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희 남편이 잔금을 일찍 치르면서, 기존에 있던 갈비집의 집기를 들어내고 내부수리를 하기 시작했다.
신이 난 미진이가 내부수리를 하는 가게로 출근하다시피 하며 부푼 꿈에 젖어 있었다.
영희 남편도 두번씩이나 들려 내부공사를 하는 가게를 흐뭇하게 지켜 보기도 했고, 영희 역시 자주 들려 미진이와 식사도 하고
박연숙의 '모래시계'에서 맥주를 같이 마시면서 어울리곤 했다.
어느날인가 가게문을 열 준비를 하고 있는데, 한 떼거리로 뭉친 여자들이 포장마차로 들어섰다.
단란주점 사장 최인숙과 '모래시계'의 박연숙, 영희와 미진이까지 왁자지껄하며 조용하던 가게에 생기를 불어 넣었다.
" 웬일들이야, 장사들 안하고.. "
" 오빠 ~ 우리 친목계 만들기로 했다.호호.. "
" 바쁜 여자들이 그렇게 할일들이 없어.. 그럴 시간이 있으면 독거노인 봉사나 가자니까.. "
땡중과 함께 신림동에 있는 철거촌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지금은 대단지 아파트로 바뀌었지만, 그 당시 산기슭에
자리잡은 판자촌에는 혼자 사시는 노인네들이 많았다.
절에 다니는 신자들이 정기적으로 벌이는 봉사현장에, 땡중의 꾐에 빠져 한번 다녀온 후로는 가끔씩 그곳을 찾아 갔더랬다.
유난히 힘겹게 마지막 세월을 연명해 가는 노인들의 생활을 지켜 본다는 건, 강심장을 지닌 나로서도 가슴이 먹먹해 져 외면을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후배 영식이 놈과 단란주점 여사장 최인숙을 부추켜 두어번 그곳을 다녀 오기도 했지만, 나름대로 바쁜 그들이기에 다들
마음은 있더라도 지속적인 봉사활동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 바로 그거야.. 미진이가 그 일을 하자네, 오빠.. "
" 김사장.. 와이프 하나는 잘 골랐어, 얼마나 붙임성이 많은지.. "
'모래시계' 박연숙과 단란주점의 최여사를 비롯한 몇몇 업소 주인들에게, 한달에 한번씩 정기적인 봉사활동을 하자고
미진이가 졸랐던 모양이다.
다행히 몇사람이 흔쾌히 동조를 하고서는, 친목계 형식으로 만나자고 뜻을 같이 했단다.
" 니가 나보다 낫구나.. 내가 가자고 할땐 요리조리들 빠지더니.. "
" 당연하지, 오빠 머리로 그게 되겠어? "
" 또.. 남들도 있는데 버릇없이.. "
도대체가 다소곳한 말투와는 거리가 먼 여자다.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언니들 앞에서 조심성이라곤 없는 것이다.
" 오빠가 귀여워 죽겠대. 호호.. 어쩌다 그렇게까지 망가졌수 ~ "
미진이와의 실랑이를 지켜보던 박연숙이 나를 놀려대자, 모든 여자들이 손뼉까지 치면서 좋아라들 한다.
" 강적이야.. 거칠것 없는 영훈씨를 맘대로 주물러 대질 않나. 호호.. "
그네들의 눈에는 다소 어려워 보이던 내 캐릭터가, 미진이로 인해 보통의 남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느껴졌을 터이다.
" 다음주 일요일에 첫번째 모임을 갖기로 했어.. "
" 그렇게 빨리? "
" 응, 그날이 절에서 봉사활동을 가는 날이래.. "
" 욕쟁이 할머니도 가자고 해 봐야지.. "
옆에서 지켜보며 흥미를 보이던 미희까지 거들고 나선다.
" 거기도 벌써 다녀왔어.. 욕쟁이 할머니도 좋아 하시더라구, 젊은 사람들이 기특하다면서.. "
단란주점 최여사의 말이다. 미진이의 의견에 따라 최여사와 박연숙이 주체가 되어 맘이 통하는 업주들을 설득했단다.
뜻이 같이 하겠다는 업주가 벌써 10 여명이란다. 대충 회원들이 만나는 목적과 월 회비까지 정했다고 한다.
" 예상보다 더 길어지네.. "
처음 갈비집의 집기들을 들어내고 목수들과 전기업자들이 바쁘게 뒤엉켜 작업을 할때만 하더라도, 금새 개업식을 하겠거니
했는데 아직도 일주일 이상 걸리지 싶다.
모처럼 쉬는 일요일이라 집에서 쉬고 싶었지만, 가게가 꾸며지는 모습을 애지중지하는 미진이의 성화에 못이겨 현장까지 나온
것이다.
마침 영희 부부가 시간이 난다고 하길래 점심이라도 같이 하자고 불러냈다. 너무 큰 선물을 받은지라 자꾸 신경이 쓰였다.
" 이렇게 꾸미니까 이쁘긴 하네, 번화한 강남쪽 분위기하고 비슷하고.. "
" 그쵸, 언니.. 진짜 이쁘지.. "
처음엔 천정을 그냥 까만색 페인트로 칠하자고 하는 인테리어 업자의 말에 긴가민가 했었지만, 벽과 바닥을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밝은 색채로 마감을 하고나니 제법 그럴듯하게 보인다.
" 이제 돈만 많이 벌면 되겠네요. 후후.. 형님, 축하드려요.. "
" 축하는 무슨, 내 힘으로 이룬것도 아닌데.. 안 그래도 아우한테 면목이 없구만.. "
" 또 그러시네, 맘 편히 생각하시라니까요.. 형님이 번거나 진배 없어요, 사람을 살렸는데 그까짓 돈에 비하겠어요.. "
" 그래요, 오빠.. 우리집 애들도 오빠를 보고 싶대요.. "
" 자꾸 부끄럽게 왜들 그래, 내가 잘한게 무에 있다고.. "
내가 한일에 비해 너무 융숭한 대접을 받는 기분이다.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 이토록 끈끈하게 이어질 줄을 그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미진이를 알고부터는 주변의 만남도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
" 이사람한테 얘기 들었어요, 독거노인 봉사도 하기로 했다면서요.. 말이 쉽지 그것도 누구나 하는건 아니죠, 만일 그때
형님이 귀찮다고 그냥 지나쳤으면 우리 부부는 못 만났을수도 있었어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미안해 하세요. 후후.. "
" 밥이나 먹으러 가요, 이러다 날 새겠네. 호호.. "
" 냉장고는 언제 온대? "
" 다음주 토요일까지 가져온대, 오빠는 금요일까지 장사하면 돼.. "
영희네 부부와 식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서도 새로 오픈할 가게일로 꼼꼼이 챙기는 미진이다.
" 보은에 액땜하러 간다며.. 가게 오픈하면 시간도 없어.. "
" 일요일에 가려고 했는데, 봉사활동 가야 하잖어.. 그 뒷날에나 가자구.. "
" 근데, 그 액땜을 꼭 해야되냐? "
" 무슨 소리야, 청송스님이 한 말 잊었어? 내가 당신 집안을 일으킨대잖어, 까불지 말고 시키는대로 해.. "
보은에 가게 되면 다른건 관두고라도, 못된 말버릇을 고쳐 달라고 빌고 싶은 마음이다. 멀쩡하게 생긴 여자의 말투가
저 모양인지 이해가 안된다.
" 자기야 ~ "
" 갑자기 왜 이러냐, 소름 돋겠네.. "
은근한 목소리로 내 목을 감싸 안더니, 무릎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는다.
" 내 발 좀 씻어주면 안될까.. "
" 얘가 무슨 소릴 그렇게 험악하게 하냐.. 남자한테 발을 씻어 달라니,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네..
미진이의 엉덩이를 들어 옆자리에 내려 놓았다. 느닷없이 애교를 부리는 미진이의 정신세계가 궁금하던 참이다.
" 피 ~ 치사하게, 남자가 어찌 그러냐.. 자기 여자 발 좀 씻어주는게 뭐 어떻다고, 내가 이쁘지도 않다는 말이네.. "
" 이쁜거하고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남자한테 시킬게 따로 있지.. 나한테 니 발이나 주무르란 말이냐? "
미진이 발을 씻겨 주는거야 어렵지 않겠지만, 괜시리 여자의 발을 만진다는건 남자로서 좀 그렇지 싶다.
" 두고 봐, 반드시 오빠가 씻어 주게끔 만들테니까.. "
" 내가 그럴때까지만 살아라, 에구 ~ 내 팔자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