐 앞치마를 목까지 두른 모습이 귀엽다.      무슨 결전이라도 치를 폼새로 지글거리는 불판에 눈독을 들인다.

" 이긍~ 말도 이쁘게 하네, 말 주변 없다면서.. "

" 진짠데..   지금까지 거짓말은 해 본적이 없어요.. "

" 어머~ 그런 거짓말이.호호..   그럼, 하나만 물어 봐야지..   내가 이뻐요? "

내 눈을 마주 보며 묻는 얼굴이, 흡사 어린아이가 잔뜩 호기심을 머금은 표정이다. 

" 네, 처음이에요..   이모님처럼 이쁜 분은.. "

" 어머나, 준호씨 못됐다~  나이 먹은 여자를 놀리고.. "

" 거짓말 아닌데.. "

" .....됐어요, 우리 술이나 한잔해요.. "

잠시 내 눈을 바라보더니 이내 눈빛을 거둔다.     그녀가 들어보이는 소주잔에 잔을 부딪쳤다.

첫 잔이 목으로 넘어가자 가슴끝이 짜릿해 진다.      아버지를 닮아 술이 약한 편이었기에 술자리를 멀리해 왔었다.

그녀와 같이 있고 싶은 마음에 술 핑계를 댔던 것이다.      한잔,두잔 술잔이 비워 졌다.

" 우리 선영이 어때요? "

" .....사실 이모님이면 했어요, 소개팅 나오신 분이.. "

선영이를 앞세우는 그녀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어 속내를 보이고 말았다.

" 자꾸 놀리면 화낼지도 몰라요.. "

" 화 내셔도 할수 없습니다, 진심이니까요.. "

몇잔의 술 때문에 용기를 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오매불망 그녀만을 바라 보았던 철없는 시절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 나쁜 사람이네, 준호씨.. "

얼추 마신술이 내 머리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올바른 지각을 지니고 살았던 내 사고를 송두리째 흔든다.

" 절 모르시나요? "

" ..................... "

" 전 정희씨를 잘 압니다.. "

" ..................... "

" 17년이 지났습니다..  오랫동안 정희씨를 그리워 했구요.. "

" .... 그럼..   그 때, 그 학생.. "

" 네, 접니다.. "

" 어머..   어떻게 이런 일이.. "

 

어느 날인가 그녀가 벗어놓은 팬티 몇장을 훔쳐 내 방에 숨겨 두었었다.    

날이면 날마다 분기 충천해 있던 거시기에 그녀의 팬티를 번갈아 가며 씌우고는, 이불속에서 야릇한 상상을 해 가며

뜨거운 정액을 분출하곤 했다.    

당시 집안일을 도와 주시던 아주머니가 그녀의 팬티를 발견하고는 아버지께 일러 바쳤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를 기다리던 아버지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다.      그 날의 그 일은 옹기종기 모여사는 사람들, 모두가

기웃거릴 만큼 시끌벅적 했었다.

얼굴과 온 몸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고, 남 보기가 부끄러워 내 방에 홀로 쳐 박혀 있다가, 밤이 깊은 새벽께 우물가에 

나가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대낮처럼 밝은 보름달 밑에서 처연한 마음을 달래고 있었을 때였다.

마침 늦게 귀가하던 그녀가, 나를 발견하고는 말없이 손을 잡아 줬더랬다.

" 너무 속상해 하지마, 니가 건강해서 그런거야.. "

내 마음을 달래 주고자 했던 그녀를 감히 쳐다보지도 못한채,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기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며칠후, 그녀가 이사를 갔다.      몇년이 지나도록 그녀의 생기 넘치던 모습을 머리속에서 떨쳐 낼수가 없었다.

 

" 그랬구나..  그때 나를 좋아해 줬던 그 학생이 이렇게 늠름하게 변했네.. "

" ..그때는 죄송했습니다.. "

" 아냐..  나한테 나쁜짓을 한게 아니잖어, 준호씨가 학생이라 나 땜에 공부하는데 방해가 될거라고 생각했어.. "

" 사실 정희씨를 잊으려고 열심히 공부를 했어요, 원래 공부는 취미가 없었거든요.. "

일찍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모든일이 싱숭생숭하던 그 시절에 그녀가 내 안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짝사랑이긴 했지만 처음으로 이성에 눈을 뜨게 해 준, 그녀를 잊을수 없어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그녀를 잊기 위해, 무섭게 공부를 파고들었다.     그래야만이 그녀에 대한 열정을 조금이나마 떨칠수가 있었던 것이다.

" 어머, 그럼 박사님이 된 것도 내 덕이네.호호.. "

" 그럴지도 모르죠..   정희씨 생각이 날때마다, 우물가에 나가서 찬물로 머리를 감았으니까.후후.. "

" 그럼, 이 술값은 준호씨가 내야겠다.호호.. "

이제는 스스럼없이 옛날 얘기를 나눌수 있음에 자꾸만 술잔이 비워졌다.      

그녀의 얼굴이 예전의 그 시절로 돌아가, 생기가 넘치는 나 만의 여신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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