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생(殘生)

잔생 112

바라쿠다 2019. 12. 11. 05:10
"아니~ 아버님.."
"응, 그래.."
새로운 거처에 가져 갈 옷가지며 생활도구를 챙기는데 며느리가 들어 온다.
"머리는 왜.."
"자꾸 머리가 빠지길래.."
"..그렇다구 삭발까지.."
"보기 흉하냐.."
~수염 좀 깍아, 이왕이면 머리도 밀고..~
새롭게 사는 맛을 가르쳐 준 순희의 명령이다.
연한 살에 따가운 수염이 닿는다며 짜증을 냈다.
"..그건 아니지만.. 저건 뭐에요.."
"집하나 얻었다, 그리로 옮기려구.."
"..느닷없이 왜..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잘못은.. 홀가분하고 싶어.."
작은 전세집을 얻음도 순희의 생각이다.
집과 직장을 오가느라 시간내기도 힘들고, 모텔은 아늑하지 않아 싫다고 했다.
"그래도 이건 아니죠, 아범이랑 상의도 없이.."
"니들한테 미안해서 그래.."
"남들이 뭐라겠어요, 한분뿐인 부모님 쫒아 냈다고 할텐데.."
"힘 없어지면 들어 오마, 이렇게 사는 것도 한 방법이야."
다 늙은 나이에 한 여자를 바라 보는 감정이 생긴 규식이다.
뒷방 늙은이 취급이 스스로 당연하다 여겼는데, 살아가는 이유가 생겼다.
순희가 나타 난 뒤로 삶의 의욕이 샘 솟는다.
반신불구나 다름없는 남편과 어린 자식이 있으며, 홀어머니가 살림을 도와준다 했다.
그 가정을 돌보기 위해 야근하는 직장에 다닌단다.
여염집 유부녀이면서 30년 이상 어린 순희와 법적인 인연이야 불가함을 안다.
그녀에게 작으나마 도움이 된다면 무슨 일이던지 할 작정이다.

"완죤 맛이 갔네."
"봉씨 심하다, 격려는 못해 줄 망정.."
"맛 간게 대수냐, ㅋ~ 내 맘대로 살련다."
"ㅋ~ 축하해요 용호씨."
선배와 인아가 보금자리를 꾸몄다고 집들이를 하겠다길래 넷이 모였다.
희정이 집 근처에 떡하니 신축빌라를 사 버렸단다.
방 두개짜리 빌라에 신혼이라도 되듯 온갖 가전제품이며 침대까지 몽땅 신제품이다.
거실에 놓인 교자상위에 온갖 산해진미가 그득하다.
"밖에서 만나면 될걸, 뭐하러.."
"인아가 따뜻한 밥 먹여 준단다, 샘 나지?"
"대책없는 화상.."
"초 치지 마, 보기 좋은데 뭐."
"봉씨 구닥다리같애."
인생이란 여정은 수학문제처럼 정답이란게 없는 법이다.
유부녀가 샛서방을 두거나, 이쁜 여자를 숨겨 두고 바람을 피는게 손가락질 받을 일은 아닌 세상이다.
"나중에 나 원망이나 하지 말어."
"웬 원망?"
"그러게, 우리 겁주는거지 봉씨.."
"인아씨 선배 잘 붙들어, 한번 고비는 넘길거야."
".........."
"안 좋은거 보여?"
"짜식이.. 겁 주는거야?"
"나도 잘 몰라, 알았으면 TV나오게.."
허접스레 한물 간 도사지만 가끔은 뿌연 안개속에 투영되는게 있다.
인아의 뒷날 모습이 자주 보였다.
근심어린 얼굴을 하고 가뭄으로 쩍쩍 갈라 진 논에서 망연자실했다.
모르긴 해도 재산상의 큰 손실을 입었지 싶은 몰골이다.
"됐어 마셔, 한번 죽지 두번 죽냐."
"이 년이 살벌하게.."
"그래 마시자, 마시고 죽자~"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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