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생(殘生)

잔생 75

바라쿠다 2018. 12. 10. 10:42
"방이 4개씩이나.. 너무 넓은데, 기거할것도 아닌데.."
"비어있는게 이것뿐이라.."
박귀순이 숙박업소는 싫다며 가끔씩 만나더라도 보금자리 흉내는 내야 한단다.
며칠사이지만 자기 나름대로 부지런히 움직인 모양이다.
사당동 건물을 명의이전하고, 신축빌라 하나를 전세얻어 각종 살림살이로 채우는 것도 꽤나 
발품을 팔았을게다.
얼마나 이 곳을 찾게 될런지 모르지만, 여느 집과 다름없이 부족한건 없지 싶다.
"우선 씻어요, 저녁준비할 동안.."
"그럽시다.."
60을 바라보는 예전 사람이기 때문일까, 굳이 자신의 손으로 저녁밥을 먹이고 싶단다.
남편이 있는 몸이지만, 그런 속내를 보면 요즘 여자들과 달리 남자를 위하는 마음자세부터가 
다르다.
"헐~"
거실에도 욕실이 있건만, 굳이 안방에 딸린 곳을 쓰라는 이유를 알듯 하다.
벽에 붙은 작은 장식장에 오밀조밀 용품이 정갈하게 구비돼 있다.
다들 그러하다고 하겠지만 수건이나 샤워용품, 면도기세트등이 가지런히 자리하고 내 옷인듯
싶은 잠옷까지 물에 젖을세라 곱게 접어 비닐팩에 담겨 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다.
그녀의 단정한 성품이 보이고, 엉터리 도사인 날 대하는 태도마저 가히 짐작된다.
"앉아요.."
"뭘 이렇게.."
씻고 나오니 어느새 여염집 주부처럼 홈드레스에 앞치마까지 곁들여 잊은 그녀가 주방에서
반긴다.
"입맞에 맞을런지.."
"후후.. 싸구려 입이죠."
크진 않지만 주방식탁에는 제법 풍성한 음식들로 그득하다.
해물탕인듯 모락모락 김이 나는 찌개와 뚝배기에는 양념고기가 담겨있고 장조림과 세가지 
나물이 타원형 접시에서 각기 대비되는 색깔을 뽐낸다.
그것뿐이랴 곱게 썬 김치와 탱탱한 어리굴젖이 군침을 삼키게 한다.
"술 드시죠?"
"소주있으려나.."
"당근이죠,ㅋ~"
냉장고에서 소주를 가져오더니 잔에다 따라 건넨다.
"드세요.."
"잔 가져와요, 같이 마셔야지.."
술을 즐기는 여인은 아니지만, 나 역시 혼자 마시는건 싫다.
물론 중독자도 아닐뿐더러, 술이란 대작을 해야 그 맛이 배가되는 법이다.
"찌개 맛있네요."
"다행이네요."
술한잔 넘기고 맛 본 해물탕 국물이 더할나위 없이 시원스럽다.
잔을 꺽어 입에 적신 그녀의 볼에 홍조가 핀다.
못먹는 술을 거절치 아니한 그 마음씨마저 이쁘다.
"..저기.."
"..?.."
"..그 여자분.. 어떤.."
"그냥 평범해요, 식당하면서.."
"한번 보고싶다.."

"진짜 헷갈리네,호호.."
"그러게, 패딩색깔만 달라.."
"귀에 점있어 누나,ㅋ~"
"누나? 25살 차인데?"
"그럼 이모라 불러요?"
"누나가 낫다,얘.."
민속주점에서 합석한 쌍동이 영계들과 노닥이는 연숙이다.
귀엽게 생겼고 키가 작은편이라 다소 왜소한듯 하지만, 그런 점이 오히려 만만해 보이기까지 
하다.
젊은 피와 나란히 앉은 정애 역시 연신 깔깔거리는게 마냥 좋아 보인다.
하기사 아들뻘인 애들과 어울리니 오랜만에 젊어지는 기분마저 든다.
"재미난 일 많겠다, 너희들.."
"이름불러 누나, 난 철이 쟨 철수,후후.."
"우리 면허증 하나뿐이야, 운전할때 교대로 가지고 다녀.."
"어머~ 말 된다, 누가 봐도 모르지.호호.."
"또.."
술이 도와서겠지만 불과 한시간만에 지기가 된듯 얘기가 그치질 않는다.
소맥을 하느라 마신 맥주병과 빈 소주병 때문에 안주줍기가 불편스럽다.
"음~ 이건 비밀인데.. 여친들도 몰라.."
"여친들?"
"ㅋ~ 한번씩 바꿔서 만나거든.."
"어머머~
"에이~ 설마.."
"진짜야.."
"집에서 다 얘기하거덩.. 오늘 뭐 했는지, 어디서 키스했다는것까지.."
"눈치 못채?"
"모르더라구.. 얘가 나고, 내가 얘야.히히.."
"아우~ 그만 마실래, 취하나 봐.."
다소 술이 약한 정애가 크게 기지개를 켠다.
"노래방가자 누나.."
"노래방?"
"응, 술 깰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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