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숨겨진 남자다.
사랑하는 그녀를 위해 나 스스로를 철저히 감추고 살기로 맘 먹었다.
지금 이 집에는 아무도 없다.
내가 숨어있던 다락방에서 내려와 욕조에 몸을 담궜다.
따스하고 편안한 온수의 느낌을 오랜만에 만끽하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서 학위를 받기 위해 유학까지 하는 바람에, 결혼 적령기가 되도록 여자를 만날 기회가 적었다.
맘에 맞는 선배와 음향기기에 대한 벤쳐사업을 해 보기로 한 후, 가끔씩 만나 사업 전반에 대한 논의를 할 때였다.
" 너도 여자가 있어야지, 너무 늦어지면 결혼하기 힘들어.. "
또래 친구들과 달리 여자를 밝히는 편도 아니었기에, 그닥 탐탁치 않게 여기는 나를, 선배는 소개팅 자리로 내 몰았다.
큰 기대감도 없이 약속 장소인 한강가에 위치한 호텔 라운지로 가야 했다.
카운터에서 이름을 가르쳐 주자, 종업원이 '김준호'라고 적은 팻말을 들고 넓은 홀을 한바퀴 돈다.
안쪽 끝까지 종업원이 들어가자, 한 테이블에서 손을 드는 여인이 보인다. 혼자가 아닌 둘이다.
" 안녕하세요, 김준호라고 합니다. "
자그마한 원형 테이블에 앉아있는 그녀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자매로 보이는 그녀들이 답례를 건네면서도 흘깃거린다.
" 나이보다 젊어 보이네, 반가워요.. "
햇살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봄날에 어울리는, 자주색 원피스를 입은 여인이 먼저 말을 건넨다.
" 웬걸요, 벌써 32인데.. "
" 난 선영이 이모에요, 어떤 분인지 궁금해서 따라 나왔어요. 호호.. 괜찮죠? "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활달하게 웃는 그녀의 볼우물이 이쁘다. 굵은 웨이브가 진 긴머리를, 방울이 달린 끈으로
단정하게 묶은 모습이다. 이모라기보다는 언니로 보일만큼 젊게 보인다.
당사자인 듯한 선영이라는 여자는 말없이 눈만 마주치고 있다.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했다는 말만 들었다.
조용한 성격인지 부끄러움을 타는건진 알수 없지만, 말수가 적은듯 미소만 지을 뿐이다.
" 괜찮습니다, 저도 말재주가 없는 편이라서.. "
" 그러시구나.. 둘 다 말이 없으면 재미없는데, 어머 ~ "
본인이 실수한 걸 깨닫고선 손으로 입을 가린다. 날렵한 손가락마다 연두색 메니큐어가 칠해져 있다.
" 이모도, 참.. 내가 왜 말이 없어? 주제만 맞으면 밤새 떠드는데.. "
" 다행이네요, 선영씨라고 했죠.. 제 대신 재미난 얘기 좀 많이 해 주세요.. "
" .... 네.. "
대답이 늦는걸로 봐선 그닥 말재주는 없다고 보여진다. 또 다시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으셨다믄서요.. "
" 네, 얼마전에.. "
" 공부를 참 잘했나 보다, 난 머리 좋은 사람이 부럽더라.호호.. "
선영이의 이모가 있어 그나마 대화가 끊기지 않는다. 어디서 많이 본듯한 느낌은 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 중이다.
어릴때부터 혼자 있는 습관이 몸에 배서 그런지 몰라도, 여자와 둘만이 있을때면 유난히 어색해 지곤 했다.
" 그냥 운이 좋았어요, 뭐랄까.. 사실 논문 주제도 별게 아니였는데 그냥 넘어 가더라구요.. "
" 주제가 뭔데요? "
본인 스스로는 처음으로 대화에 끼여드는 선영이다. 그만큼 숫기가 없는 탓이라 짐작된다.
" 소리의 추억이죠, 어릴적부터 귀에 익은 소리들이 사람의 감정에 끼치는 영향이랄까.. 그리고 음악이 사람들의 뇌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뭐 그런 등등.. "
" 오머나~ 나도 음악 좋아하는데.. "
나이가 몇인지는 몰라도 선영이라는 아가씨보다 목소리가 더 통통 튀는 이모다.
" 어떤 음악을 들으세요? "
" 다 좋아하는 편이에요, 주로 팝송을 많이 듣지만.. 근데, 요즘 CD는 별로더라.. 예전 전축은 잡음이 많았어도 훨씬
정감 있었는데.. "
" 그게 일테면 소리의 추억이죠, 음질과는 상관없이 느낌은 다르기 마련이고.. 스피커를 조금만 손 봐도 그런 효과를
낼수도 있습니다.. "
" 어머, 그러네.. 혹시 시간되면 내꺼 좀 봐 줬으면.. "
음악 얘기가 나오자 눈을 반짝이는 이모다. 몸을 앞으로 숙이면서까지 관심을 보인다.
" 그러세요,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니까.후후.. "
" 내가 너무 주책없이 오래 앉아 있었나 봐, 미안해요.호호.. "
" 아닙니다, 별 말씀을.. "
" 선영아~ 좋은분 같애.. 천천히 얘기도 하고 아예 저녁도 먹고 들어와라, 얘.. 우리 선영이 맛있는거 사 주실거죠? "
" 이모는 참.. 처음 본 분한테.. "
" 뭘 좋아하는지 몰라도 그러겠습니다.. "
" 괜찮어.. 돈 많이 벌테니까 바가지 팍팍 씌워, 우리가 언제 박사님한테 얻어 먹겠니.호호.. "
" 어~ 저 부자 아닌데요.. "
" 농담이에요, 총각 박사님.호호.. 나 먼저 간다, 이모부 올 시간 됐어.. 우리 선영이 잘 부탁해요.. "
자리에서 일어난 이모가 밝게 웃으며 몸을 돌린다. 옅은 화장품 냄새가 코로 스민다.
" 이모가 참 젊으시네요.. "
" 네, 막내 이모라.. 우리 엄마랑 열두살 차이고 이모도 저보다 열두살이 많아요, 집에 토끼가 세마리나 돼요.. "
" 아~ 토끼띠시구나.. 그럼, 아버님은.. "
" 엄마만 계세요, 아빠는 제가 어릴때 돌아가시고.. "
" 그러시구나.. 저랑 똑같네요, 난 아빠 밑에서 컸는데.. "
편부모 밑에서 큰 사람들은 조금씩이나마 표가 나기 마련이다. 나 역시 고모한테서 그런 얘기를 자주 들으며 자랐다.
그만큼 내 행동에 보이지 않는 어떤 부족함이 있다는 뜻으로 새겨 듣곤 했다. 선영이의 말수가 적은것도, 어쩌면 그
탓일수도 있을것이다.
" 네에~ 그럼 형제는.. "
" 외아들입니다.. 그나마 아버지도 얼마전에 새어머니를 만나는 바람에 요즘은 저 혼자 지내죠.. "
" 외롭겠어요, 혼자 계시려면.. "
" 만성이 돼서 견딜만 해요.. 그나저나 저녁 먹기는 아직 이른것 같은데, 우리 뭐 할까요? "
" 그냥, 그쪽 분이 편하신대로.. "
물어보는 내가 어색할 지경이다. 겉으로 봐서는 귀엽고 싹싹하게 생겼는데 도통 대화가 이어지질 않는다.
문득 라운지 창 밖으로, 유람선이 한가롭게 한강을 거슬러 오르는게 보인다.
" 유람선이나 타러 가십시다.. "
더 이상 앉아 있다가는 두 사람 모두 꿀먹은 벙어리 신세가 될런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