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쎄, 한번 입어 보라니까.. "
이름만 대면 알만한 매장에 들어가서는 어울릴것 같다며 탈의실에서 입어 보란다.
재윤이의 마음씀이 고맙긴 해도 텍에 붙어있는 가격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숙희다.
머뭇거리는 자신의 등을 밀기까지 하기에 마지못해 탈의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 입었다.
" 그것 봐, 이쁘기만 하네.후후.. "
탈의실 밖으로 나와 거울 앞에 선 모습을 보고는 재윤이가 더 흡족해 한다.
죽은 전 남편의 넉넉하지 못한 살림으로 인해, 언감생심 명품옷 따위는 꿈도 꾸질 못하고 살아 왔다.
자신만을 이뻐한다던 태산이는 비싼 옷은 근처도 못가게 하는 구두쇠였다.
처음으로 유명 메이커라는 옷을 입어 본 건 진희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태호가 태산이를 만날때 입고 가라고 사준게
고작이었다.
그 옷도 50만원이 넘질 않았는데 지금 입고 있는 정장은 이백만원이나 된다.
숙희 자신이 보기에도 몸에 붙듯 잘 어울린다. 어울리는 정도가 아니고 탐이 날만큼 세련돼 보인다.
큰 무늬의 스커트가 히프라인과 허벅지를 탱탱하게 감싸고 무릎께에서 부터 다리가 시원스레 잘 빠져 보인다.
연한 하늘색 블라우스 위에 걸친 오렌지색 슈트가 사람이 틀려보일 정도여서 저절로 욕심이 생기는 것이다.
" 이쁘기는 한데.. "
큰 선물을 받아본 경험이 없는 숙희로서는 당연하게 받아야 하는것이 어색하기만 하다.
" 됐어, 이걸로 하자구.. 포장해 놓으라고 하고 다른 매장에도 가보지.. "
" 이거면 됐지, 어딜 또 가는데.. "
자신의 한달 월급이나 다름없는 정장을 사 주고도, 또 다른 옷을 보러가자는 재윤이의 말이 현실과 혼동이 될 정도다.
" 같은 매장에서 옷을 사면 분위기가 비슷해서 새로운 맛이 없어, 내가 봐둔게 있으니까 그리로 가 보자구.. "
결국 재윤이가 이끄는대로 전혀 다른 느낌의 옷을 한벌 더 입었는데 숙희 자신에게 맞춘듯 몸에 감긴다.
그걸로도 쇼핑은 끝나지 않았고, 구두매장에 들려서는 재윤이가 골라준 하이힐을 두켤레나 안겨 줬으며, 화장품 매장에
가서는 직원의 설명에 따라 값비싼 수입화장품까지 구입을 했기에 쇼핑백을 둘이서 나눠 들어야 했다.
" 저기서 우회전 해야 돼.. "
양손에 들기에도 많은 쇼핑백 때문에 재윤이가 집에까지 바래다 줄수밖에 없었다.
코딱지만한 방 두개가 전부인 자신의 집을 재윤이에게 보여주기 싫었던 숙희다.
고태산이도 자신이 사는 집을 보고는, 무시를 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남편이 생을 달리하고는 하루하루가 힘들던 시절에 도움을 핑계로 자신에게 다가온 고태산은 아들과 함께 힘들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는, 계산기를 두드리듯 겨우 식생활을 모면할수 있게끔만 해주며 자신을 속박했다.
태산이의 행태가 맘에 들진 않았지만, 그나마의 도움이라도 끊길세라 눈치만 보고 살아왔던 지난 날이다.
" 집이 좁긴 하네, 그래서 김치 냉장고를 사준대도 들여 놓을곳이 없다고 했구나.. "
거실마저 없는 집이라 재윤이를 주방의자에 앉게 하고, 새로 산 옷들을 장속에 넣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 입었다.
" 조금만 기다려, 커피 끓여줄께.. "
" 내일부터는 빼먹지 말고 피부관리실에 가라구, 얼마나 보기 좋아.. "
전신 마사지를 받고 태반 추출액까지 주사를 맞았다. 느낌이 그래서인지 몰라도 한결 몸이 가벼워진듯 하다.
재윤이는 자신이 시킨대로 손톱과 발톱에 노란색 메니큐어가 칠해 진걸 보고는 이쁘다고 희희낙낙이다.
" 재윤씨 눈에 그렇게나 맘에 들어? "
자신에게 잘 해주는 남자가 이쁘다는데 어찌 감흥이 없으랴. 형편에 따라 돈의 노예가 된다더니, 생전 처음으로
값비싼 옷으로 치장을 시켜 준 재윤이가 따뜻한 인연으로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 그럼 ~ 흐흐.. 내가 다른건 몰라도 여자를 보는 눈은 있걸랑.. "
" 바람둥이니 오죽할려구, 만나는 여자마다 잘해 줬겠지.호호.. "
" 그럴지도 모르지, 내가 생각해도 맘에 드는 여자만 보면 너무 쉽게 정을 주려고 한것 같애.. 그렇지만 양다리를
걸치진 않았어, 와이프한테 들켜서 깨진게 탈이지.. "
" 에고 ~ 무서버라, 나도 머리카락 홀랑 뽑히는거 아냐.. "
" 이번엔 조심해야지, 아들이 있었다고 했나? "
" 응, 대학 입시에 떨어져서 학원에 다녀.. 그래도 제 아빠를 닮아서 착한 편이야.. "
" 우리 딸이랑 동갑일세, 그 녀석이랑 친해져야겠는데.. "
" 힘들거야, 재윤씨한테 고백할게 있어.. "
고태산이와의 과거를 밝히고 싶진 않았지만, 아들까지 들먹이며 자신과 인연을 맺고 싶어하는 재윤이에게 숨기고만
있을수는 없었다.
어느새 믿어도 좋을만큼 재윤이가 다시 보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 애 아빠가 갑자기 세상을 뜨고는 만나던 사람이 있었어, 도움을 준다는 핑계로 우리집에도 들락거렸고.. "
식어버린 커피를 홀짝이며, 결코 자랑거리가 못될 얘기를 담담히 풀어 놓았다.
" 목마른 사람에게 단물을 주는듯 했지만 넉넉하지도 못했고, 내가 자신의 소유물인양 내 기분은 안중에도 없이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바람에, 아들한테는 얼굴을 들지 못할만큼 죄스러운 마음으로 지냈거든.. "
" 저런 ~ 그렇게 못된놈도 있었네, 그래.. "
" 재윤씨도 아는 사람이야, 고태산이라고.. 얼마나 치사하게 구는지, 그 사람이 올때마다 아들이 친구집으로 자리를
피해야 했어.. 아마도 엄마의 남자라면 곱게 보지 않을거야.. "
" 그랬구나 ~ 많이 힘들었겠네.. 고태산이는 그러고도 남을 놈이지, 쉽진 않겠지만 숙희 아들하고 친해보고 싶어..
그래야 자주 놀러오기 편하지.흐흐.. "
" 난 자신없어, 워낙 아들한테 죄 지은 기분이라.. "
진심으로 아들에게 면목없이 살아온 숙희다.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이다.
" 두고 봐, 남자들끼리는 마음을 열기만 하면 통하는건 시간문제야.. 그건 그렇구 넓은집으로 이사를 하면 어때.. "
" 갑자기 이사는 왜.. "
" 집이 좁아서 아들도 불편했을거야, 조금 더 넓은집으로 가면 아들한테 점수도 딸 것이고.. "
" 그게 어디 한두푼 갖고 되는 일인가.. "
이십여년을 좁은 다세대에서 살았던 숙희는 말만 들어도 감격할만한 얘기지만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었다.
" 일단은 내가 집세를 책임질테니까 너무 신경쓰지마, 숙희한테 부담은 주지 않을거니까 내가 시키는대로 해 봐.. "
" 글쎄, 잘 모르겠어.. "
자신의 집에 들렸다가 저녁에 오피스텔로 온다며 재윤이가 일어선다.
" 오늘 저녁에도 안 들어올거야? "
재윤이에게 밥을 차려주고는 그의 스케줄을 챙기는 정숙이다.
" 요즘 바쁘잖어, 밤에 사무실에 출근도 해야하고 또 며칠후에는 지방으로 내려가야 돼.. "
" 그럴일이 있으면 하루전에라도 얘기를 해 줘야지,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 생각도 해 주란 말이야.. "
언제 들어오고 나가는지를 알아야 새로운 재미에 빠지기 시작한 자신도 운신하기 좋기 때문이다.
오늘도 제임스와 강쇠에게 달려가고 싶지만 그들에게 줘야하는 경비도 남편몰래 마련을 해야 했고, 연이틀 녀석들의
공격으로 인해 아랫도리가 퉁퉁 부어 참아야만 한다.
" 알았어, 앞으로는 미리 얘기를 해줄께.. 설마하니 또 다시 남자를 끌어들이진 않겠지.. "
잊을만 하면 옛날일을 들쑤셔 정숙이의 상처를 건드리는 재윤이다.
" 이 남자가.. 언제적 얘기를 지금까지.. "
자주 옛날 일을 빌미삼아 싸우던 부부다. 요즘 애들은 쿨하게 잊는다던데 이 놈의 웬수는 툭하면 건드린다.
" 내가 없는말을 지어낸건 아니잖어.. "
" 그러는 자기는 올바르게 살아왔네, 그동안 계집들한테 갖다 버린돈이 얼만데.. "
" 그거야 마누라가 집에 붙어 있게끔 해 주질 않으니까 그럴수밖에.. 원, 무슨 애교가 있길 하나.. "
" 됐어, 나도 마찬가지야.. 제발 부탁인데 긁지나 말어.. "
무슨 놈의 남편이란게 사사건건 따지고 든다. 태어나길 쫀쫀하게 타고 났는지 여자한테 져 주는 법이 없다.
" 나도 바라는 바야, 당신이 먼저 나를 배신했기 때문에 바람을 핀거니까.. 이렇게 사는것도 누구 덕인데.. "
" 누구덕은.. 우리 아빠가 만들어 논거지.. "
" 아이구 ~ 당신한테 맡겼으면 진작에 알거지 됐을걸.. 장인 어른이 나를 믿었으니까 이만큼이나 누리고 사는거야.. "
한번 불거지면 서로가 지지 않으려고 대화가 엇나가곤 한다. 또 그럴때마다 재윤이의 여자 편력은 늘어만 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