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까지 마신 술로 속이 타서 일어나 보니 집안에는 아무도 없다. 시간이 정오가 가깝다.
그래도 머리맡에 꿀물이 타 있어 단숨에 들이키고는 핸폰을 열어보니 메시지가 4개나 와 있다.
~~ 술 많이 드신것 같아 꿀물 타놓고 나왔지롱.. 건강 생각해서 너무 많이 드시진 말아요 ~
소영이의 메시지다. 지 엄마가 꿀물을 탄줄 알았더니, 지를 이뻐해 주는걸 아는 어린것의 마음씀이 기특하다.
~~ 공부 열심히 하고, 담임하고 일은 잘 됐으니 걱정말거라.. 우리 막내 화이팅 ~
소영이에게 답신까지 하고 메시지를 들여다 보니 소영이의 담임인 배인숙이다.
~~ 미안해요, 선배. 어머니가 오해를 하셨나 봐요. 일어나는대로 전화주세요. ~
아무래도 모친께서 곤란한 질문을 퍼 부었지 싶다. 그렇게 당부를 했는데도 노인네들은 어찌 자기가 편한대로만
상상의 날개를 펴는지 실소를 금할수 없다.
~~ 걱정은 붙들어 매시고, 속이 꽤나 쓰릴텐데 해장국이라도 먹었는지.. ~
학교에서 수업하는 시간일수도 있어 메시지로 대신했다.
~~ 통장 확인해봐, 시간나면 핸폰이라도 해주고.. ~
미진이의 메시지다. 아마도 수정이에게 날 뺏기지 않으려고 힘겨루기를 하는것으로 보인다.
~~ 내일모레 개업을 한다면서 오빠는 연락도 없냐. ~
자기가 해야 할일을 남에게 미루고서 소꿉장난만 하려고 드는 수정이의 메시지다.
이제는 둘이서 어떻게 나오던지 말릴 명분도 없고 힘도 없다. 지들이 알아서 찧고 까불던지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수정이에게 돈을 빌린죄로, 당분간은 코가 꿰어 단란주점 일을 봐 줘야만 할 것이다.
단란주점을 오픈해야 할 날이 다가온지라 마무리가 잘 돼가는지 현장으로 나가봐야 했다.
큰 일들은 모두 끝냈고 페인트 칠도 마무리가 되어 전체적으로 깔끔하게 정리가 된 듯 하다.
청소를 맡긴 아줌마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주류회사에 연락을 취해 현장에서 냉장고 일체를 납품 받기로 했다.
일하는 아가씨를 충원코자 초희에게 부탁이나 하려고 구반포로 가는중에 배인숙에게서 전화가 왔다.
" 고마웠어요, 선배. 웬만해선 그런적이 없는데 너무 편해 그랬는지 과음을.. "
엊저녁의 실수가 미안하다며 굳이 한잔을 사겠다고 하길래 어제에 이어 다시금 호프집에 마주 앉았다.
" 괜찮아, 그 만큼 마신것도 대단한거야.. 더군다나 실수한 것도 없는데, 뭘. "
" 어머니께선 소영이 집에 대해선 모르시나 봐요, 날 선배의 애인쯤으로 생각 하셨는지 많이 궁금해 하시던데.. "
아침결에 일어나 욕실에서 씻을수 밖에 없었는데, 거실에 앉아 계시던 어머니를 뵙고 모른척 할수가 없어
인사를 드려야 했단다.
자신의 여자친구인줄 알고 이것저것 유심히 물어보시는 통에, 묻는 말에만 대답을 했더니 며느리감이라도 되는양
좋아 하시더란다.
인숙이가 알고있는 소영이에 대해서는 모르시는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단다.
" 소영이 엄마하고 사귀는 중이야.. 마침 소영이가 억울하게 당하는 느낌이 들어서 아빠 행세를 하게 됐구,
그럴려고 그런건 아닌데 동생을 속인게 됐네. "
" 김선생도 이상하다고는 했어요, 선배가 재혼을 했다는 얘기는 들은적이 없다고.. "
" 재혼을 하진 않았지만, 설사 한다손 치더라도 무에 자랑스런 일이라고 떠벌였겠어. "
" 선배도 우여곡절이 많은가봐요, 나처럼.. "
이혼녀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어제 처음 만났을때 어딘가 모르게 그늘이 보였다.
" 그랬네, 성격은 시원해 보였는데 어쩐지 조심스럽더라니.. "
" 그게 보였나 봐요.. 하긴 선배 만났을때, 나도 모르게 돌아가신 오빠가 생각나길래.. "
사람은 누구나 처음 만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끌리는 감정을 가질수도 있을것이다. 싫으면 싫은대로 좋으면
좋은대로, 노래 가사도 있듯이 아마도 죽은 오빠의 느낌이 떠올라 첫인상의 점수를 후하게 받았지 싶다.
그러고 보니 나 역시도 배인숙을 만나고는 떠 오르는 여자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에 만났던 여자친구였는데,
요즘이야 여자들이 맨발로 구두나 운동화를 신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 지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맨발로 정장을
소화한다는건 주위의 시선을 모을 정도로 유난히 격식을 따지던 시절이었다.
그런 점에서 볼때 상당히 자기 소신이 뚜렸했던 그 친구는, 어른들과 만나는 한식집에서도 맨발인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따위는 개의치 않고 밝은 얼굴로 재잘거리곤 했었다.
긴 생머리에 늘씬한 자태도 비슷해 예전의 그 친구가 언뜻 생각이 나는 중이다.
" 앞으로는 편하게 취해도 될거야, 오빠처럼 챙겨 줄테니까.. 그런데 엉덩이가 커서 그런지 제법 무겁던데,후후.. "
" 선배도 술 취한 여자를 더듬는 치한인가 봐요,호호.. "
웃고 떠드는중에 통키타를 맨 여자가 무대에서 인사를 하더니, 심수봉의 '그때 그사람'을 부르는 탓에 잠시 노래에 빠져
들었다.
다른 가수들의 노래도 좋지만 유독 심수봉의 노래만 나오면 그 분위기에 같이 빠질때가 많다.
" 저 노래 나올때가 생각나네, 참으로 아무 생각없이 좋은 시절이었는데.. "
" 선배도 센치할때가 있네요, 난 김현식이 좋던데.. "
" 그래~ 언제 한번 노래방에 가서 실력을 보여 줘야겠다.. 김현식걸루다.. "
" 거기다 노래까지 잘하면 진짜로 유혹해 봐야지,호호.. "
" 그럼, 나는 유혹에 넘어갈 준비만 하면 되겠네.후후.. 오늘은 일이 있어서 일찍 가봐야 해.. "
아지트에 들린 시간이 아직은 손님이 없을 시간이라 초희와 마주 앉을수 있었다.
" 그러니까 괜찮은 아가씨가 필요한거네.. "
" 여기보다는 테이블이 많고 단체 손님들도 있을테니까 성격이 좋았으면 싶어. "
아무래도 일,이차를 거친 손님들의 말투가 조심성이 없을터라, 대충 받아주고 넘어갈수 있는 무던한 아가씨가 맞지
싶었다.
아지트처럼 분위기를 잡고 얘기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같이 노래도 불러야 하고 부둥켜 안고서는 부르스라도 춰야
할 것이다.
" 먼저번에 오빠도 한번 봤지,정양이라고.. 성격도 좋고, 며칠전에 일할데가 없겠냐고 묻던데.. "
" 어느 정도나 책임을 져야 할진 몰라도 한번 만나나 보자구.. 지금이라도 와 보라고 해봐. "
" 그게 맨입으로 되나,호호.. "
" 뭔 소리야, 맨입으로 안되면 뽀뽀라도 하자는 얘기냐? "
" 뭐가 되든지.. 부동산도 소개시켜 주면 구전이 떨어지잖어.. "
제 입으로 말하기가 쑥스러워 소개비를 핑계삼아 오늘 저녁 책임지라는 말로 들린다.
" 일단 그 아이 얘기나 들어보자구.. "
" 시간은 7시부터 새벽 2시까지가 좋겠는네.. "
정양이 청바지를 입은 편한 차림으로 와서는, 대충 조건을 맞춰 페이를 주기로 결론을 냈다.
" 나도 그 시간이 맞지 싶어요, 낮에 하는일이 있어서 여기처럼 새벽 늦게까지 하면 피곤 하걸랑요. "
" 그럼 모레가 개업이니까, 내일 저녁 가게에서 만나 한번 둘러보자구.. 그리고 정양보다는 이름을 불러야겠는데
수봉이 어떠냐, 정씨라서 정수라라고 부르고 싶지만 내가 심수봉이 팬이라서, 후후.. "
" 조금 촌스럽지 않을까.. "
옆에서 듣던 초희가 자신의 가게처럼 착각을 한다.
" 그런데는 촌스런 이름이 더 인기가 많은 법이야.. 두고봐라 수봉이가 스타가 될테니까.. "
생긴것도 곱상하고 성격도 밝아 아저씨들한테 귀염 꽤나 받지 싶다.
" 난 상관없어, 새로 생긴 이름대로 살아가면 되지,뭐. "
어린 나이에 인생의 쓴맛을 본 듯한 수봉이의 말투 역시 모든걸 달관했다는 듯 거침이 없다.
부모 밑에서 곱게 자라 배우자를 고르고 있을 나이에, 술마신 취객들을 상대로 먹고 살아야 하는 처지다.
" 그곳 사장도 경험이 없으니까 잘 부탁한다. 장사하다 불편한게 있으면 나한테 얘기를 해주고.. 생각처럼만
된다면 니 은혜는 잊지 않을테니까.. "
" 눈썰미도 제법이라 잘 할거야, 그나저나 오늘은 장사할 기분도 안난다. "
은근히 나를 건너다 보는 초희의 말이 볼일이 끝났으면 가게문을 닫겠다는 뜻이다.
아무래도 오늘밤은 초희에게 팔려가야 할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