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빈 술병이 늘어난다.
나랑 대작을 해서 버티는 여자가 흔치 않은데, 아직까지 꼿꼿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나저나 학부형이랑 식사를 하러 나왔는데 돈 봉투라도 건네야 하는건지, 모른척 해야 맞는건지 판단이 어렵다.
일단은 그냥 헤어지고, 동료교사인 후배에게 넌지시 물어볼 일이다.
" 나하고 똑같이 마시면서, 재미난 얘기를 나눌수 있는 사람은 오랜만이네요. "
" 어머,그래요? 영광입니다.호호.. 제가 좀 질기다고 흉 보는건 아니죠? "
" 그럴리가요, 술친구가 생긴것 같아서 반가워서 그래요.. 진짜로,후후.. "
" 제가 순진해서 진짠줄 알고 술친구 하자고 덤비면 어쩌실려고,호호.. "
얘기를 나누다 보니 서글서글한 말투며 성격이 부담없고 편안스럽다. 술 마시면서 격식을 차리지 않게 만든다.
" 언제든지 말씀만 하세요, 이렇게 술 마시면서 편한 분도 드무니까.. "
" 저 정말로 알아듣고 전화 드릴지도 몰라요. "
얼마후 자리를 파하고 일어섰는데도 비틀거리는 기색조차 없다. 택시라도 잡아주려고 횡단보도 앞에 나란히 섰다.
" 괜찮으시면 입가심으로 한잔 더 하실래요? "
대단한 애주가인듯 여자가 먼저 2차를 꺼낸다. 마침 초희가 있는 아지트가 길 건너에 있다.
" 저기 아지트라고 간판 보이죠? 저 집이 단골집인데 저리로 가십시다. "
차분한 조명아래 구석자리에만 손님 하나가 있을뿐, 가게문이 열리며 딸랑이는 종소리에 안쪽에서 초희가 걸어 나온다.
새로운 여자와 같이 들어선 모습에 미세한 동요가 이는듯 싶더니, 자연스레 영업을 하는 자세로 돌아간다.
" 어머나, 사장님~ 오랜만이네요.. "
엊그제 몸을 섞고서 아침까지 차려준 여자가, 배선생 모르게 눈을 흘기며 가운데 테이블로 안내를 한다.
" 술은 뭘로 드릴까, 키핑해 놓은 다니엘로 가져 올까요? "
주문을 받고자 말은 하지만 배선생의 위아래를 훓는다. 어떤 여자인지 탐색을 하는것이다.
" 뭘로 하실까요? 입가심을 하실 양이면 작은 맥주도 있는데.. "
" 아뇨, 저도 다니엘 좋아해요. "
술과 안주를 세팅하면서도 연신 배선생을 살피는 초희다. 평소같지 않게 여자를 어렵게 대하는 내 모습이
의아스러운 것이리라. 이곳 아지트로 온것이 후회가 되는 순간이다.
" 자, 이쁘신 우리 선생님 먼저.. "
" 고맙습니다. 근데, 술친구 하기로 해 놓고.. 선생이란 호칭이 좀 그렇다.호호.. "
바깥에서 들어와서 그런지, 술기운이 오른건지 얼굴이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다.
" 호칭이라..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배여사, 인숙씨, 동생, 자기.. 후후.. 원하시는건? "
술의 힘이란게 이래서 좋은지도 모른다. 딸아이의 스승이면 어려워서 격식을 갖춰야 하는 법인데, 몇시간의
대작으로 스스럼이 사라진듯 하다.
" 편하게 부르고 싶으신대로,호호.. 나는 선배라고 부르고 싶은데요, 동료 선배니까.. "
" 훨씬 가깝게 들리네, 나도 동생이라고 부르는게 맞지 싶네요. "
만나기 전에는 까칠한 선생일지도 몰라 걱정을 했다. 다행스럽게 편안한 술친구가 된 듯 하고, 더불어 소영이를
안심하고 맡길수 있다는 생각으로 흡족해 진다.
" 여자 친구들이 많았다면서요.. 김선생이 그러든데, 유명한 바람둥이였다고.. "
후배 녀석을 만나면 따끔하게 얘기를 해야겠다. 어찌 남자란 녀석이 그리도 입이 싼지, 에효 ~
" 예전에 나이트에 자주가는 놀새이긴 했지만, 다 지난 일이죠. "
" 에이~ 아니라고 그러던데.. 나한테도 조심해야 된다고.호호.. "
" 설마, 우리 애를 맡아준 선생에게 불경죄를 범할수야 없지.. 안심해요, 곱게 집까지 모셔다 드릴테니까.후후.. "
" 그 멘트는 별로다,뭐.. 남자가 박력도 없고, 내가 매력이 없다는 뜻으로 들리는게, 영.. "
술기운인지 말하는 농담의 수위가 깊어진다. 원래부터 태생이 밝아서인지도 모르겠지만..
" 매력이야 차고 넘치는 여자지, 우리 동생은.. 그런 얘기는 많이 들었을텐데.. "
" 호호.. 이제서야 작업꾼답네. 내가 어디에 매력이 있어요? 남자가 보는 눈이 제일 궁금하더라.. "
" 우선 키가 늘씬하고 성격도 모난데는 없는듯 싶고, 그리고 가장 끌리는 곳이.. 에이~ 그만 두자고.. "
아무리 친해 졌다지만 오늘 처음 만난 딸애의 선생인데, 조금은 과하다 싶은 얘기까지는 피하고 싶다.
" 피~ 치사하게 사람 마음을 궁금하게 약만 올리네, 선배는. "
" 좋아, 그렇게 알고 싶다면 오늘 만난 기념으로 시원하게 가르쳐 줄께. 우리 인숙이 동생은 말이지.. 큰 키에서
허리를 지나는 엉덩이의 곡선이 참 이쁜 편이야. 직업상 야하게 입지 못해서 그렇겠지만, 아마도 타이트 한 치마를
입으면 여러 놈 쓰러질걸.후후.. "
" 진짜 여자를 보는 눈이 예리하다, 학교 선생이라 달라붙는 치마를 입을수가 없어서 그렇지.. 목욕탕에 가면 내 몸을
훔쳐보는 여자들도 많거든요.호호.. "
" 동생~ 그러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아프거든.. 한번 띄워 줬다고 그렇게 자찬까지 하면 쓰나.. "
" 뭐, 요즘같은 세상에 자기자랑 하는게 흉이 되나.. 학교 갈때 맘에 드는 옷 입지 못하는 것 만도 억울한데.호호.. "
속에 있는걸 거침없이 풀어내는 시원스러움이 있다. 내숭을 떨면서 감추는 여자들과는 천성이 다르지 싶다.
그만큼 나를 남자로 대하는게 아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상대편을 가식없이 믿어주는 성격을 가졌다.
" 담에 만날때 최대한 이쁘게 하고 나와서 내 눈이라도 호강시켜 주면 모를까. 후후.. "
" 정말 그래볼까? 내가 유혹을 하면 넘어 오시려나? "
" 이크 ~ 내가 유혹에 약한걸 벌써 눈치챘네,그려. "
웃고 떠드는 사이에 다니엘 한병이 추가되어 그것마저 바닥을 드러낸다. 화장실에 다녀오는 그녀의 걸음걸이가
조금은 위태로워 보인다.
눈치를 봐서 어색하지 않게 자리를 마무리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던차에, 결국 한번 몸의 균형을 잃은 그녀가 정신을
놓고 테이블에 고개를 숙인채 잠이 들어 버렸다.
흔히 오래 참았던 술기운이 오르게 되면, 봇물 터지듯이 취해 버리게 되는것처럼 흔들어 깨워도 반응이 없다.
집도 모르고 모텔에 재울수도 없어 난감하다. 후배녀석에게 전화를 하기도 좀 그렇다.
" 어쩜 좋으냐, 갑자기 술기운이 올랐는지 인사불성이 됐으니.. "
난감한 처지를 어쩌지 못해, 초희에게 하소연을 했다.
" 어쩌긴 뭘.. 오빠를 좋아하는 눈빛인데 무슨 바람둥이가 안하던 내숭까지 떠나 몰라. "
" 좋아하긴, 임마.. 학교 선생님한테 무슨 경우 없는 소리를.. "
가뜩이나 곤란한 지경에 빠져있는데, 같은 여자라고 질투를 하지 싶어 짜증까지 더해 진다.
" 에그~ 같은 여자가 보는 눈은 정확한거야, 오빠를 쳐다보는 눈이 작업에 걸린 눈빛인데.. "
" 시끄러, 임마. 도와주기 싫으면 그만두고 내 등에 업히기나 해라. 집에라도 데려다 뉘어야지. "
어떻게 할수가 없어 집에다 뉘이고는 모친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자세한 내용을 털어놓기도 뭣해서 어쩌다 보니
여자를 떠 맡을수 밖에 없었는데, 아들하고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니 괜히 며느리감으로 오해를 하지 말라고 했다.
방을 배인숙에게 뺏긴 꼴이 되어 집 밖으로 나왔으나 마땅히 갈곳이 없다.
아지트로 가면 초희를 좋아하는 모양새로 비쳐져 그녀가 원할때마다 자주 불려가야 할지 몰라 불안스럽다.
그렇다고 수정이를 불러내기도 그렇고, 미진이에게 연락이라도 한다면 그녀 또한 수정이보다 주도권을 가질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중이라 그도 어렵다.
아무래도 그 중 편한 성미의 집으로 향할수 밖에 없었다. 이런식으로 옮겨 다니며 잠을 자는건 아니지 싶다.
어디 교회나 절이라도 가서 기도를 해야지 싶다. 제발 한 여자를 만나 정착하게 해 달라고..
내 소원대로 아무 생각없이 살게만 해 주신다면 착한 종교인이 되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