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생(殘生)

잔생 18

바라쿠다 2016. 12. 22. 19:30

타국 생활이기에 외로운 밤을 견디어 버티고자 이를 악 물었다.

여자로서의 기쁨은 끝이라고 생각하며 지내 왔다.

주위를 지나치는 부부나 연인들을 볼때 부럽기는 했으나 남의 일이라 여겼던 길순이다.

의도하지 않은 섹스지만 오랜만에 여자가 됐다.

마지못해 손님의 요구로 몸을 던지는 것과, 미묘한 감정을 지니고 남자의 몸을 안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흔히 남자들이 오해하는게 있다.

직접적인 교미를 해야 여자들이 흥분한다고 알고 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무턱대고 삽입하고자 하는 행위는 창녀촌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대개의 여자는 그 행위 이전에 준비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몸의 성감을 일으키고자 하는 남자가 맘에 드는 상대였을때 여자의 몸은 깨어날 것이고, 그렇지 못하고 어거지로 탐코자

할때는 여자의 몸이 식는 법이다.

그런면에서 졸지에 치뤄 진 합치이지만, 태식씨의 고백이나 다름없는 진심을 접했기에 제법 뿌듯한 쾌감을 끌어 낼수

있었다.

외롭기만 했던 타향에서 든든한 우군을 가지게 된 기분이다.

" 미안해요, 밤에 나가는거.. "

" 별 말을..  그런거 싫으면 내가 돈이 많았어야지. "

흔히 여자를 구속하는 못난 남자는 아니지 싶어 믿음이 간다.

노래방에 나간다고 해서 싸구려인양 무시당한다면 차라리 안 보는게 낫다.

돈 몇푼 쥐어주면서 도우미라고 천하게 보는 남자와는 말섞기조차 싫다.

아픔이 있는 사람은 남의 아픔까지 이해하기 마련이다.

" 올라갈께요. "

" 그래요, 내일 봅시다. "

 

돌아오는 차 안에서 가볍게 코를 고는 그녀다.

그저 취향에 맞는 여자를 만났다는 고마움은 있었다.

이렇듯 자신을 놔 버린 희정이의 모습은 처음 본다.

조수석에 앉아 피곤한 듯 잠에 빠진 그녀는 세월의 찌꺼기가 다닥다닥 묻은 모습이다.

흔히 여자와의 만남을 무슨 무용담 늘어 놓는 팔불출이 있다.

어느 곳이 이쁘고, 정성 깃 든 음식을 해 바친다며 여자의 장점을 말하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제 자랑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대접을 받고 싶으면 변해야 한다는 것이 내 주장이다.

젊었을적이야 자신 역시 그러했기에 군에서 주는 훈장을 다는 기분으로 화려한 경력을 가지게 된 폭이지만, 나이가 먹어

감에 따라 여자를 바라보는 눈이 변해 그녀들을 존중하게 되고 상대적으로 칭찬받는 재미가 있음을 깨닫게 됐다.

남자라는 권위를 앞세워 여자를 닥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들의 맘을 얻어 자발적인 사랑을 이끌어 내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 간파하게 된 것이다.

과거를 돌이켜 보면 스스로 생각해도 희안한 인간이다.

젊은 나이에 이 계통에 뛰어 든 것도 그렇고, 이쁜 여자를 봐도 내 기준에 맞춰 엉뚱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도 그러 하다.

속세의 여자에게 훈정을 주지 못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남들처럼 가정을 꾸리지 못하고, 즉석적인 삶을 살아 왔다.

어쩌다 만나는 소꿉 친구들이 부러운 적은 있었지만, 재밌는 생활을 버리기에는 지금의 생이 더 소중했지 싶다.

꼬물락거리는 아이들이 이쁘긴 했지만 풍성스런 시간을 포기하기엔, 지금의 자유가 보편적인 삶보다 우선이 된다

여겼을 것이다.

조수석에 앉아 피곤한 잠을 보충하는 희정이를 보며, 세상의 근심이나 쪼들림도 나름 가치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드는건

처음 느끼는 감정일게다.

남편과 애들까지 있는 그녀와 미래를 꿈 꿀수는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맘이 끌리니 스스로 종잡기 어렵다.

" 깨우지.. "

" 피곤해 보이길래.. "

진작 집 근처에 도착했지만 곤한 잠에 빠진 그녀를 깨우기 싫어, 언덕에 있는 자그마한 공원에 차를 세우고 잠이 깨기를

기다린 국진이다.

" 자기 집으로 가도 될까? "

" 집에 안 가? "

" 응, 가기 싫어. "

그녀의 삶에 뛰어 들어 위로나마 해주고 싶은데, 그것이 중뿔난 행동이 되지않을까 염려 된다.

서로간의 입장이란게 있을진대 그녀의 삶이 아무리 어렵다 한들, 내 기준에 맞춰 감놔라 배놔라 하는 식이야 말로 건방진

참견이라 보여질수 있기 때문이다.

 

" 그냥 자. "

" 미안해, 이따 봐. "

밤새워 저녁장사를 한 희정이는 이 곳으로 오는 내내 시체나 다름없다.

자기만의 형편이 있겠지만, 밤새워 식당일을 하는 것도 모자라 자식의 학교생활까지 챙기는지라 잠이 부족할수 밖에

없다는게 이해는 된다.

그런걸 뻔히 알면서도 자신이 사랑하고 싶은 여자가 겪어야 하는 고생은 보기 싫다.

속옷만을 걸치고 침대에 누운 희정이를 건드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그래서는 치한대접 받을 분위기다.

욕심을 채우기보다는 가장 편한 얼굴로 잠이 든 그녀의 모습을 여러 각도로 폰의 카메라에 담는 즐거움으로 대신 한다.

피곤에 지쳐 잠이 든 그녀를 위해 에어컨의 온도를 맞추고 거실로 나온 국진이다.

편히 잠 재우기 위해서는 세탁기의 소음마저 시끄럽기로, 그 동안 미뤄놨던 역학책을 꺼내 모처럼의 학습시간을 갖는다.

한동안 책에 몰두하며 잠시 졸았지 싶다.

" 띵~동. "

CCTV의 포착음이 울리기에 화면에 눈을 뒀더니 고연숙이가 계단을 오른다.

이런 경우가 생기지 싶어 여자를 집에 들이지 않았건만, 실로 난감한 지경이다.

급작스럽기에 희정이의 방을 살피고는, 현관문을 나서 연숙이를 맞이했다.

" 웬일이래. "

" 어머, 집에 있었네.   반찬 주려고.. "

" 고맙구먼.  큰 길에 있는 커피숍에 가 있어, 금방 갈께. "

" 냉장고에 넣어 줄께요. "

" 됐다니까~ "

푼수인지는 진작부터 알았지만 눈치라곤 없는 여편네다.

방안의 희정이라도 듣게 된다면 두 여자가 마주치는 불상사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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